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3월28일 함경도 무산 자택에서 연금중일 때의 한만택씨와 2005년 12월22일 한만택씨 가족이 외교부에 보낸 첫 번째 진정서.
강 건너에는 세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씨와 함께 국경을 넘은 안내자들을 관리하는 A씨, 한씨를 90km가량 떨어진 옌지(延吉)로 데리고 갈 안내자 B씨와 운전수 C씨였다. 휴대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아 고심했지만 ‘물건’은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정해놓은 암호도 틀림없었다.
국경을 넘은 안내자들은 약속했던 돈을 받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C씨가 모는 구형 자동차는 ‘물건’을 태우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옌지의 아지트에 당도했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 한국에 있는 한씨의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아지트에서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저녁 무렵, 이들은 시내에 있는 고려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公安)들이 순식간에 한씨와 안내자들을 체포해 경찰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시내 중심에 있는 지린성 옌볜(延邊)주 공안국 국내안전보위지대, 혐의는 ‘비법월경죄(非法越境罪)’. 지난밤 헤어진 A씨마저 곧 체포되어 유치장으로 끌려왔다. 두만강을 넘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삼촌이 살아 있다”
193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한만택씨는 3남4녀를 둔 농사꾼 집안의 일 잘하는 총각이었다. 부모님과 큰형님, 큰형수 밑에서 걱정할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포성이 울리자마자 세 형제 중 두 동생이 입대해 전선으로 갔다.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6월,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치하며 숱한 희생자를 낸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형 만순씨는 사망했고 만택씨는 행방불명이 됐다. 정부는 이들을 모두 사망자로 처리해 서울 국립현충원에 위패를 만들고 만택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남은 가족은 매년 6월이면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50여 년이 흘렀다.
큰형은 세상을 떠나고 형수만이 지키고 있는 진주의 옛집으로 중국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한씨의 지인을 통해 보내온 편지는 본인임을 입증하는 이야기와 북한 무산의 현 주소, 그간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5~6년 전에도 비슷한 소식이 있었지만 4억~5억원에 달하는 국군포로 보상금을 노린 사기성 브로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먼 친척에 관한 이야기를 맞춰보며 한만택씨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형수와 조카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만택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편지를 보낸 중국의 지인과 다시 접촉한 가족들은, 12월 중순 지인을 무산에 들여보내 본인과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한씨의 탈북의사를 확인한 가족들은 주선해줄 사람을 물색했다. 국군포로 송환에 경험이 있는 남북이산가족협의회의 심구섭 대표가 안내자 섭외 등 작업에 나섰다.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획의 윤곽이 잡힌 12월22일, 한씨 가족과 심 대표는 외교부와 국방부 앞으로 첫 번째 진정서를 보낸다. ‘국군포로 한만택씨가 무산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조만간 귀환을 추진 중이니 사전에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12월24일, 중국 내 지인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확정됐다. 탈북 시간은 12월27일 밤. 한씨의 조카인 한정구씨와 그의 아내 심정옥씨는 12월29일에 옌지에 마중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