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잔 빼던 김광화씨가 춤바람이 났다. 물론 카바레에 맛들였다는 말은 아니다. 오묘한 춤의 세계에 빠졌다고 할까. 춤으로 말미암아 상처가 아무는가 하면, 심연의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어깨뿐 아니라 손, 눈, 입술, 혀까지 들썩거리다 보니 어느새 얼굴은 밝아지고 묵은 미움도 스르르 녹았다. 그는 그렇게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온 세상이 눈이다. 눈에 파묻혀 춤을 춘다.
곧이어 힘찬 음악 ‘DOC와 춤을’이 나온다. 제 방에서 뭔가를 하던 무위마저 뛰어나온다. 이 녀석은 온 집안 구석구석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든다. ‘춤을 추고 싶은 때는 춤을 춰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그깟 나이 무슨 상관이에요~, 다 함께 춤을 춰봐요, 이렇게~’
우리가 추는 춤은 자유롭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춤이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몸을 푸는 춤이고, 몸이 가는 대로 흔드는 춤이다. 눈을 감고 자기만의 몸짓으로 추다가도 식구들 몸놀림을 본다. 처음 보는 몸놀림에 내 몸도 어느새 새로운 몸놀림을 따른다.
어지간히 몸을 흔들었는지 아내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가스 불을 댕긴다. 이렇게 우리 식구가 다 함께 춤을 추는 건 아주 최근에 생긴 풍경이다. 돌아보면 내게 춤은 아주 쑥스럽고 어색한 몸짓이었다. 살다 보면 춤을 추어야 하는 자리가 가끔 있다. 회식자리나 잔칫집에서 여흥이 무르익으면 하나 둘 춤을 춘다. 그럴 때 나는 몸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자의식이 강하다’고 할까.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내 옷깃을 당겨도 뿌리치곤 했다. 그러다가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지못해 따라 일어난다. 춤이라고 해봐야 나무토막처럼 흔드는 막춤이었지만.
‘자연으로 들어가는 멋진 문’
그러던 내가 바뀌고 있다. 몸 쓰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새 춤과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지난 여름이었다. 아내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바람소리(닉네임)가 우리집에 들렀다. 당시 친구는 ‘춤 치료(Dance Therapy)’에 흠뻑 취해 있었다. 친구는 하던 일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는데, 이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춤 치료를 만났다고 했다.
나는 치료보다는 춤에 관심이 많아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 기회에 춤을 어려워하는 나 자신을 고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친구가 말하는 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형화된 춤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춤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가 다섯 가지 리듬을 알려주었다.
첫째 리듬이 흐름(flowing). 현실을 바로보고 받아들이는 리듬이란다. 둘째는 드러내기. 밖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 즉 선택을 말한다. 셋째는 내던지기. 선택한 것에 온몸을 던진다. 넷째가 영혼의 노래. 자기 내부에 있던 것들이 위로 올라온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춤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침묵의 춤. 자기만의 춤이며 가장 아름답단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렵게만 느껴지던 춤이 가깝게 다가온다. 다섯 가지 리듬은 우리 일상의 몸놀림과 여러모로 연결된다. 낮과 밤, 계절의 흐름을 늘 겪으며 산다. 또 단순 반복하는 일도 있지만 온몸으로 해야 하는 일도 많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만의 몸짓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춤을 추고 싶었다.
친구한테 리듬에 따른 춤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맨 정신에 춤을 추는 게 쑥스러웠지만 그 고비를 넘기니 친구를 따라 출 수 있었다.
친구가 돌아가고 나서 춤이 계속된 건 아니다. 한동안 춤을 잊고 지내다가 이번에는 박태이(47)씨가 하는 춤 명상(Dance Meditaion)을 알게 되었다. 춤과 명상. 얼른 느끼기에는 두 글자의 연결이 잘 안 된다. 춤이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라면 명상은 고요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런데 두 글자가 하나가 되니 뭔가 또 다른 깊이가 느껴진다.
