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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 大해부

나팔 분 언론, ‘오버’한 정부, 쉬쉬한 전문가들이 환상 키웠다

  • 이성주 동아일보 교육생활부 기자 stein33@donga.com

‘황우석 사태’ 大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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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허상

1980년대 한국 언론은 유전공학의 발달로 조만간 식품혁명이 도래할 것이며, 농업과 과학의 합주(合奏)로 호박만한 토마토, 일곱 가지 맛이 나는 과일이 곧 양산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1990년대 유전자 치료법이 떠올랐을 때에는 10~20년 안에 만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21세기 들어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자 무병장수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필자는 부끄럽게도 이 대열에서 나팔을 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5~10년 후면 일부 암(癌)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생명의 신비는 한 겹을 벗기면 두 겹의 수수께끼가 등장할 만큼 오묘하기만 하다. 인체는 하나의 우주(宇宙)여서 사람의 뜻대로, 노력만 하면 뚝딱뚝딱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그 점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서서히 깨닫게 됐다.

과학사에서는 1990년대 유전자 치료법이 또 하나의 선례(先例)를 남겼다. 당시 유전자 치료법은 지금의 줄기세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계적인 화두였다. 1991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첫 치료법을 발표한 이후 고장 난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다른 유전자로 대치해 질병을 고친다는 개념은 각국의 과학자들을 사로잡았다. 동물실험에 이어 임상시험도 봇물을 이뤘다.

그러나 4, 5년 만에 부작용이 속속 나타나자 당시 NIH의 헤럴드 바무스 원장과 과학자들은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우리가 오만했다.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학문적으로 현재의 줄기세포 연구는 1990년대 초 유전자 치료법보다 훨씬 더 초보적인 단계다. 그러나 ‘황우석 신드롬’이 진행되는 2005년 한해동안에는 누구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2005년 한국에서 황우석 교수의 위치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신(神)과 대통령의 중간쯤이 아니었을까. 국민의 절반이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은 욕할 수 있어도 황 교수를 비판하면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PD수첩’ 사태 이후 황 교수에게는 이전의 ‘앉은뱅이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예수’의 이미지에 ‘십자가를 진 성자(聖子)’의 이미지까지 겹쳐졌다.

그 와중에 이야기되지 않은 것,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밖에도 많다. 지금은 모두 알게 되었지만, 전문가 집단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황 교수 열풍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연수하며 만난 관련 연구소의 한국인 과학자 대부분은 황 교수 열풍에 대해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낳은 일종의 ‘해프닝’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국내 학자들의 의견은 어땠을까. 필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한 대학교수들의 의견도 대동소이했다. ‘신드롬’을 비판하면 여론의 몰매를 맞거나 시기심 또는 소영웅심에서 비롯된 돌출행동으로 보일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대부분 ‘황사 바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나서서 입을 열지 않은 이들 모두는, 이 상황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전달하지 못한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언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앞서의 모든 과학 신드롬처럼 아무런 깨달음 없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황우석 신드롬의 조연자였던 언론에 몸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리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던 모든 이들이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 또다시 침묵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희망이다.

황우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들으면 누구나 ‘줄기세포’를 떠올릴 것이다. 반면 과학자 대다수는 황 교수를 ‘줄기세포 연구의 대가(大家)’로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소수의 과학자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은 진실이다. 물론 최근의 파동 이후에도 황 교수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제 연구가이고 줄기세포 연구에 불을 지핀 주인공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황 교수의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자. 그의 이름은 1990년대 초부터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러다가 1999년 복제 소 영롱이를 탄생시키며 ‘스타 과학자’ 반열에 오른 황 교수는 2004년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복제 연구가에서 갑자기 줄기세포 연구의 대가로 불리기 시작한다. 복제와 줄기세포라는 크게 다른 분야, 거리가 꽤 있는 분야를 갑자기 건너뛴 믿을 수 없는 도약이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노벨상후원회가 만들어지고, 황 교수는 국내의 온갖 상과 연구비를 휩쓸었다. 국가 요인(要人)에 해당하는 경호가 이뤄졌을 뿐 아니라 ‘범(汎) 황우석 사단’의 다른 연구원도 경호를 받기에 이른다. 황 교수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비전문가들의 주장은 거셌지만, 황 교수의 연구가 노벨상을 받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을 해서 노벨상을 받을지, 아니면 앞으로 어떤 성과를 거두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노벨상이었다.

황 교수가 배아(胚芽) 복제와 조작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자라거나 세계 최고 수준의 팀을 이끄는 수장(首長)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다. 세계 최초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로젤린연구소에서도 황 박사의 ‘기술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줄기세포 분야에서는 검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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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동아일보 교육생활부 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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