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롼링위(阮玲玉)’

낭만의 올드 상하이, 홍콩인에겐 곤혹스러운 추억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5-12-30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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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이 와이타을 따라 걸으면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가 대비된다. 초고층 현대식 건물과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러운 서구식 건축물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드라마틱하게 마주해 있다. 치파오가 잘 어울리는 장만위(張曼玉) 주연의 영화 ‘롼링위’는 1930년대 ‘동양의 파리’로 불린 상하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린 여배우 롼링위의 짧은 생애를 담고 있다. 상하이와 홍콩, 근대 중국이 낳은 두 쌍둥이 도시의 극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롼링위(阮玲玉)’

    상하이의 화려한 도시 경관은 중국의 무서운 성장 속도를 실감케 한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상하이라면 상하이의 관문은 와이탄(外灘)이다. 그래서 중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상하이에 오면 누구나 먼저 와이탄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상하이를 제대로 느끼는 길이다. 와이탄은 글자 그대로 상하이 동쪽 바깥, 즉 상하이 동쪽을 흐르는 황푸(黃浦) 강둑길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난 길이다.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쑤저우허(蘇州河)와 상하이 동쪽 끝을 흐르는 황푸강이 만나는 곳에 걸려 있는 낡고 멋진 철제 다리인 와이바이두(外白渡)교에서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1.5km 가량 이어진 길이 바로 와이탄이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면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 ‘뉴 상하이’와 ‘올드 상하이’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를 맞아 화려하게 부활하는 ‘뉴 상하이’가 있다. 푸둥(浦東) 신개발 지역으로, 높이 468m짜리 텔레비전 송신탑인 둥팡밍주 타워(東方明珠塔)와 상하이에서 가장 훌륭한 빌딩으로 손꼽히는 88층짜리 진마오 빌딩(金茂大厦)이 차례로 눈길을 끈다.

    덩샤오핑이 푸둥 지역 개발을 지시해 상하이 푸둥 신개발지 공사가 시작된 1990년 4월 이전까지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하이의 미래를 상징하는 곳이 됐다. 2010년에 이곳에서 상하이엑스포가 열리고, 확장공사를 마친 신공항과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만도 이 푸둥 지역에서 만날 수 있다. 무서운 속도로 비상하는 중국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화려한 신식 건물이 늘어선 푸둥 뉴 상하이의 맞은편, 그러니까 와이탄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올드 상하이가 있다. 1872년에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진 옛날 영국 총영사관(현 상하이시 제2청사) 건물을 시작으로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멋진 서구식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1937년에 지어진 중국은행, 1929년에 세워진 허핑호텔(和平飯店), 1927년에 세워진 상하이 세관, 1923년에 건축된 홍콩상하이은행(HSBC) 상하이 지점 건물 등 18개 건물이 경쟁하듯 줄지어 서 있다.

    ‘억만불짜리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이 서양식 옛 건축물의 행렬은 1920∼30년대 상하이의 전성시대, 올드 상하이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와이탄의 절정은 야경이다. 저녁이 되면 이들 건물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는데 오색의 조명을 받은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이 장관을 이룬다.



    와이탄은 북쪽 영국 영사관 건물에서부터 시작해 남쪽 끝 옛 프랑스 영사관 건물까지 이어진다.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차지했던 조계지에서 시작해 프랑스 조계지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근대 초기에 탄생해 상하이의 상징이 된 ‘억만불짜리 스카이라인’의 화려함은 중국을 침략한 뒤 이 지역을 차지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그들은 1840년에 시작된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1845년부터 영국, 미국, 프랑스 순서로 상하이에 조계지를 설정, 치외법권 지역을 선포하고 상하이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조계지역에 독자적인 행정 기관을 설립하고, 자신들의 법률에 따라 그 지역을 관할했다.

