-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방선거와 개헌 논의가 예고된 2006년은 차기 대선 레이스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다. ‘격변적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은 파다하다. 정치권에 ‘큰 장’이 섰기에 정치광고·컨설팅 업계의 물밑 준비도 분주하다. 기자는 최근 국내 주요 광고·홍보회사 사장 및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2007년 대선과 정치 컨설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강의 내용 중 관련 부분을 중심으로 3대 예상 변수를 꼽아봤다.
열린우리당엔 “우리는 대선에 강하다”는 ‘자기확신’이 있다.
2002년 대선 패배 직후 한나라당 핵심은 갤럽의 대선 ‘리뷰’ 자료를 면밀히 검토했다.
지역별 득표에서 이회창 후보는 영남, 강원을 제외하고 완패했다. 그러나 ‘유권자의 출신연고지별’ 득표에선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이 후보는 호남 연고지 유권자를 제외한 모든 지역 연고지 유권자들에게서 노무현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은 것으로 나왔다.
“호남 유권자는 영남 유권자에 비해 소수”라는 상식이 깨진 순간이었다. 호남을 떠나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호남 인사를 포함한 ‘호남 연고 유권자’는 그 수에서 ‘영남 연고 유권자’ 전체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새로운 분석틀이 나왔다.
이는 한나라당이 ‘친호남 서진정책’을 추진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한나라당이 좋아하는 ‘경제논리’대로라면 호남고속철은 해선 안 될 사업이지만, 이해찬 총리가 이에 반대할 때 한나라당은 적극 지지했다. 한나라당은 광주학생운동의 격을 높여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꾸는 법안을 냈다. 광주일고 동문회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나라당은 호남을 배려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호남에서의 지지율 상승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의 ‘득표 전략적’ 목표는 호남을 배려함으로써 수도권 거주 호남 인사들의 반(反)한나라당 정서를 완화해 이들 중 일정부분을 지지층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일종의 ‘성동격서’ 방식이다.
행정수도 이전논란, 공공기관 지방이전 발표로 조성된 수도권의 ‘반(反) 여권 정서’는 한나라당의 이 같은 전략과 맞아떨어져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수도권에서 최고의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수도권의 호남 연고 유권자 밀집지역에서도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를 완승으로 이끌었다.
‘수도권 지역의식’의 부상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래 1987년, 1992년, 1997년, 2002년 대선에선 영·호남에서 특정 후보에게 몰표가 나오고 충청은 캐스팅 보트, 수도권은 유력 두 후보가 비슷한 비율로 나눠 갖는 식이 됐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다르다. 분명 수도권에선 ‘수도권 지역’ 의식이 부상하고 있으며, 수도권은 독자적 정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수도권 지역 의식은 여권의 필승카드인 ‘호남+충청 연대’와도 비견된다.
한나라당은 물론 당에 우호적인 현재의 수도권 민심을 대선까지 끌고 가려한다. 한나라당으로선 2006년 서울시장·경기지사·인천시장 선거가 이를 ‘증폭’하는 단계다. 여론은 선거에서 이긴 쪽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내는 속성이 있다. 승자의 지지자들은 ‘거봐 내가 맞았지’라고 생각하고, 비지지자들 중 일부는 ‘어? 내가 틀렸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지방선거, 특히 광역단체장 선거가 무승부 또는 한나라당의 패배로 결론 나면 이를 전환점으로 수도권 민심은 달라질 수 있다.
여권 인사들 중 상당수는 ‘수구보수’ 한나라당에 대권을 내주는 것은 자신의 민족관, 세계관의 파괴 그 자체이며 악몽이다.
현재 여권에선 다양한 정치적 메타포(은유법)가 등장하지만, 해법은 ‘반한나라당 연대의 구축’이다. 고건 전 총리, 민주당 등 반한나라당 성향 대선 세력과 여권의 통합론 또는 연대론은 여기서 출발한다. 여기엔 ‘열린우리당적 가치’의 일정 부분 포기가 선결조건이다.
