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난자당한 조선인 하녀, 싸늘히 웃음짓는 일본 여주인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1-13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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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궂은비 내리는 밤, 일본인 고위관리 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참혹하게 살해된 사람은 이 집의 조선인 하녀. 미심쩍은 행동으로 여주인이 일찌감치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증거 불충분. 경찰서에 날아든 투서는 사라진 흉기의 위치와 살해 수법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법 현실을 폭로한 엽기 살인사건의 전모를 들여다본다.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마리아 참살 사건을 보도한 ‘중앙’ 1934년 3월호 기사.당시 조선 전체 여성취업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하녀들의 삶을 보여주는 ‘신동아’ 1931년 12월호 삽화.

    1931년 7월31일 밤, 부산 초량정(草梁町) 철도국 관사 15호 다카하시(大橋)의 집에서 두 여인이 잠자리에 들었다. 집주인인 철도국 운수사무소장 다카하시 마사키(大橋正己)는 사흘 전 일주일 예정으로 진주 방면으로 출장을 떠났다. 집에는 갓 스물을 넘긴 하녀 마리아와 36세의 안주인 다카하시 히사코(大橋久子) 둘만 남았다.

    그날 따라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를 유난히 살갑게 대했다. 낮에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마리아를 데리고 사진관을 찾았고, 저녁에는 재단사를 집으로 불러 마리아가 고향 갈 때 입을 옷을 맞춰줬다. 밤 9시경 마리아가 안방 이부자리를 보고 안녕히 주무시라며 인사할 때는 “피로할 테니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좋다”는 말까지 건넸다.

    마리아가 복도 맞은편 하녀방으로 건너간 후, 다카하시 부인은 무슨 영문인지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원으로 산보를 다녀왔다.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경 잠자리에 들었고, 마리아의 방 전깃불은 11시까지 켜져 있었다. 낮에 수박을 많이 먹은 탓으로 다카하시 부인은 새벽녘 두 차례 화장실에 다녀왔다.

    8월1일 아침, 다카하시 부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신문을 보았다. 그날만큼은 늘 마리아와 같이 하던 아침운동도 혼자 했고, 아침밥도 손수 챙겨 먹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지 않는 마리아를 깨우려고 복도 맞은편 마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에는 생전에 몸에다 대보지도 못하였던 비단 허리띠가 힘차게 졸려 매었으며, 잔인하게 찔린 음부(陰部)의 자상(刺傷)에는 선혈이 흘러서 원한에 사무친 비린 냄새를 뿜고 있었다. (‘그로 100% 부산 마리아사건 공판기’, ‘중앙’ 1934년 3월호)



    다카하시 부인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인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외출복 차림으로 태연히 복도청소를 하고 있었다. 부검결과 범인은 마리아를 목졸라 살해한 후 사체에 잔인하게 자상을 입힌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목에 감긴 비단 허리띠는 다카하시 부인의 것이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

    한여름 밤 일본 관리의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하녀 마리아는 변흥례라는 조선 여인이었다. 변흥례는 1912년 천안군 성환면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빈한한 탓으로 부모 사랑 한번 제대로 못 받고 자랐다.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열 살 때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열일곱 되던 해에는 천안을 떠나 서울로 가서 일본인 집의 하녀가 됐다. 일본인 주인은 조선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다 하여 변흥례를 마리아라 불렀다. 한 해 두 해 지나 마리아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됐다. 그가 19세 되던 해 주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자, 주인은 착하고 일 잘하는 마리아를 친구에게 소개했다.

    마리아가 옮겨간 곳은 총독부 철도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의 용산 철도국 관사. 아이도 없이 주인과 안주인 둘만 사는 단출한 가정이었다. 이 집에서도 마리아는 성심성의껏 일했다. 1931년 봄 다카하시가 부산 철도운수사무소장으로 영전하자 마리아도 부산으로 함께 갔다. 마리아는 매월 15원의 월급을 모두 부모에게 보내는 효녀였다.