    ‘억만불짜리 스카이라인’

    처음 조계가 성립되던 때 중국인은 조계 지역에 출입할 수도 없었다. 1868년 영국 영사관 앞에 생긴 공원(지금의 황푸 공원) 입구에 ‘중국인과 개는 들어갈 수 없다(華人與狗不准入內)’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출입금지는 1928년까지 계속됐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중국은 서구와 일본의 침략에 패배하면서 치욕과 굴욕의 시기를 보냈다. 와이탄을 걷다 보면 중국인들이 그 치욕과 굴욕의 역사를 딛고서 이제 다시금 비상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비상하는 중국의 선두에 상하이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엔 올드 상하이 열풍이 일고 있다. 당시를 재현한 거리와 식당, 재즈 바, 커피숍, 댄스홀이 대유행이다. 1920∼30년대 상하이를 소재로 한 사진, 책, 영화, 드라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롼링위(阮玲玉)’

    193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롼링위의 불꽃 같은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영화 ‘롼링위’.

    상하이는 1910년대 말부터 전성시대를 맞아 1930년대에 절정에 이른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청나라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등 5개 항을 개항하기로 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개항한 5개 도시 가운데 상하이는 창강(長江)과 바다가 만나는 교통 요충지인데다 풍부한 생산력을 갖춘 강남을 배후 지역으로 지니고 있어 서구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불과 30∼40년 만에 상하이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도시, ‘동양의 파리’가 됐다.

    당시 상하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적인 도시였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구 근대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상하이 거리에는 한편으로는 선진적이고 세련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고 세기말적인, 다소 이중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그것이 조숙한 근대 도시이자 식민지 도시인 상하이의 숙명이었고, 그 숙명이 상하이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올드 상하이는 바로 그런 매력을 지닌 곳이다. 최고급 음악회와 초대형 신식 영화관, 경마장과 댄스홀, 아편굴, 기생집과 매춘굴, 서커스 등이 상하이의 상징이었다.

    21세기 세계 제1의 도시

    그런 동양의 파리가 침체의 길로 접어든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특히 1941년 영미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가 일본군에 점령당한 뒤부터다. 그러다 일본이 패전하고 1949년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올드 상하이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린다. 요즘 중국에서 올드 상하이 열풍이 부는 것은 그렇게 막을 내린 상하이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이 채택된 이후 상하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다시금 전성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전후하여 상하이는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을 것이다. 19세기에 파리가 세계 제1의 도시였고, 20세기에 뉴욕이 그러했다면, 21세기에는 상하이가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상하이가 뉴 상하이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관진펑(關錦鵬) 감독의 영화 ‘롼링위(阮玲玉·국내 개봉작명 ‘완령옥’, 1991)’는 올드 상하이 전성시대에 상하이 영화계의 최고 여배우이던 롼링위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롼링위는 16세에 영화계에 데뷔해 상하이 최고의 여배우가 된 뒤 올드 상하이의 절정기인 1935년에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가 다루는 롼링위의 마지막 6년은 상하이의 절정기이기도 한데, 영화는 그런 절정기의 상하이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여실하게 재현한다. 이 영화가 중국인은 물론 해외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올드 상하이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때문이다. 영화는 상하이 영화계를 중심으로 당시 영화인의 사교 문화와 댄스 홀, 옛 노래, 신여성이 즐겨 입던 치파오(旗袍)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롼링위는 어머니가 부잣집 하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주인의 도움을 받아 여학교를 다닌 신여성이었다. 그러던 중 주인집 아들 장다민(張達民)이 그를 마음에 두게 되고, 이를 안 주인은 롼링위 모녀를 쫓아낸다. 어머니와 함께 쫓겨난 롼링위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해 순식간에 최고의 배우가 된다.

    그 사이 롼링위는 주인집 아들과 동거를 했다. 주인집 아들은 갑자기 죽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고 롼링위에게 돈을 요구했다. 결국 1933년 두 사람은 동거를 끝내고 각자의 길을 간다. 그로부터 4개월 뒤, 롼링위는 광둥성 출신의 사업가와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옛 주인집 아들이 롼링위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계속 돈을 뜯어갔고, 1935년엔 마침내 롼링위와 새 애인을 간통죄로 법원에 고소했다. 상하이 최고의 여배우가 간통죄로 고소당하자 신문은 연일 그 뒷이야기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 보도했다. 한동안 롼링위 집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언론과 사람들의 입방아에 지친 롼링위는 결국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다. 그가 죽은 날은 1935년 3월8일, 바로 세계 여성의 날이다. 롼링위는 이날 여고 교장으로 있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여성의 날 기념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유서에서(영화에서는 자막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다민 때문에 죽는다.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고, 원한으로 덕에 보답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나쁘다고만 한다. 아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게는 오직 죽음뿐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의 말이 참 무섭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사람들의 말과 소문이 두려울 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우에게 언론과 대중은 물과 같은 존재다. 배우라는 배를 띄워주는 것도 그들이지만 전복시키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롼링위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은 언론과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만큼 상하이의 근대 문화가 무르익었음을 짐작케 한다.