그이가 하는 춤 명상을 직접 보니 아주 새롭다. 생각했던 춤과는 거리가 멀다. 춤이라고 하기에는 운동 같고,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어떤 흐름과 리듬이 있다. 마치 강물이 흐르는 모습이라고 할까. 수많은 요가 동작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이의 몸짓은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부드럽다.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그러다가도 강물이 폭포를 만난 양 격렬한 몸짓도 나온다.
그이는 몸으로 춤을 추면서 입으로는 강의를 이어간다. 박씨도 우울증으로 몸이 망가졌다가 춤을 통해 거듭났단다. 인도에서 명상하는 도중, 몸에서 저절로 춤이 터져나왔다고 했다. 그이는 춤을 추면서 엉망이던 몸뚱이가 어느덧 정상으로 돌아옴은 물론 몸이 갖는 신비로움을 깊이 체험하면서 이를 명상법으로 체계화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나선 것이다. 나 또한 몸이 망가졌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몸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어 그의 이야기에 쉽게 공감했다. 춤 명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Shall we dance?”
‘명상 상태로 들어가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춤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춤은 원래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숨결이다. 축제 분위기에서 춤이 나오듯 자연스럽게 춤이 일어나도록 한다. 내면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몸짓을 끌어내어, 몸의 흐름에 내맡기며 그저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춤을 춘다는 사실조차 잊고 춤 그 자체가 된다. 춤과 춤추는 이의 구분이 사라질 때 명상이 일어난다. 춤은 자연스럽고 손쉽게 명상상태로, 즉 자연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멋진 문이다.’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몸으로 익히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내가 춤 명상을 배우는 이유는 내 몸을 돌아보자는 데 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몸이 굳어지기 쉽다. 농사가 자연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 하나하나 몸짓은 사실 자연스러운 몸놀림에서 대부분 벗어나 있다. 삽질, 낫질, 모내기, 도끼질. 그 모두가 따지고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몸놀림이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때로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글쓰기가 아닌 끙끙대는 몸짓이 있다.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벗어난 몸짓은 몸부림이기 쉽다.
농사를 짓다 보면 춤이 나오기도 한다. 들깨를 털 때도 춤이 나오고, 기장을 거둘 때도 춤이 나온다. 지난 가을걷이 때 그랬다. 마당에 말리던 기장 이삭을 털었다. 도리깨로 대충 두드렸지만 이삭에서 다 떨어지지 않은 열매들이 남았다. 도리깨보다 발로 문지르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 기장 이삭을 한 움큼씩 바닥에 놓고 발로 비볐다. 한 발로 비비다가 두 발로 비볐다. 몸을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틀어야 잘 비벼진다. 저절로 트위스트가 된다. 동글동글 작은 기장 낟알들이 볼 베어링 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몸이 잘 미끄러졌다.
일이 춤이 될 수 있구나! 갑자기 의식이 확장된다. 일이 춤이 된다면 춤도 일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이제는 춤을 의식하며 기장을 비빈다. 리듬을 살려가며 비빈다. 발만 비비는 게 아니라 허리도 흔들흔들, 팔도 몸 따라 출렁출렁. 자세도 낮추고 덩실덩실.
시간이 지나자 힘이 든다. 아직도 털어야 할 기장이 많이 남았다. 혼자 하자니 춤도 재미가 없다. 아내를 찾는다.
“Shall we dance?”
아내는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온다. 마당에 펼쳐진 앞뒤 정황을 보더니 바로 알아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빤히 안다. 둘이서 신나게 ‘기장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바닥에 깔린 기장만 보고 흔든다. 그런데 춤이라 생각하면 이 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내와 마주보았다. 웃음이 나온다.
어느새 기장은 안 보고 아내 몸놀림만 보며 흔든다. 그러다 아래를 보니 기장 낟알은 떨어지다 못해 노랗게 껍질이 벗겨진 것도 있다. 이삭은 하도 비벼 너덜너덜해졌다.
지난 12월초, 자연이가 3박4일 일정으로 춤 테라피를 배우러 가겠다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이가 잘 배워와, 식구들에게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겠나. 춤 테라피에서 보조강사를 하는 친구에게 우리 식구 네 사람 몫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자연이는 우리 식구 춤 선생이 되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자주 온다. 산골 겨울은 몸을 움츠리기 쉽다. 추우니까 늦게 일어나고 일찍 해가 지니까 일찍 집안에 갇힌다. 거기다가 눈보라까지 치면 낮에도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진다. 몸은 덜 움직이고 아무래도 책을 보거나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몸의 활력은 떨어지고 생각만 많아진다.