    마리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명랑하고 육체가 풍만하며 특이하게 성적(性的)으로 매력을 끄는 묘한 여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었으나 애교가 흘러서 누구나 좋아했다. 통통한 육체와 몸맵시는 간드러지지는 못하였으나 20세의 젊음과 탄력이 있어서, 장사치와 철도관계자 등 뭇 남자들의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출가하여 살림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로 남편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서 낯선 부산까지 와 가지고 다카하시의 집에서 하녀노릇을 하다가 그 같은 참혹한 일을 당한 것이다. (‘마리아 참살 사건, 진범이 잡히기까지’, ‘별건곤’ 1933년 5월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일본말을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했고, 머리도 다른 하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민했다. 주인의 표정만 보아도 맥주가 먹고 싶은지 청주가 먹고 싶은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출근길 마리아가 골라주는 넥타이며 단장(短杖)은 언제나 다카하시의 마음에 들었다.

    마리아는 몸무게가 60kg이나 됐고 보통 남자 이상으로 힘이 셌다. 40kg 되는 물건을 들고 2~3㎞는 예사로 오갔다. 그런 마리아 변흥례가 어느 날 아침 혈흔이 낭자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다카하시 부인은 하녀가 살해당하는 줄도 모르고 바로 옆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마리아를 죽인 것일까. ‘힘센’ 마리아를 옆방에 있는 사람도 모르게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기괴한 투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부산경찰서 형사들은 밤낮없이 분주했다. 그러나 단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범죄장소가 철도국 관사이고 집주인이 고등관인지라, 제아무리 서슬 퍼런 경찰도 함부로 수사할 수는 없었다.

    관사 안팎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내는 2층 유리창이 깨진 것 외에는 살인사건의 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정돈돼 있었다. 비 오는 날이라 땅이 질었음에도 마당과 뒤뜰에서 수상쩍은 발자국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조사 결과를 놓고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외부에서 침입한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을 7대3 정도로 압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내부인의 범행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았다. 내부인은 오직 일본 고등관의 부인 다카하시 히사코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마리아를 처참하게 살해했을 뿐 집안 물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단순 절도범의 우발적 범행이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가능한 추리는 세 가지였다.

    1. 어떤 남자가 연애관계를 맺으려다가 마리아가 그에 순응치 않으니 죽였다.

    2. 집주인 다카하시씨가 마리아의 교태에 빠져 서로 사랑을 하게 되니 그 꼴을 보다 못한 다카하시 부인이 질투심이 폭발하여 마리아를 죽였다.

    3. 다카하시 부인이 다른 남자와 연애관계를 맺고 지내오던 차 하녀 마리아에게 들키고 말았는데, 그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다카하시 부인과 정부가 공모하여 마리아를 죽였다.

    (‘마리아 참살 사건, 진범이 잡히기까지’, ‘별건곤’ 1933년 5월호)

    경찰은 마리아의 목을 조른 비단 허리띠가 다카하시 부인의 물건이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시간이 지나도록 유력한 증거물을 범행현장에 놓아둘 리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다카하시 부인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음부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은 숨기고 목을 조른 허리띠는 남겨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비단 허리띠는 다카하시 부인이 범행 이후 실수로 남겨둔 것일까, 아니면 범인이 다카하시 부인을 모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둔 것일까.