    신여성을 보는 이중의 시선

    근대 초기 중국에서는 롼링위처럼 신여성이 자살을 택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신식 교육을 받은 딸을 부모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자유연애를 실현할 수 없어서였다. 사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거리에 나왔다는 것이다. 규방에 갇혀 지내던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기생이 독점하던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을 규방에서 거리로 끌어낸 일등 공신은 근대 들어 전국적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여성들이 거리로, 학교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중국에서도 그러했다. 근대의 발명품인 자유연애는 그렇게 거리로, 학교로 나온 신여성이 있었기에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리로 나왔다고 해서 신여성이 진정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거리로, 학교로 나온 신여성에게는 늘 이중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새로운 시대의 리더이자 신지식을 갖춘 계몽자의 역할, 과거 여성이 맡지 않은 새로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서양물이 들어서 자유연애를 탐닉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며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늘 따라다녔다. 물론 그런 시선으로 신여성을 바라본 이는 남성이었다.

    신여성에게 근대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해방 공간인 동시에 또 다른 감옥이었다. 롼링위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징적이다. 롼링위는 죽기 전 영화계 동료들과 마지막 파티를 연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그는 동료 영화인들에게 마지막 포옹과 키스를 하며 25세의 짧은 생을 정리한다. 그러면서 여자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3·8 여성의 날을 축하하러 모였는데 무엇을 축하하지요? 여성들이 5000년에 걸친 남성의 역사 위에서 일어선 걸 축하합시다!”

    평범한 여성이던 그는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간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성의 날을 축하하고 죽는다.

    상하이에서 와이탄을 보는 것이 첫 번째 코스라면, 그 다음 코스는 난징루(南京路)다. 상하이의 바깥쪽을 보았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상하이의 속내를 들여다볼 차례다. 난징루는 상하이의 명동이다. 유명 백화점이 즐비한 거리다. 상하이의 거리 이름은 중국 각지의 지명을 따서 지어졌다. 동서로 난 길은 중국 도시명을, 남북으로 난 길은 중국 각 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62년에 영국과 미국이 공동 조계지역을 선포한 뒤 가로 정비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사라진 올드 상하이의 정취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가를 난징루라고 지은 것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뒤 맺은 조약이 난징조약인 데서 연유했다. 난징조약에서 더없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원래 영사관 길이던 것을 베이징루라고 바꾼 것을 보면 서양 세력이 상하이를 시작으로 언젠가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중국 각 성과 도시의 이름이 붙은 상하이 거리에는 그렇게 식민지 상하이의 역사가 스며 있다.

    난징루는 와이탄 쪽에 있는 난징둥루(南京東路)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길 초입에 허핑호텔이 있다. 1929년에 완공된 이 호텔은 상하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 가운데 하나다. 하루 숙박비가 30만원을 호가한다. 과거에 상하이에 온 유명 인사들, 예컨대 찰리 채플린 등이 이곳에 묵었다. 고풍스러운 이 호텔의 매력은 1층에 있는 ‘올드 재즈 바’다.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바 가운데 하나인데, 연주자들이 모두 70세가 넘은 사람들로 주로 오래된 곡을 연주한다. 올드 상하이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난징루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길을 걷기가 한결 편해졌다. 더구나 차량 통행이 금지된 보행자 전용도로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런 거리 정비가 오히려 난징루에서만 느낄 수 있던 독특한 정취를 앗아가버렸다. 내게는 지금 난징루보다 예전 난징루가 훨씬 좋았다. 인파의 물결로 넘치지만 전차는 없다. 찻소리, 자전거 경음도 없다.

