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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독도에 독도의용수비대장 동상을 못 세운다고?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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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는 해류와 조류가 복잡하게 섞이기 맑은 날에도 파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날씨는 좋은데 파도가 높아 독도 접안에 실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리해서 접안시키면 배가 접안시설로 밀려들어온 강한 파도에 밀려 접안시설에 “쿵쿵” 부딪혀 파손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말 운 좋은 사람만 독도에 입도할 수 있다. 어렵게 독도에 상륙했는데,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569평 남짓한 시멘트 시설뿐이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애국적인 시민에게 독도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다. 독도의 역사와 문화를 접할 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맥아더 라인과 이승만 라인

한송본씨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이다. 그는 독도를 찾는 사람들을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자비(自費)를 들여 찾아온 애국 시민’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들의 ‘코드’에 맞는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직후인 지난해 3월20일, 그는 자신이 이사로 있는 독도연구보존협회에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씨 동상을 제작하자고 발의했다.

1986년 57세를 일기로 작고한 홍순칠씨는 울릉도 출신으로 6·25전쟁 때 부상을 당해 1952년 제대한 상이용사였다. 그가 25세의 나이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한 것은 당시 무섭게 변모하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환경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당시 동북아 정치 상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945년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패배한 일본은 대일(對日)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28일까지 미 군정 치하에 있었다. 군정은 맥아더 원수가 이끌었는데, 맥아더는 일본 점령 직후인 1946년 6월22일 ‘일본인과 일본 선박은 독도 반경 12해리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 허가구역’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맥아더가 선포한 일본 어선의 조업 한계선을 ‘맥아더 라인’이라 불렀다.

맥아더 라인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준비되자 맥아더 라인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5차 초안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인 시볼트를 로비스트로 고용해 집요한 공작을 펼친 결과 제7차 초안에는 이 문구가 빠지게 됐다.

당시 한국에선 ‘외교의 귀신’으로 불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고 1952년 1월18일 독도를 한국 영해에 편입시킨 평화선을 선포했다. 평화선은 맥아더 라인에 빗대 ‘이승만 라인(李 라인)’으로 불렸는데, 당시 일본은 미 군정하에 있었기에 이에 대해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 달 후인 4월28일 미 군정이 막을 내리자 일본은 즉각 이 라인을 부정하며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외쳤다. 이에 따라 일본 어선이 ‘이승만 라인’을 넘어와 조업하자 이 대통령은 북한과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즉각 해군 함정을 동원해 포를 쏴 쫓아내거나 나포케 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일본 어민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외교적 항의를 거듭하던 일본은 해가 바뀌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27일 새벽 3시, 일본 수산청과 법무성, 시마네현청 소속 공무원 30명이 해상보안청 순시선인 ‘오키’와 ‘구스류’함을 타고 독도에 상륙해, 텐트를 쳐놓고 조업하던 한국 어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고는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영토 표목을 세우고 돌아갔다.

이때 퇴거 명령을 받은 한국 어민들은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에 퇴거하지 못하고 일본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작업을 마친 일본 공무원들이 철수하자 이들은 표목을 뽑아내 때마침 도착한 배를 타고 울릉도로 돌아와 군청과 경찰서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은 즉각 국회로 전달됐다.

국회에서는 김정실 의원이 나서서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것을 빗대 “1953년 6월27일 새벽에는 일본이 기습 북침을 했다”고 성토하는 등 일본을 비난하며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북한과 전쟁을 치르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해 10월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들어가, 그 사이 일본이 새로 박아놓은 일본 영토 표목을 뽑아내고 ‘대한민국 독도’라고 새긴 영토 표석을 세워놓고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홍순칠은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벌이는 실력대결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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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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