    경찰이 발견한 유일한 물증은 마리아 침실 전구에 찍혀 있는 지문이었다. 부산에는 지문감식 장비가 없어 전구를 경기도 경찰부로 보냈다. 그러나 지문이 희미해 감식이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그렇듯 의미 없이 사흘의 시간이 흘러간 8월3일, 부산경찰서 서장 앞으로 괴(怪)투서가 날아들었다. 투서의 내용은 장난편지라고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나는 절도전과 2범입니다. 범인은 집안 사람입니다. 나는 31일 밤 오전 3시경 철도국 관사 부근을 방황하던 중 돌연히 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그곳에 가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전깃불 밑에 30세 가량 되는 여자가 사정(射精)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곁에는 20세 되는 여자가 발가벗고 누워있었습니다. 중년여자는 정액을 그릇에다 받아두고 한참 생각하다가 벽장을 열고 칼을 꺼내 누워있는 여자의 음부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곁에 두었던 정액을 부었습니다. “이년! 이 입으로…” 하고 입을 물어뜯고 “이년! 이 젖통으로…” 하고 젖통을 물어뜯은 이후, 발로 죽은 여자의 머리를 두 번 차고 배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유히 수도에 가서 피 묻은 칼을 씻었습니다. 유리창을 깨고 창살 한 개를 뽑아 가지고 문을 나서 철도병원 앞 공원 풀밭 속에다 파묻었으니 찾아보십시오.부산경찰서 서장 친전 목격자로부터(‘동아일보’ 1931년 9월16일자)

    가장 놀랄 만한 대목은 혹시나 해서 경찰이 철도병원 앞 공원 풀밭을 조사해보니 실제로 피 묻은 수건과 창살 등이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입술과 가슴을 물어뜯었다는 내용도 부검결과와 일치했다. 부검 당시 마리아의 입술 전체에는 흰 솜 같은 거품이 덮여 있었다.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는 입술에 찍힌 이빨자국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가슴에 난 이빨자국은 너무 희미해서 여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투서가 날아올 때까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투서자가 마리아의 살해과정을 직접 목격했거나 혹은 투서자 자신이 범인임이 분명했다.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마리아가 죽은 방과 용의자 이노우에 슈이치로. 동아일보 1933년 11월10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열흘 후 “마리아 살해사건의 범인은 나다”라고 쓴 두 번째 투서가 날아들었다. 첫 번째 투서와 필적이 동일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부산경찰서에는 “분투를 기원한다”, “그와 같은 태도는 또 다른 살인사건을 발생케 한다”, “어찌하여 다카하시 부인을 구속하지 않는가! 불공평하다” 같은 투서가 빗발쳤다.

    투서의 내용은 다카하시 부인이 범인임을 시사했지만, 경찰은 투서자가 범인일 것으로 확신하고 투서자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사건 발생 40여 일 후 철도국 관사 인근에 사는 절도전과 2범인 일본인 야마구치를 투서자로 검거했다. 경찰은 언론에 살해범을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며칠 후 야마구치는 투서자와 필적이 비슷할 뿐인 ‘선량한’ 전과자로 밝혀졌다.

    다카하시 부인 체포되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8월29일 새벽 1시, 모토하시(元橋) 검사는 수십명의 경찰을 자동차에 태워 다카하시의 집으로 향했다. 경찰은 철도국 관사를 포위하고 앞뒤로 경계선을 설정한 후 뒷문으로 급습해 다카하시 히사코를 검거했다.

    사건 전후 다카하시 부인의 행동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웃의 증언과 부검 결과에 의하면 마리아의 사망 시각은 7월31일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경이었다. 마리아의 비명은 이웃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마리아의 시신 머리맡에는 오줌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 마리아가 몹시 저항하고 뒤척였음을 의미했다. 10시경 잠자리에 들었고 자는 동안 두 차례 화장실까지 다녀온 다카하시 부인이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진술은 믿기 어려웠다.

