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 이후, 잃어버린 10년
이는 우선 정부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농업·농촌·농민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갈등이다. 농촌 정책 또한 농민의 삶과 괴리가 심각하다. 정부는 농촌도 개방과 경쟁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세계무역기구(WTO)가 주창하는 신자유주의 기조를 그대로 농촌에 적용하려 하지만, 농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다. 농촌만의 특수한 성격이 있고,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정부와 사회가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농촌은 과거 경제개발 과정에서 도시(독점자본)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농민은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탈의 대상이었으며, 농업은 물가안정을 위한 경제성장의 디딤돌로 인식됐다. 그렇게 40여 년을 보낸 농촌은 이제 해체 직전에 놓였고, 농민은 경쟁력 없는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농업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따라 열위의 산업으로 폄하되고 있다. 농민 주체의 농업발전과 농촌개발을 위한 독자적 농정(農政)도 없다.
WTO 체제에서도 선진국은 다양한 형태의 보조금과 투자로 농업과 농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한 재정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대부분 후진국의 농업과 농촌은 해체될 위기에 직면했다. 이는 국가 공동체의 위기로 연결되고, 식량안보는 물론 식량주권마저 선진국에 빼앗길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한다. 농촌 해체로 인한 국토 환경의 황폐화는 또 어떤가. 결국 지속가능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농가 경제, 파탄 직전
미래가 이처럼 암담한데도 우리 사회는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것이 농민을 서글프게 한다. 사람이 떠나 농촌이 텅 비어가는데도 문제의식은 여전히 미약하다. 농촌의 인구 과소화 현상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인구 2000명 미만의 읍면이 1985년 9개, 1995년 97개였는데, 2005년엔 333개였고 2010년에는 470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인구 1000명 미만의 읍면은 1985년 2개, 1995년 10개, 2005년 46개에 불과했으나 2010년에는 109개로 늘어난다. 농촌이라는 지역 공동체가 급속도로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급속한 노령화로 농가 경영주 중 60세 이상이 60%에 이른다는 점도 큰 문제다. 농업에 종사하려는 후계자가 없다. 앞으로 누가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전혀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정부는 돈 몇푼 집어넣으면 할 것 다했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정부는 UR 이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한다. 그동안 ‘경쟁력’을 기르지 못했다는 자책이 들어 있는 표현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쌀 수매가격을 떨어뜨려 가격을 낮춰야만 가격경쟁력이 생길 텐데 수매가격을 오히려 높여온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국회를 비난한다. 국회가 농민 눈치 보느라 수매가격을 낮추지 않아 경쟁력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국회의원은 당연히 선거권자인 농민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도 정부는 모든 책임을 국회에 전가한다.
책임은 국회가 아니라 정부가 져야 한다. 정책의 실패 때문이다. 쌀값을 떨어뜨려 가격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국내 쌀 가격이 중국 쌀 가격보다 500∼600%나 높은데, 도대체 가격을 얼마나 떨어뜨려야 경쟁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도하개발어젠더(DDA) 협상 결과에 따라 400% 이상의 고율 관세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격경쟁력을 갖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얘기다. 발상부터가 잘못됐다. 생산비와 물가는 지속적으로 오를 것이 뻔한데 가격을 내리라고 하면 경쟁력 제고는커녕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10년’은 수매가격을 낮춰 쌀값을 떨어뜨리지 못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영농규모를 확대해 전업농화를 유도한답시고 쏟아부은 돈, 가격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투입한 돈 대부분이 부채로 남았고, 이것이 농가 경제를 파탄 일보 직전으로 빠뜨렸다.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