    빵빵거리는 찻소리, 찌르릉대는 자전거 소리, 사람 소리와 사람과 전차, 자전거가 뒤엉킨 그 거리, 뒤엉킨 소리들의 거리가 난징루였다. 예전에 난징루는 그랬다. 이 거리에 서면 1920∼30년대 상하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난징루만의 독특한 아우라(aura)가 느껴졌다. 저만치에 조국을 잃고 이국에서 방황하는 조선 지식인이 걷고 있을 것 같고, 저 건물 안에 아편 담뱃대를 빠는 흐릿한 눈망울의 젊은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불현듯 거침없이 권총을 쏘아대는 겁 없는 상하이 갱들이 달려 나올 것 같았다. 조숙한 모더니티의 향연이 난만하게 펼쳐지던 상하이의 옛 모습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런데 거리가 말끔하게 정비된 뒤로 옛 상하이의 정취가 사라져버렸다.

    신톈디, 상하이 문화의 상징

    ‘롼링위(阮玲玉)’

    ‘롼링위’에서 주연을 맡은 장만위(張曼玉)는 치파오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난징루를 따라 옛 경마장이 있던 런민공원까지 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관할하던 조계지역을 벗어나 옛 프랑스 조계지역으로 접어든다. 프랑스 조계 서쪽 끝 부분인 마당루(馬當路)에 우리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대개 임시정부 청사를 본 뒤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만, 임시정부 청사에서 작은 길 하나만 건너면 외국인들과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상하이의 새로운 명소가 있다. 신톈디(新天地)가 바로 그곳이다.

    중국 공산당 창당 대회가 열렸던 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일대는 상하이 근대 주택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다. 이 지역을 홍콩 자본이 1999년부터 우리 돈으로 약 200억원을 투자해 재개발했다. 총 설계는 미국 디자이너 벤저민 우드가 했다. 그가 이 지역을 설계할 때 세운 기본 컨셉트는 옛것을 새롭게 정비하면서도 여전히 옛것다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과거와 현재, 중국의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절묘하게 융합된 새로운 천지가 탄생하였고, 상하이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스타벅스 커피숍과 최고급 브로이 하우스와 가장 전통적인 중국 찻집들이 절묘하게 섞여서 독특한 도시 경관을 이룬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쪽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 전통 악기인 얼후가 연주된다. 난징루와 와이탄이 20세기 상하이, 올드 상하이의 상징이라면 신톈디는 푸둥과 더불어 21세기 뉴 상하이를 보여준다. 푸둥은 21세기 비상하는 상하이의 경제력을 상징하고, 신톈디는 21세기 상하이의 문화적 힘을 상징한다.

    관광차 상하이를 찾은 한국인들은 그동안 알고 있던 중국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놀라곤 한다. 그중에는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뿌듯해했는데 상하이를 보고 나면 중국에 곧 추월당할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초고속으로 발전하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이 눈앞에 현실로 서 있는 것 같아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느끼는 ‘상하이 공포’라고나 할까.

    한국인이 상하이에서 느끼는 공포는 주로 푸둥으로 상징되는 상하이의 경제 발전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하이의 발전은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적 힘과 문화적 힘이 한데 결합하여 상하이 발전을 쌍끌이하고 있다. 상하이가 지닌 문화적 힘은 상하이의 경제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토대다. 상하이의 경제만 보고 상하이의 문화를 보지 못하면 상하이를 겉만 보는 셈이다.

    상하이는 원래 혼성의 도시, 잡종의 도시다. 여기에 상하이의 문화적 특징이 들어 있다. 상하이는 중국 각지에서 이주해 온 외지인들로 채워진 도시다. 그래서 상하이 말에는 적어도 네 가지 계통 이상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다. 그런 타지 출신 이주민의 공간에 외국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인이 들어왔고, 이어 러시아 사람이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피해 도망해왔다. 그 뒤에는 일본인이 왔고, 최근에는 한국인이 왔다. 상하이는 그런 도시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서로 뒤섞이고, 그 뒤섞임 자체가 상하이의 개성이 됐다. 중국 여러 지방의 특징과 서구적인 것, 일본적인 것, 그리고 최근 들어 강력하게 유포되고 있는 한국적인 것이 한데 뒤섞여 특유의 혼성 문화 공간, 잡종 문화 공간이 됐다.