    다카하시 부인은 남편이 출장 간 이후 줄곧 응접실에서 잤는데, 사건 당일에는 마리아의 옆방에서 잤다. 평소에는 마리아가 늦게 일어나면 몹시 꾸중했지만 사건 당일에는 늦게 일어나도 좋다고 했다. 다카하시 부인이 마리아를 그처럼 너그럽게 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8월1일,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다카하시 부인은 예쁘게 화장하고 한가히 복도청소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수사를 나온 경찰에게 사건을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카하시 부인은 한편으로는 이처럼 냉담하게 반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초조한 듯 보였다.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지도 않았는데 신문에 났다면서 고향에 있는 70세 노모에게 전보를 쳐서 와달라고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녀가 죽었다고 일본에 있는 노모를 불러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카하시 부인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일례를 든다면 31일 마리아가 빨래를 하였다고 하였으나 그날은 비가 와서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검사에게 빨래한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법정에서는 검사가 검증하러 오기 전에 전부 걷어치웠다고 했다. 또한 31일에 두 차례나 목욕을 했다고 말했으나 8월1일 검사가 검증을 할 때에는 목욕통에 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당일 아침 부인은 쓰레기를 청소하는 인부 소리에 잠을 깨었다고 했지만, 부산부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날은 초량 방면에는 쓰레기 청소부가 나가지 않았다. 8월14일 부인은 부산일보 기자에게 마리아가 고향인 성환으로 가고 싶다고 하기에 마리아의 양복을 지어주기 위하여 양복상을 불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 자신의 양복을 짓기 위하여 양복상을 부른 것이었다. (‘그로 100% 부산 마리아사건 공판기’, ‘중앙’ 1934년 3월호)

    검찰은 다카하시 부인이 남편과 마리아의 부정한 관계에 앙심을 품고 마리아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적극적으로 심문했다. 그러나 다카하시 부인은 부인(否認)으로 일관했다. 그는 9월17일 예심에 회부됐고, 예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그러나 12월14일 1심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됐다. 검사의 항고는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물적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으며, 자백도 없으니 유죄판결은 애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속에서 2심 판결까지 불과 3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선인이 피고였다면 예심에서 증거를 찾느라 구속된 상태로 3~4년은 족히 끌었을 일이었다.

    제3의 인물, 이노우에

    다카하시 부인의 무죄 방면으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조선인 하녀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일본인 주부의 무죄 석방 소식은 잠잠했던 여론을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살아서는 한번도 주목을 받아보지 못한 마리아 변흥례는 죽어서 식민지 조선의 인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경찰의 고민도 날로 커졌다. 수사를 종결하자니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수사를 지속하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더욱이 물증은 없지만 심증으로는 범인임에 틀림없는 유력한 용의자는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이제 남은 유일한 단서는 수사 초기에 날아든 괴이한 투서뿐이었다. 경찰은 철도 관계자와 초량정 인근에 사는 모든 사람의 필적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회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저물었다.

    비명횡사한 마리아 변흥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경찰은 제3의 인물을 용의자로 검거했다. 1933년 2월17일, 사건발생 1년6개월 만의 일이었다. 용의자로 체포된 인물은 이노우에 슈이치로(井上修一郞). 철도국 공제조합 초량 배급소 직원이었다.

    이노우에는 처음 조선에 나와서 철도국 공제조합 용산 배급소에 있을 때부터 용산 철도국 관사에 있는 다카하시 부부와 면식이 있었다. 이노우에가 부산 초량 배급소로 발령이 나고 잇따라 다카하시가 부산 운송사무소 소장으로 영전하자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은 수시로 만나는 사이가 됐다. 항간엔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부인의 정부(情夫)라는 소문도 있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노우에를 다카하시 부인과 함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노우에 슈이치로를 범인이라고 추정하게 되기까지 부산경찰서의 수사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괴투서 등으로 사건이 복잡해졌고, 물적증거는 거의 인멸되었다. 다카하시 부인이 무죄로 풀려나자 외부에서 침입한 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부산경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1. 사건발생 당일 오후 8시경 다카하시의 관사 앞을 배회하던 로이드 안경을 쓴 30세 내외의 사나이가 있었다. 2. 사건 후 이노우에는 머리를 특별히 깎았다. 3. 사건직후 이노우에가 애정문제로 괴로워하며 종교를 천리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탐문 결과 이노우에는 2~3인의 유부녀와 추잡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났다. 당국은 그의 이러한 방탕한 성적생활에 중심을 두고 추궁한 결과 사건발생 전 다카하시 부부가 철도국장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해 2~3일간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마리아와 추잡한 관계를 맺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마리아를 그처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동아일보’ 1933년 4월14일자)

    경찰은 50일간의 조사 끝에 확실한 단서를 잡아 4월13일 검사국에 송치했다. 검사는 이노우에의 단독범행으로 인정하고 예심에 회부했다.