분노를 털고, 귀를 씻고
움츠러드는 몸을 살리고자 춤을 춘다. 춤이 좋아 춤을 추고, 음악이 좋아 춤을 춘다. 글을 쓰다가도 막히면 춤을 춘다. 손님이 오면 손님과도 춘다. 집이 좁아도 어렵지 않다. 자기 몸짓을 풀어낼 틈새는 어디에나 있다. 식구가 함께 추기도 하지만 혼자 출 때도 있다. 단조로운 생활을 벗어나고자 추기도 하지만 분노를 털어버리고 싶을 때도 춤을 춘다.
춤을 추며 명상으로 들어간다. 손을 든 이가 춤 명상가 박태이씨.
순간 ‘불쌍해서’란 말이 내 귀에 꽂힌다. 아내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초라했던 내 지난날이 다시 떠오르며, 안에서 울컥하는 분노가 치민다. 더 말할 기분이 아니다. 이미 감정이 상했기에 말이 도움이 안 된다. 기분대로 한다면 아무거나 마구 집어던지고 싶다. 그렇다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대로 터뜨릴 수는 없다.
솟구치는 감정을 누르려고 음악을 틀었다. 방문을 닫고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든다. 털어버리고 싶다. 귀를 씻고 싶다. 몸을 흔들면 내 몸을 지배하는 좋지 않은 파장이 사라지지 않을까.
천천히 흔들다가 리듬에 따라 조금씩 격렬하게 흔든다. ‘불쌍하다’는 단어가 머리에 맴도니 자꾸 머리를 크게 흔든다. 내가 불쌍하다니! 나는 나대로 당당한데. 위로 아래로 옆으로 빙빙. 눈을 꼭 감고 몸을 부들부들 떤다. 차츰 격렬하던 몸짓이 음악에 맞추어 잦아든다.
춤을 추며 명상을 한다. 몸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면서 내 의식은 귀에 가 있다. 말이 무언가. 왜 말에 몸까지 흔들릴까. 그냥 흘려버릴 수 없나. 말이 상처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말에서 의미를 없애고 새소리처럼 그냥 소리로 들을 수는 없는가.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몸을 흔든다. 정리가 쉽지 않다. CD 한 장을 모두 들으며 춤을 추고도 부족하다. 한 장 더. 이번에는 만화영화 ‘스피릿’의 주제곡이다. 묶여 있던 야생마 스피릿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대초원을 뛰는 영화다.
첫 곡이 ‘Here I am’. 여기 내가 있다! 드넓은 대자연에 내가 있다. 풀과 땅과 하늘과 그리고 바람. 나도 자유롭고 싶다. 우리가 하는 말에서 자유롭고 싶고, 아내와 관계에서도 자유롭고 싶다. 춤을 춘다. 말이 남긴 상처를 씻어내는 해방의 춤을 춘다.
조금씩 생각이 정리된다. ‘불쌍하다’는 말에 아직도 울컥하는 건 나 자신이 예전 내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도 내게 불쌍한 구석이 있을지 모른다. 그게 뭘까. 아내가 집을 오래 비우면 밥상도 옷차림도 초라해진다. 외롭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게 일어나는 화는 아내가 던진 말 이전에 내 안에 숨겨진 부끄러움일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몸짓을 잃어버렸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겨 하고 싶은 몸짓, 진정 해야 할 몸놀림을 못하고, 스치고 때로는 감추고 살아왔다.
