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 참살 사건을 보도한 ‘중앙’ 1934년 3월호 기사.당시 조선 전체 여성취업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하녀들의 삶을 보여주는 ‘신동아’ 1931년 12월호 삽화.
그날 따라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를 유난히 살갑게 대했다. 낮에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마리아를 데리고 사진관을 찾았고, 저녁에는 재단사를 집으로 불러 마리아가 고향 갈 때 입을 옷을 맞춰줬다. 밤 9시경 마리아가 안방 이부자리를 보고 안녕히 주무시라며 인사할 때는 “피로할 테니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좋다”는 말까지 건넸다.
마리아가 복도 맞은편 하녀방으로 건너간 후, 다카하시 부인은 무슨 영문인지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원으로 산보를 다녀왔다.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경 잠자리에 들었고, 마리아의 방 전깃불은 11시까지 켜져 있었다. 낮에 수박을 많이 먹은 탓으로 다카하시 부인은 새벽녘 두 차례 화장실에 다녀왔다.
8월1일 아침, 다카하시 부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신문을 보았다. 그날만큼은 늘 마리아와 같이 하던 아침운동도 혼자 했고, 아침밥도 손수 챙겨 먹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지 않는 마리아를 깨우려고 복도 맞은편 마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에는 생전에 몸에다 대보지도 못하였던 비단 허리띠가 힘차게 졸려 매었으며, 잔인하게 찔린 음부(陰部)의 자상(刺傷)에는 선혈이 흘러서 원한에 사무친 비린 냄새를 뿜고 있었다. (‘그로 100% 부산 마리아사건 공판기’, ‘중앙’ 1934년 3월호)
다카하시 부인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인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외출복 차림으로 태연히 복도청소를 하고 있었다. 부검결과 범인은 마리아를 목졸라 살해한 후 사체에 잔인하게 자상을 입힌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목에 감긴 비단 허리띠는 다카하시 부인의 것이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
한여름 밤 일본 관리의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하녀 마리아는 변흥례라는 조선 여인이었다. 변흥례는 1912년 천안군 성환면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빈한한 탓으로 부모 사랑 한번 제대로 못 받고 자랐다.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열 살 때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열일곱 되던 해에는 천안을 떠나 서울로 가서 일본인 집의 하녀가 됐다. 일본인 주인은 조선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다 하여 변흥례를 마리아라 불렀다. 한 해 두 해 지나 마리아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됐다. 그가 19세 되던 해 주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자, 주인은 착하고 일 잘하는 마리아를 친구에게 소개했다.
마리아가 옮겨간 곳은 총독부 철도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의 용산 철도국 관사. 아이도 없이 주인과 안주인 둘만 사는 단출한 가정이었다. 이 집에서도 마리아는 성심성의껏 일했다. 1931년 봄 다카하시가 부산 철도운수사무소장으로 영전하자 마리아도 부산으로 함께 갔다. 마리아는 매월 15원의 월급을 모두 부모에게 보내는 효녀였다.
마리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명랑하고 육체가 풍만하며 특이하게 성적(性的)으로 매력을 끄는 묘한 여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었으나 애교가 흘러서 누구나 좋아했다. 통통한 육체와 몸맵시는 간드러지지는 못하였으나 20세의 젊음과 탄력이 있어서, 장사치와 철도관계자 등 뭇 남자들의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출가하여 살림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로 남편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서 낯선 부산까지 와 가지고 다카하시의 집에서 하녀노릇을 하다가 그 같은 참혹한 일을 당한 것이다. (‘마리아 참살 사건, 진범이 잡히기까지’, ‘별건곤’ 1933년 5월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일본말을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했고, 머리도 다른 하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민했다. 주인의 표정만 보아도 맥주가 먹고 싶은지 청주가 먹고 싶은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출근길 마리아가 골라주는 넥타이며 단장(短杖)은 언제나 다카하시의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