    과연 단독범행일까?

    검사는 마리아 참살사건이 이노우에의 우발적 범죄라고 판단했다. 검사가 정리한 사건의 개요는 8월1일 새벽 1시경 이노우에가 부엌문을 통해 다카하시의 집에 잠입해 마리아를 강간하려 했으나 마리아가 응하지 않자 살해하고 부엌문으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사건 직후 부산경찰서에 날아든 괴투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도쿄,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필적을 감정한 결과 투서의 필적과 이노우에의 필적은 정확히 일치했다.

    8월1일 마리아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이노우에는 연이어 수상한 행동을 했다. 사건 전후 다카하시 집안에 대한 이노우에의 태도는 너무 달랐다. 이노우에는 수시로 그 집에 출입했는데, 정작 하녀가 살해됐을 때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변고를 당한 부인이 몇 번이나 와달라고 독촉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노우에는 이틀 후에야 마지못해 다카하시의 집에 나타났다. 무서우니 당분간 집에 묵어달라는 다카하시 부인의 부탁도 들어주겠다고 하고선 들어주지 않았다. 사건 직후 이노우에는 이름을 ‘슈이치로(修一郞)’에서 ‘류우(隆雄)’로 바꿨다. 개명 사유는 슈이치로라는 이름이 누군가를 살해할 불길한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면서도 마리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서울과 만주에 새 직장을 알아보았다.

    이노우에의 행실 역시 문제이다. 이노우에의 행실은 극히 불량하여 정조관념은 전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행실의 소유자인 이노우에는 수시로 폭력을 써서 아녀자의 정조를 빼앗았다. 얼마 전에도 어떤 집 모녀가 이구동성으로 이노우에에게 폭력적 능욕을 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사실을 고소하고자 하였으나 사람의 이목이 있어 그만두었다. 주변인물의 증언에 따르면, 이노우에는 “마리아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 “마리아의 얼굴은 분이 곱게 먹는다”, “마리아는 어여쁜 여자다” 같은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이로 미루어 이노우에는 마리아와도 도색유희를 걸어보려던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노우에는 마리아와 관계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노우에의 처는 신병으로 오랫동안 경성에 가서 치료를 받았고 그 후 돌아와서도 매일 철도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사건 당시 이노우에는 성적으로 상당히 굶주린 상태였다. (‘그로 100% 부산 마리아사건 공판기’, ‘중앙’ 1934년 3월호)

    부인으로 일관하던 이노우에는 제6회 경찰심문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8월1일 새벽 1시30분경 마리아를 강간할 목적으로 다카하시의 집에 침입했다가 마리아에게 발견됐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범행을 자백하면서 이노우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심문하던 경찰에게 염주를 갖다달라고 말했다.

    이노우에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선 마리아를 살해할 당시 큰 소란이 있었는데 옆방에서 자던 다카하시 부인이 깨지 않았다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우발적인 살인이었는데 수법이 그처럼 잔인했던 것은 무슨 이유인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참살 사건 용의자 이노우에의 체포소식을 전하는 ‘별건곤’ 1933년 5월호.

    또한 범행시각도 이웃의 증언이나 부검결과와는 상이했다. 이웃집 하녀는 마리아의 비명소리를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사망시각이 식후 3~4시간이 지나서라는 부검결과와도 일치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자백한 범행시각은 다음날 새벽 1시30분이었다. 이노우에는 12시까지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잠시 빠져나와 살인을 하고 다시 극장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없었다. 부검결과와 이노우에의 자백, 둘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공범?