어린아이를 보면 몸짓이 아주 자연스럽다. 돌 지난 아이는 곧잘 춤 동작을 보여준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리듬을 따른다. 지난 가을, 친구 딸인 해성이가 성인식을 치른 적이 있다. 해성이네랑 가까이 어울리는 이웃들이 산골에 다 모였다. 어른 아이 다 합치니 얼추 스무 사람도 더 된다. 식이 끝나고 뒤풀이로 춤을 추는데 아이들은 열심이다. 십대가 앞장을 서자, 두세 살 난 아이도 뒤지지 않겠다고 끼어든다.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을 따라 몸을 흔든다. 이게 춤인지 아닌지 의식하지 않고 흔든다. 분위기에 따라 흔들고 음악 리듬에 따라 흔든다. 어른들은 대부분 멀거니 서서 그저 바라보았다. 그만큼 우리네 몸이 굳어 있다는 얘기다.
이번 겨울에 춤을 추면서 많은 걸 느꼈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게 아무래도 음악이다. 나는 노래를 잘 못하는 음치다. 박자와 리듬에 대한 감이 부족하다. 노래방에 가도 첫 시작을 언제쯤 해야 할지를 몰라 헤맨다. 한 구절 끝나 다음 구절로 넘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노래방 기기의 화면에 노랫말이 나올 때, 막상 따라 하려고 하면 이미 반 박자 늦다. 차라리 반주가 없는 게 도움이 될 정도다.
그런데 춤을 추다 보니 박자에 내 귀가 열리는 듯하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클래식이나 자연의 소리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대중가요도 좋다. 리듬에 맞추어 몸을 놀리다 보면 작곡가나 연주가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곡 하나를 작곡하고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짓이 있었을까. 음악 감상은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끼는 거라면 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 같다.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춤은 가사보다 먼저 리듬에 끌린다. 가사에는 머리를 거쳐서 반응하지만 리듬에는 우리 몸이 바로 반응한다. 그렇다면 춤은 말보다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기장을 털다가 아내와 ‘기장춤’을 추고 있다.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라면서 춤과 노래가 하나 되는 교육을 받았다면 공부도 즐겁고 귀도 지금보다 더 잘 들릴 텐데. 하지만 누구를 탓하리요. 중요한 건 잃어버린 나만의 리듬과 몸짓을 찾는 것이리라.
춤을 추며 몸놀림을 다시 시작한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음악에 따라 몸이 가는 대로 맡긴다. 음악이 빠르면 빠르게 느리면 느리게. 낮이면 밝게 밤이면 어둡게. 추우면 웅크리고 더우면 벗고. 몸속에 잠자던 계절을 더듬어본다. 꿈꾸는 봄에서 타오르는 여름. 풍성한 가을, 침묵하는 겨울을 느낀다.
자연이가 내 몸짓을 보더니 한 수 가르쳐준다. ‘사람들이 춤을 못 추는 이유는 남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몸이 더 굳어지기 쉽다. 자기 몸에 집중하되, 같은 몸짓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렇다. 남을 의식하니까 더 못 추는 거다. 방문을 닫고 커튼도 치고 혼자 춤을 추어본다. 내 몸짓에 한결 자신이 생긴다. 조금씩 춤이 달라진다. 색다른 몸짓을 막상 해보려고 하니 어렵고도 재미있다. 몸은 익숙한 몸짓을 따르고 마음은 변화를 주고 싶고. 한참 하다 보면 앗, 이거 좀 전에 했던 몸짓이다. 얼른 다른 몸짓을 떠올리지만 금방 안 떠오른다. 그냥 같은 몸짓으로 흔들면서 새로운 몸짓을 탐색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언뜻 무한의 세계가 떠오른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우리 몸은 아주 작은 점이다. 그러나 그 몸이 펼쳐 보이는 순간순간의 몸짓은 무한할 수 있겠다. 우리 인생은 고작 몇십년이지만 그 안에서 겪을 수 있는 순간의 선택은 무한할 것이다. 같은 몸짓을 되풀이하지 않는 춤은 내게 ‘무한’을 느끼게 해준다.
음악에 따라 춤도 달라진다. 고요한 클래식이 흐른다. 춤을 추다 보면 온갖 그림이 눈앞에 떠오른다. 우리 몸은 지난날의 슬픔, 아픔, 분노, 기쁨 그 모두를 기억하고 있다. 내 몸에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떠올린다.
바다다.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외로움. 바다를 헤쳐가는 힘이 팔뚝에 느껴진다. 리듬이 빨라지면 그에 따라 온몸으로 힘이 뻗어가며 더 힘차게 노를 젓는다.