    그런 까닭에 상하이는 태생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개방적이고 너그럽다. 상하이 사람들은 기이한 것, 색다른 것을 좋아한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도 배척하지 않고 관대하게 포용한다. 다양한 문화를 뒤섞어 그 뒤섞임 자체를 자신의 문화적 개성으로 만드는 곳이 바로 상하이다. 여러 가지 문화가 뒤섞이는 문화의 혼종성이 결국은 상하이 문화의 강한 생산력이 되고, 상하이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고, 상하이의 힘이 된다.

    홍콩과 상하이

    경기도 고양시에 착공한 차이나타운은 상하이 신톈디를 벤치마킹해 독특한 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배워올 것은 단순한 거리 치장이 아니다. 거리 형상만 따오는 것은 겉포장만 베끼는 것이다. 상하이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개방성과 혼종성을 배워오는 것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거리를 조성하는 일이다.

    영화 ‘롼링위’는 매우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를 찍은 1991년 홍콩과 1930년대 상하이가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장만위가 연기하는 상하이 배우 롼링위와 홍콩 배우 장만위가 교차된다. 영화를 촬영하다 스태프들이 당시 상하이에 대해서, 롼링위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고, 주연 배우인 장만위가 자신이 연기하는 롼링위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는 모습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졌다. 롼링위의 마지막 생애와 그것을 촬영한 과정이 함께 영화가 된 것이다.

    ‘롼링위(阮玲玉)’

    롼링위는 1920~30년대 신식 교육을 받고, 자유연애를 갈망한 신여성의 전형이었다.

    이런 독특한 구조 속에서 홍콩과 상하이가 교차되고, 영화는 1930년대 올드 상하이를 다룬 영화인 동시에 1997년 대륙으로 반환될 운명에 처한 1990년대 초 홍콩을 다룬 영화가 된다. 사실, 상하이와 홍콩은 중국 근대에 태어난 쌍둥이 도시다. 상하이와 홍콩은 도시 탄생 과정이나 도시의 성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런 쌍둥이인 두 도시가 시소를 타듯이 운명의 부침을 주고받았다. 홍콩이 국제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상하이가 전성시대를 마감하고 침체되면서부터다. 중일전쟁으로 상하이가 일본에 점령되고, 이어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상하이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러자 상하이에 몰려 있던 외국 자본과 중국 자본, 외국인과 공산체제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많은 중국인이 홍콩으로 이동한다. 홍콩이 그동안 영광을 누린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상하이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상하이가 홍콩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시소가 반대쪽으로 기울고 두 도시의 운명이 달라졌다.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비상하면서, 올드 상하이의 화려한 영광을 되찾고 있다. 상하이는 갈수록 홍콩을 닮아간다. 거리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이제 홍콩이 상하이로 옮겨오면서 상하이가 홍콩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홍콩이 다시 대륙으로 귀속되면서 홍콩이 기울고, 반대로 상하이가 점점 부상하는 것이다. 홍콩과 상하이는 그렇게 운명이 상호 교차되는 쌍둥이다.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장만위는 진짜 롼링위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감독의 컷 소리와 동시에 1990년대 홍콩 배우 장만위로 돌아와 1930년대 상하이 배우 롼링위와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자신 같았으면 롼링위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감독은 사실 한 작품에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배우 롼링위의 생애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화를 찍으며 1930년대 상하이와 롼링위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홍콩 사람들 이야기다. 이 두 이야기를 하나의 영화에 담고 있다.

    대륙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홍콩인은 일종의 세기말적 비관과 불안에 젖어든다. 그럴수록 화려하던 홍콩의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진다. 그 향수가 영화에서는 롼링위가 살던 1930년대 올드 상하이에 대한 향수로 투영된다. 영화 속 1930년대 올드 상하이 시절에 대한 향수는 기실 화려했던 홍콩의 과거에 대한 향수다. 문제는 그저 향수일 뿐 이제 홍콩은 중국 대륙으로 복귀해 과거 화려한 시대를 다시는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로는 그 시절을 재현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재현할 수 없다.