    제11회 경찰심문에서 이노우에는 진술을 번복했다. 마리아를 강간할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자백이었다.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집에 수시로 출입을 하게 되는 사이 어느덧 ‘유한마담’다카하시 부인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다카하시 마사키는 1931년 6월28일부터 7월2일까지 경제조사차 거창지방에 출장을 가느라 집을 비웠다. 그날 밤 이노우에는 다카하시 부인을 찾아가 부인의 침실에서 담소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 두 남녀는 마침내 ‘사람의 눈을 피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같은 해 7월24일 저녁 두 남녀는 부인의 침실에서 밀회를 즐기다 마리아에게 발각되었다. 크게 낭패한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의 입으로부터 이 사실이 흘러나온다면 자기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 우려했다. 마리아를 해고시키려 했으나 심성이 선량하여 주인의 신용을 받는 마리아에게는 해고시킬 구실이 없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영원한 함구책으로 마리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을 이노우에와 상의했다. 이노우에는 다카하시 부인의 기세에 끌려서 마침내 마리아를 살해하자는 흉계에 동의했다. 두 남녀는 7월29일부터 약 1주일 예정으로 다카하시 마사키가 진주지방에 출장간 기회를 이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그로 100% 부산 마리아사건 공판기’, ‘중앙’ 1934년 3월호)

    이노우에의 진술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범행은 다카하시 부인의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되었다. 7월29일에는 이웃집 쪽으로 난 창문에 막을 쳐서 거사가 탄로나는 것을 방지했고, 30일 오후에는 부인의 침실에서 밀회하여 다음날 밤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30일 밤, 다카하시 부인은 초량정 중앙극장에 영화구경을 가서 밤늦게까지 마리아를 못 자게 피로하게 만들었다. 31일 저녁에는 양복점 재단사를 불러 마치 마리아를 고향으로 보낼 때 입힐 양복을 주문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환심을 샀다.

    당일 오후 9시경, 마리아에게 자라고 하고 산책 가는 것처럼 공원에 나가서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이노우에를 데려왔다. 두 사람은 10시가 조금 지나서 다카하시 부인의 침실에 들어왔다. 전날 밤 세 시간밖에 못 잤던 마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노우에는 장롱에서 허리끈을 꺼내 들고 부인과 함께 마리아의 방으로 갔다. 깊이 잠든 마리아의 목을 허리끈으로 옭아매고 오른발로 마리아의 어깨를 누르면서 힘껏 끈을 당겼다.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의 다리를 눌러서 반항하지 못하게 도왔다. 마리아가 발버둥치다 죽은 후 다카하시 부인은 변태성욕자의 소행으로 가장하기 위해 부엌칼을 가져와 시신의 음부를 찔렀다.’

    이노우에는 경찰조사에서 두 차례 서로 다른 자백을 했다. 정황상 두 번째 자백이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와 예심에서는 또다시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예심판사는 7개월 동안의 심리 끝에 1933년 11월8일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을 공범으로 인정하고 공판에 회부했다.

    치열한 법정 공방

    예심 결과 마리아 참살 사건의 주범은 다카하시 부인, 종범은 이노우에였다. 그러나 정작 공판에 회부된 것은 이노우에뿐이었다. 검사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들어 다카하시 부인의 기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검사의 기소가 없으면 재판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심이 종결되었는데 주범인 다카하시 히사코는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이후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는가는 문제의 인물 다카하시 히사코의 신변처리에 있다. 예심판사는 검사의 기소가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를 증인으로 수 차례 소환했을 뿐이다. 검사는 다카하시 히사코를 기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33년 11월10일자)

    1933년 12월14일 오전 10시, 마리아가 죽은 지 2년5개월 만에 1심 공판이 시작됐다. 배석판사 한 명을 제외하면 판사, 검사, 변호사, 피고, 증인 모두 일본인인 진기한 재판이었다. 일본인 주부가 정부와 공모하여 조선인 하녀를 죽인 사건 자체도 엽기적이었지만, 주범은 자유롭게 활보하고 종범만 기소된 공판은 더욱 엽기적이었다. 공판이 열린 부산지방법원 제2호 대법정에는 새벽부터 방청객이 쇄도했다. 방청객이 너무 많이 몰려 두 번째 공판부터는 추첨으로 방청객을 뽑았다. 기자 숫자도 언론사 한 곳당 한 명으로 제한했다. 이수탁의 살부(殺父) 공판(‘신동아’ 2005년 7월호 472쪽 참조) 이후 최고의 법정 드라마였다.

