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의 특별한 제안
그러나 훔볼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독일 외교관의 소개로 만난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로부터 엄청난 제안을 받은 것. 훔볼트의 해박한 과학적 지식과 열의에 감탄한 카를로스 4세는 훔볼트에게 자신이 지배하는 모든 영역의 땅과 바다, 하늘, 식물과 동물, 광물을 탐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것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은 이후 300년 동안 한번도 없었던,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과학계에도 미지의 세계였다. 훔볼트는 그때의 심정을 가까운 친구에게 이렇게 전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파타고니아(남미 최남단)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그 길에서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산의 높이를 재고, 광물의 성분도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목표는 자연의 힘 상호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이처럼 오랜 준비와 기다림 끝에 출발한 훔볼트의 첫 항해 기착지가 바로 베네수엘라 카리브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쿠마나였다. 이때 파리에서 알게 된 식물학자 봉플랑도 동행했다.
훔볼트는 쿠마나에서 1년 가까이 머문 다음 오리노코 강을 탐험하기 위해 카라카스로 향했다. 최단 코스가 있는데도 굳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멀리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남미의 관문 아바나의 선택
오리노코 강 상류에서 아마존 강으로 이어지는 곳은 미답지역으로 현지 안내인조차 발을 들여놓기 꺼렸다. 다행히 그 지역을 순례하던 프란체스코 수도원 소속 베르나르도 세아 신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존 강 과 오리노코 강 사이에는 신비의 호수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곳은 엘도라도(El Dorado·황금인간)가 지배한, ‘빌라 임페리얼 데 마노아’라는 황금의 도시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세계의 탐험가들이 그 흔적과 엄청난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누구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훔볼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엘도라도가 있었다는 파리마 호수를 지도에서 삭제하고 대신 카시키에라를 그려 넣었다. 카시키에라는 오리노코 강에서 배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정글인 그곳에서 훔볼트는 다시 카누로 옮겨 타고 100km 떨어진 앙고스투라로 들어갔다. 5개월여 탐험한 끝에 그곳에 도착한 훔볼트와 봉플랑은 그만 열병에 걸려 1개월 넘게 머물러야 했다. 두 사람은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평원을 가로질러 쿠마나 인근의 항구도시 누에바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훔볼트 일행은 또다시 그곳에서 넉 달간 붙들려 있어야 했다. 영국 배가 해안을 봉쇄해 당초 목적지인 쿠바 아바나로 갈 수 없었던 것. 우여곡절 끝에 건어물 운반선을 얻어 타고 아바나에 도착한 것은 1800년 12월19일이었다. 쿠마나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꼬박 1년5개월이 걸린 셈이다.
아바나는 아메리카의 관문이자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훔볼트는 거기서 다음 진로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북아메리카를 탐사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남아메리카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 훔볼트는 베네수엘라 탐사 길에 채집한 식물 표본 등 6만점에 이르는 수집품을 세 꾸러미로 나눠 하나는 영국을 경유해 독일로, 다른 하나는 스페인의 카디스를 경유해 프랑스로로 가는 배편에 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아바나에 그대로 남겨뒀다. 운반 도중 예기치 않은 사고와 분실에 대비한 조치였다. 실제로 프랑스행 수집품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좌초되면서 수장됐고, 독일행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이 폭격당하는 와중에 사라졌다.
1801년 3월8일 훔볼트 일행이 도착한 곳은 누에바 그라나다왕국(지금의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였다. 최종 목적지로 잡은 페루 리마와의 사이에는 거대한 안데스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다. 안데스 산맥은 아마존 강의 원천. 그는 그곳에서 아마존 강 이북의 남아메리카를 관찰해 그 지도를 완성하고 싶었다.
훔볼트는 카르타헤나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막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도 그는 고도를 측정하고 대기의 성분을 분석했으며 강 지도를 그려 나갔다.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서 하선한 그들은 다시 산길을 헤치며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2850m의 보고타를 향해 올라갔다. 제대로 된 길도 없을 뿐 아니라 봉플랑이 말라리아에 걸려 힘든 행군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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