    홍콩 감독 관진펑은 1930년대 절정기의 상하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러한 곤혹을 독특한 구성을 통해 풀어 나갔다. 이 영화에는 상하이의 화려한 시절에 무한한 향수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어쩔 수 없이 그것과 거리두기를 시도해야 하는 1990년대 홍콩인의 곤혹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배우 롼링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상하이와 홍콩이라는 근대 중국이 낳은 쌍둥이의 운명의 역전(逆轉)을 다룬 영화이기도 한다.

    치파오의 부활

    영화 ‘롼링위’에서 장만위는 주로 치파오를 입고 나온다. 중국 여배우 중 치파오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장만위다. 장만위는 ‘롼링위’에서 치파오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 데 이어, 홍콩 영화 ‘화양연화’에서 50여 벌의 다양하고 멋진 치파오 패션을 보여준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에는 치파오가 대유행하고 있다. 이런 대유행에는 올드 상하이 열풍과 장만위의 영향이 크다. 하얼빈에는 장만위가 입은 갖가지 치파오를 맞춤 판매하는 옷가게도 등장했다.

    치파오는 올드 상하이의 상징, 특히 신여성의 상징이다. 원래 청나라 만주족 여인이 입던 옷이 상하이 모던 걸의 첨단 패션으로 거듭난 것이다. 원래의 치파오는 치마 안에 바지를 입었고, 통도 넉넉하고 소매도 길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미를 한껏 드러내는 차원으로, 모던 스타일로 바뀌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타이트해치고, 치마 길이도 짧아져 여성의 곡선미를 드러낸다. 소매도 긴 것에서부터 반팔에 민소매까지 다양해졌다. 걷거나 말을 타는 데 편하도록 치마 옆을 튼 것은 여성의 섹시함을 강조하는 은근한 노출 장치가 됐다. 치파오가 이처럼 개조된 것은 무엇보다 여성이 신체적 매력을 과시하고, 노출 욕구를 표출하기에 더없이 좋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 스타일에서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하다는 점,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재료를 구해 옷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상하이에 치파오가 대유행한 까닭이다.

    영화에서 롼링위는 외출할 때나 파티에 참여할 때 늘 치파오를 입는다. 치파오는 당시 상하이의 사교 복장이자 신여성의 패션이었다. 1929년부터는 국민당 정부 여자 공무원의 유니폼도 치파오였다. 그 시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미스’로 불렸다. 그런데 치파오는 공산 정권이 수립된 이후 사라졌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인민복을 입었다. 남녀 구분 없이 서로 ‘동지’라 칭했다. 개혁개방 이후 여성이 다시 자기 성을 찾기 시작한 뒤에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샤오졔(小姐)’가 등장했다. 치파오도 서서히 부활했지만 1980년대만 해도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입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특히 2000년대 들어서 치파오가 대유행하면서 고급 여성 패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요즘 상하이 소비를 주도하는 부류는 젊은 화이트칼라 계층, 그중에서 화이트칼라 미인이란 뜻으로 ‘바이링리런(白領麗人)’이라 하는 고소득층 커리어 우먼이다. 이들은 독신을 즐기는 고소득의 화려한 싱글족으로 상하이 소비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한 달 수입을 모조리 소비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웨광쭈(月光族)’가 흔하다. 또한 생활의 질을 중시하고, 고급 브랜드 의류와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고, 교육 수준이 높다. 이들 여성의 월수입은 5000위안(70만원)부터 15000위안(210만원)선이다.

    롼링위가 올드 상하이의 신여성이었다면 최근 상하이에 출현하는 화이트칼라 미인들은 뉴 상하이 시대의 신여성이다. 이들 신여성이 대규모로 출현하는 가운데 올드 상하이 신여성을 상징하는 치파오가 여성 패션으로 부활하고 있다. 경제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올드 상하이 시대가 뉴 상하이 시대와 결합하면서 상하이가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치파오의 부활은 그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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