    검사가 공소사실을 낭독하고 재판을 청구하자 재판장은 피고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재판장: 마리아가 살해되던 31일에는 무엇을 하였던가.이노우에: 오후 4시에 퇴근한 후 이웃이 영화를 보자고 하여 중앙극장에 갔습니다.재: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다카하시 부인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가더라는데.이: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재: 무슨 영화였고 관객은 얼마나 됐나.이: (얼굴빛을 붉히며) ‘사곡괴담(四谷怪談)’이었고 그밖에는 기억이 없습니다.재: 마리아가 살해된 시간은 31일 밤 11시다. 피고는 주장과는 달리 영화구경을 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이: 신에게 향하여 구경하였다는 것을 맹세합니다.재: 마리아가 살해당한 방의 전구를 만진 적이 있었는가.이: 없었습니다.재: 전구에 얇게 피고 지문이 있다는데.이: 만져보지도 않았는데 지문이 있었다니 무섭습니다.재: (투서를 보여주며) 이 투서는 8월3일 오전 11시경 부산경찰서에 온 것이라는 데 피고가 쓴 것이 아닌가.이: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재: 경찰조사에서 다카하시 부인과 1931년 6월부터 관계를 맺었고 부인과의 관계를 마리아에게 들키자 부인과 공모하여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나.이: 강압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습니다.재: 피고가 사건 직후 경성으로 전근 갈 때 다카하시 부인과 악수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는데.이: (얼굴빛을 붉히며) 술을 많이 마셔 기억이 없습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자)

    이노우에는 이처럼 명백한 사실도 교묘히 피해갔다. 다음날 속개된 공판에서는 다카하시 부인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 그녀도 범행은 물론 이노우에와의 관계까지 부인했다.

    재판장: 31일 저녁밥은 6시경에 먹었나.다카하시: 저녁밥을 먹을 때 양복집 점원이 왔습니다.재: 양복집 점원은 이노우에에게 의뢰해서 온 게지?다: 양복집을 소개받았습니다.재: 마리아가 피곤했던 것은 전날밤 중앙극장에서 구경을 하고 2시반경에 잤다가 아침 5시30분에 일어난 관계가 아닌가.다: 몸이 고약하다고 했습니다.재: 그날 밤 증인은 10시에 자고 1시와 3시에 화장실 가느라 일어났지?다: 낮에 수박을 많이 먹었습니다.재: 그날 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나.다: 깊이 잠들었나 봅니다.재: 마리아의 시체를 10시에야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다: 전날 밤 마리아에게 실컷 자라고 일러둔 터라 자고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재: 사건 당일 아침에 한하여 실컷 자라고 한 것은 우습지 아니한가.다: 실컷 자라고는 하였으나 그런 마음은 없었습니다.재: 이노우에가 동생같이 생각해 달라고 하였던가.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재: 증인은 부인병으로 고생했다지.다: 부인병은 있었으나 그렇게 고생한 일은 없습니다.재: 그러나 증인이 대구에서 예심을 받았을 때, 의사의 진단에는 증인에게 임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다: 진단을 받은 일은 있으나 부인병은 아닙니다.재: 그렇지만 소변에 임질균이 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이노우에는 임질로 고생하였는데 증인은 이노우에와 정교한 일은 없는가.다: (얼굴빛을 붉히며) 없습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6, 17일자)

    공판은 해를 넘겨 1934년 1월 말까지 지속됐다. 심리가 계속될수록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의 범죄 사실은 명확해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니다’ ‘모른다’로 일관했다. 심리 중 밝혀진 사실을 종합하면 이노우에와 다카하시가 공모하여 마리아를 잔인하게 살인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1월20일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이노우에의 단독범행이라는 엉뚱한 논고를 펼쳤다.