고건-민주당-심대평 선(先) 연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실현되더라도 현 여권을 대체할 것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통령이 만든 당이 대통령 재임 중 그 실체가 사라진 사례가 한국 정치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개혁, 민족화합, 지역균형발전 등의 이념을 갖고 창당했으며 ‘야당하는 것도 괜찮다’는 ‘선명 세력’도 상당수 상존한다.
즉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해 ‘반 한나라당 연대’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열린우리당의 틀을 지켜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므로 두 가치의 충돌이 여권의 고민이다.
사실 김대중 정권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당시에도 ‘여당을 해체하자’는 정계개편론이 떠돌았지만 여권은 ‘새 인물의 등장’으로 해결했다.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여권 주자는 DJ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여권의 ‘늪’이었던 ‘DJ vs 반DJ’ 구도를 걷어냈다.
현재의 여권 위기 또한 ‘반노(盧)정서’로 인해 초래된 측면이 있기에 적절한 시기가 되면 여권은 2002년 대선 때처럼 여권의 중심이 되는 ‘새 인물’을 띄워보는 카드로 반노 정서를 완화하는 데 주력할 가능성이 있다. 여당 해체 식에 가까운 정계개편은 이후에나 고려해볼 옵션이 될 수 있다.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로 고착화하는 한나라당과 달리 여권엔 정동영, 김근태, 이해찬 외에 김혁규, 김부겸, 유시민, 강금실, 진대제, 정몽준 혹은 박원순(?) 등 (상상은 자유이므로) 대입해볼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새 인물과 개헌론이 결합하면‥
여권은 달라진 커뮤니케이션 환경도 즐길 수 있다. 과거엔 적어도 대선 2년 전엔 대선주자 반열의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려야 대통령후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대중매체를 통한 인지도 향상에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2002년을 계기로 한층 강력해진 인터넷 파워는 이런 공식을 용도폐기시키고 있다. 한 정치인이 범국민적 화제의 중심이 되고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데는 이젠 한 달도 걸리지 않는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 등 반 한나라당 연대의 구축은 현재는 각 당 내부의 반대로 지지부진하다. 대통령조차 부정적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인물이 전면에 나서고 통합과정에서 부각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원래 극렬 반대 뒤의 극적 통합이 효과가 더 크다. 남녀는 싸우면서 정이 드는 법이고 구경하는 사람도 그런 결합에 박수를 친다.
이와 관련, 지방선거 후의 개헌논의는 범여권 통합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대통령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개헌과정에서 발언권이 커진다. 특히 이원집정부제 등 권력분점형 개헌은 권력지분에 대한 ‘법적 보장’ 성격이 짙다. 군소세력에 매우 매력적이다. 여권으로서도 ‘여당 해체’ ‘대규모 정계개편’의 부담을 줄이면서 범여권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지방선거 후에도 한나라당이 지지율에서 우위를 보일 경우 개헌 국민투표가 실제로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대통령 임기 개정(5년 중임→4년 단임), 대선·총선 동시 실시 등은 합리적으로 보이긴 하나, 일단 개헌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되면 ‘현 정권의 실정 심판’이라는 한나라당에 절대 유리한 정치적 이슈는 사라지고 가치중립적 ‘개헌 찬반론’이 득세하게 된다는 점을 한나라당은 내심 우려한다. 개헌논의를 쟁점화함으로써 굳이 유리한 판을 흔들어 변수를 늘릴 필요는 없다는 계산도 있는 것이다.
대선의 예측 불가능성
그러나 대선은 예측 불가능성이 높다. 정치권도, 유권자도 훨씬 덜 엄숙해졌고 ‘넷심(Net心)’처럼 톡톡 튄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및 대선를 앞두고 기자는 대선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자택을 방문했다.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무엇이냐”는 즉흥적 질문에 정 회장은 진지하게 “소림축구”라고 답했다. “감명 깊게 본 영화의 장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자주인공이 ‘먼산에서 소리치면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며 남자주인공에게 그 산으로 가서 소리 질러보라고 시키는 장면”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기자는 폭소를 떠뜨렸다. 정말 예측 못했던 답변이었다. 그는 후보 단일화, 단일화 파기 등 예측불허의 방식으로 대선 결과를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