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는 필자의 모스크바 유학 시절, 고국 러시아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유난히 투철했던 ‘세계영화사’ 담당교수의 희뿌연 침이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2시간의 수업 중 절반이 넘게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비롯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찬사를 퍼부었다.
다른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며 어떤 상념에 잠기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이 음악을 마냥 평온하게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름답고 극적인 멜로디는 우리를 평온함으로 인도하지만, 그 평온 속에는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마치 응축된 정리판처럼 꼭꼭 감춰져 있다.
수많은 연주자가 연주해온 이 곡을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가 최근 연주해 음반에 담았다. 명료한 핑거링과 물 흐르듯 유려한 선율, 적절하게 조절된 음량과 무엇보다도 이지적인 음악적 자세로 팬의 지지를 받아온 그는 이 앨범에서 각각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유럽 최고의 지휘자라 할 수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안토니오 파파노와 화려한 협연을 펼쳤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안스네스가 그간 무대에서 선보인 인기 레퍼토리이다. 이번 연주를 통해 그는 작곡가의 의도에 집중하는 것을 뛰어넘어 탄탄한 구조 속에 잘 정돈된 레가토를 선보인다.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는 정확함과 격정적 감성이 조화돼 있으며,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선 명석하게 만들어진 정밀함과 전혀 과장되지 않은 부드러움이 매혹적인 멜로디와 뒤섞여 환상의 소리를 자아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