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은 병술(丙戌)년으로 12간지 중 개의 해다. 비록 간지를 따지지 않는 외국이지만 푸른 잔디 위에서 개들을 동반자 삼아 새해 벽두 라운드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최적의 날씨와 최상의 조건을 갖춘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에서 색다른 체험에 빠져보자.
30℃를 웃도는 무덥고 습한 날씨인 태국의 다른 도시와 달리 치앙마이는 해발 300m 고원지대에 위치해 기온이 한낮은 20~25℃로 약간 덥고 아침과 저녁은 18℃ 전후로 선선하다. 습도도 23%로 쾌적하다.
특히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건기여서 비가 전혀 오지 않는 맑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 골프를 즐기기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때문에 치앙마이는 이 기간이 겨울인 북반구 골퍼들에게 명소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이 무렵엔 ‘골프 전세기’가 운항될 만큼 골프마니아들에게 인기가 높다.
치앙마이에는 특유의 디자인과 레이아웃으로 조성된 7개의 골프장이 있다. 이 가운데 라운드 내내 개 서너 마리가 따라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골프장이 있는데, 바로 그린밸리 골프클럽(Green Valley G.C.)이다.
유명한 골프장 설계가인 데니스 그리피스가 설계해 1990년 개장한 이 골프장은 18홀 정규 코스로, 파72 전장 7177야드로 비교적 긴 편이다. 조니 워커 대회 등 많은 국제 골프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국제적인 규격과 시설을 갖췄다. 필드는 전체적으로 평탄하되 부드러운 기복을 가미했고, 결정적인 샷을 할 곳에는 워터 해저드를 설치해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만들었다. 쉬워 보이지만 정복하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다.
전반 9홀은 해저드가 적은데다 페어웨이가 넓고 평탄해 여성적인 반면, 후반 9홀은 코스 길이가 길고 연못과 깊은 벙커, 기복이 심한 그린으로 남성적인 코스가 이어진다. 전후반 코스에서 이처럼 상반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골프장의 특징이다.
남국의 골프코스답게 페어웨이 양쪽에는 키 큰 야자수, 진홍색 부겐빌리아, 주홍색의 아프리칸 튤립, 흰색의 플루메리아, 담청색의 향수나무 등이 잘 가꿔져 있어 정원예술의 진수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홀마다 새로 라운드를 시작하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라운드를 시작하자 어디선가 검은 개 3마리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일행 주위를 빙빙 돌며 경계하는 듯하다가 이내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앞발을 들고 뛰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자 납작 엎드리거나 손을 혀로 핥으며 마치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깊은 신뢰를 내보였다.
개가 골프 룰과 예의를 안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린밸리 골프장 전경
첫 홀 티샷을 하고 페어웨이 쪽으로 걸어나가자 개들도 우리 일행을 졸졸 따라나섰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이 개들은 골프의 룰과 예의를 제대로 아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샷을 위해 아이언을 꺼내들고 연습 스윙을 하자 옆에 조용히 앉아 공을 칠 때까지 기다렸다. 한번은 티샷한 공이 슬라이스가 나 야자수와 숲이 무성한 러프에 떨어져 한참 찾고 있는데, 개가 먼저 발견하고 끙끙대며 꼬리를 흔들어 위치를 알려주는 게 아닌가.
또 골퍼들이 온 그린된 공을 퍼트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개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거나 움직이지 않고 서서 조용히 지켜봤다. 마치 볼이 홀컵에 빨려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특별한 교육을 받았을 리 없는 이 개들의 행동은 오랫동안 골퍼들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체득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13번 홀 페어웨이 중간에 마련된 간이 불당에서 합장으로 예를 갖추는 필자와 캐디들.
그런데 이 개들에게도 위협은 있다. 어디선가 예고 없이 날아오는 공이다. 전반 9홀을 끝내고 그늘집에 들러 쉬는데 한쪽 구석에 골퍼들이 친 공에 맞아 다리를 다친 개가 보였다.
사실 개는 골프용어와 관련이 많은 동물이다. 모양이 개다리처럼 휜 홀을 ‘도그레그 홀(dog leg hole)’이라 하고, 관리가 엉망인 코스를 ‘도그 트랙(dog track)’이라고 한다. 또 스코어가 8인 경우는 ‘도그 볼스(dog balls)’, 숲 속을 왔다갔다하는 골프를 ‘도그 골프(dog golf)’라고 한다. 이 밖에 ‘빅 도그(big dog)’은 1번 드라이버의 별칭, ‘도그 샷(dog shot)’은 본인이 생각할 때 최악의 샷, ‘도그 온(dog on)’은 공이 깃대에서 아주 동떨어진 구석에 떨어진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다. 그런데 이들 개와 관련된 용어는 공교롭게도 대부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된다.
이 골프장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는 12번 파3홀이다. 길이가 180야드로 숏 홀치고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홀인데, 그린이 각종 해저드로 둘러싸여 있다. 앞에는 벙커, 뒤쪽과 오른쪽에는 연못이 굶주린 악어처럼 입을 벌린 채 골프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골프깨나 친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이 홀에서 볼 2개를 연못에 빠뜨리면서 무려 10타라는 어이없는 스코어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 충격에 잠시나마 골프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골퍼는 이런 쓰디쓴 실패를 계기로 한 단계씩 발전한다고 자위하면서 합리화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홀이 될 것 같다.
이처럼 연못이나 호수, 실개천, 습지와 같은 워터해저드가 많은 골프장에서는 조금만 방심하면 공을 물에 빠뜨려 스코어를 망치게 된다. 따라서 현명한 대처요령과 자세가 필요하다.
먼저 실력에 비해 무리한 샷을 자제할 것. 예를 들어 그린 앞에 연못이 있을 경우 파5에서 투 온(two on) 그린을 시도하면 90% 이상이 실패한다. 두 번째는 안전을 위해 우회하는 마음가짐이다. 또박또박 안전지역을 골라 치는 골퍼가 현명한 골퍼다. 세 번째는 담대함. 물이 있다고 지레 겁을 먹으면 헤드업을 하게 되고 스윙의 리듬이 빨라진다. 마지막으로 그린의 결을 제대로 파악할 것. 기본적으로 그린의 결은 워터해저드 쪽으로 누워 있어 물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퍼트를 해야 한다.
착하고 친절한 캐디들
그린밸리 골프장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매력은 착하고 귀엽고 친절한 캐디들이다. 치앙마이는 북방계의 얼굴형에 피부가 약간 검은 미인이 많아 오래전부터 ‘북방의 장미’라는 별칭이 붙은 도시다. 지난 1966년과 1970년 세계 유니버스대회에서 이곳 출신 여성이 연거푸 미스 유니버스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이곳 여성들은 온순하고 착하다.
이 골프장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는 페어웨이 중간에 있는 불당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 골프장 오너 겸 경영자가 캐디나 골퍼들이 라운드 중에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거나 합장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이곳의 연못은 붉고 하얀 연꽃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