    “8월1일 오전 1시30분 이노우에는 마리아를 강간하려고 하녀 방에 들어갔다. 마리아가 반항하므로 교살하고 범행 후 칼로 국부를 찔렀다. 사건 직후 부산경찰서에 들어온 1, 2차 투서가 모두 이노우에가 쓴 것이다. 마리아가 죽은 이후 이노우에는 평소와는 달리 다카하시의 집에 가길 주저했다. 이노우에는 ‘슈이치로’가 살인할 이름이라 하여 ‘류우’로 개명했다. 이노우에의 평소 품행은 몹시 폭력적이고 음란했다. 평소 이노우에는 마리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이노우에의 처는 당시 병석에 있어서 오랫동안 성적으로 굶주렸다.”

    검사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이노우에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다카하시 히사코 부인은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상한 재판결과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동아일보 1934년 1월20일자에 실린 다카하시 히사코의 사진. 이노우에에 대한 1심 재판장에서 나오는 모습이다.

    1934년 1월27일 선고공판에서 재판정은 이노우에에게 논고대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사의 논고와는 달리 판결문에는 다카하시 히사코가 주범, 이노우에 류우가 공범이라고 명시했다. 이로써 다카하시 부인은 재판부로부터 주범으로 지목되고도 검사의 기소가 없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기이한 처지가 됐다. 검사는 “이노우에만을 단독으로 처벌해달라고 했는데, 예심정과 판결언도가 다카하시 히사코가 공모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다카하시 히사코를 기소할 생각은 없다”며 끝내 다카하시 부인을 기소하지 않았다. 다카하시 부인을 주범으로 명시한 판결문이 알려지자 여론은 들끓었다.

    공소는 무섭다. 이노우에는 자기가 결백하다니 항소하겠지만 다카하시 히사코와의 정분을 생각하면 그만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복심 검사가 다카하시 히사코를 기소하라고 1심 재판소 검사에게 지휘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여지없이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다.

    범인은 누구냐, 왜 죽였느냐를 놓고 3년을 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사건이 한 단락을 짓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보다 한층 더 흥미진진하다. “왜 죄인을 그냥 두느냐 말이야”, “저런 고약한 계집을 다시 햇볕을 보게 하다니” 하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괴상한 재판이 이노우에의 불복으로 2심에 회부된다니 아마도 원혼의 신원이 끝나기까지는 좀더 기다려 보아야 할 듯하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찌 될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다만 호사가들만이 아닐 것이다. (‘동아일보’ 1934년 1월28일자)

    2심 재판은 1934년 4월30일부터 8월6일까지 대구 복심법원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심 재판에서도 기소되지 않은 다카하시 부인이 마리아를 죽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여전히 쟁점이었다. 2000만 조선인은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마리아의 원혼을 달래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이노우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부인과 정교관계를 맺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마리아가 살해된 시각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해서 만 3년을 끌었던 마리아 참살 사건은 관계자가 모두 무죄 석방되고 영구 미제사건이 됐다.

    마리아 변흥례는 하녀로 남의 집을 전전하다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인 고위관료의 관사에서 한밤중에 처참히 살해당했다. 범인은 안주인 다카하시 히사코와 그의 정부 이노우에 슈이치로 둘 중에 하나이거나 둘 다였다. 그러나 수사 당국은 시종일관 다카하시 히사코를 싸고돌다가 마지막에는 이노우에 슈이치로마저 무죄로 풀어줬다.

    부산 마리아 참살(慘殺) 사건
    全峯寬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하찮은’ 조선인 하녀 때문에 ‘고귀한’ 일본인이 처벌받는 일이 불쾌했던 것일까. 수사와 재판 관계자 수백명 중 조선인은 단 한 명뿐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러한 의심을 품을 만도 하다. 조선 소녀 마리아 변흥례는 일본인의 집에서 억울하게 죽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광화문 네거리가 촛불로 뒤덮일 만한 사건이었으나 정작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부조리가 널려 있던 1930년대 중반 식민지의 백성이 삼켜야 했던 또 하나의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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