다시 음악이 바뀌어 왈츠. 발레 흉내도 내본다. ‘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처럼 한 발을 높이 들자, 균형이 쉽게 허물어진다. 비틀거리며 억지로 자세를 잡으니 엉덩이 근육이 당기며 아파온다. 역시나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도 기죽지 않고 다음 동작으로 나아간다. 고개를 들고 손끝을 보며 발끝으로 달려본다. 어색한 몸짓이지만 내 몸짓에 취한다.
반가운 방귀
춤을 하루에 한 시간쯤 추면서 낮에 졸리던 기운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오전에 땔감을 한다거나 눈을 치우고 나면 몸이 나른하여 낮잠을 자곤 했다. 지금은 그런 기색을 별로 못 느낀다. 춤을 추면 에너지를 많이 써, 더 고단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인 것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몸을 억지로 누르는 것이 그냥 움직임대로 몸을 맡기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스트레스란 몸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상태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기분대로 무작정 몸을 놀릴 수도 없는 세상이다. 억누르자니 자기 몸을 해치고, 기분대로 하자니 남을 해칠 수도 있다. 그 틈바구니를 메우는 데 춤이 제격일지 모르겠다. 마음의 응어리를 리듬에 맞추어 몸으로 풀어낸다면 몸과 마음은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춤을 추며 내 몸 리듬도 느껴보고 싶다. 내 몸이 갖는 고유한 리듬은 숨결, 심장의 리듬, 장의 리듬일 것이다. 춤을 춘 지 고작 한 달 정도지만 나름대로 명현(瞑眩) 반응은 있다. 어떤 날은 방귀가 쉴 새없이 나온다. 그게 춤 때문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장의 흐름이 뚫리는 기분은 어렴풋이 느껴진다. 심장과 폐는 운동으로도 어느 정도 활력이 생기지만 장은 조금 다르지 싶다. 웬만큼 운동을 하더라도 장의 움직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어쩌다 이른 아침에 배를 문질러주면 꾸르륵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단식을 하면 장의 느낌이 좀더 잘 살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장을 채우면서 장운동을 돕고 싶다. 몸 전체 리듬이 잘 살아난다면 장의 리듬도 좀더 살아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춤 추다가 나오는 이 방귀는 반갑기만 하다.
내 몸 리듬에 대한 자각은 점차 이웃의 리듬을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사실 기분이란 몸과 마음의 리듬을 말하는 셈이다.
길들지 않은 아이들은 춤 그 자체다. 이웃집 아이들의 구김살 없는 춤.
한번은 서서 춤을 추다 무릎에 무리가 될까 싶어 주저앉아 춤을 추었다. 앉은 자리에서 리듬에 따라 어깨는 들썩들썩 허리는 비틀비틀. 그러다가 ‘얼굴춤’이 떠오른다. 우리 얼굴에는 여러 개의 표정 근육이 있다. 웃을 때 근육이 있고. 찡그릴 때 근육, 슬픈 표정을 짓는 근육….
굳은 근육은 풀어주고, 미소 짓는 근육은 살려내는 춤을 춘다. 미소를 머금다가도 입을 잔뜩 벌려 놀라는 근육을 만든다. 제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근육의 한을 풀어준다. 씰룩씰룩 돌리기도 한다. 마음껏 웃고 싶었지만 참아왔던 근육을 위로한다. 입 꼬리 근육을 살짝 올려 미소도 지어본다.
눈춤, 입춤, 혀춤
음악이 빨라지면 ‘눈춤’을 춘다. 4박자의 경쾌한 리듬 따라 눈을 끔벅이면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 마치 현란한 조명 아래에서 춤추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눈꺼풀이 조명 구실을 한다. 눈춤을 추고 나니, 입도 혀도 입술도 춤을 추잔다. 얼굴춤 가운데서도 입춤이 가장 변화가 많다. 리듬에 따라 입을 오물오물 씰룩씰룩. 혓바닥이 입 밖으로 들락날락, 입술에서 날름날름 빙글빙글. 입으로 추는 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어느새 느린 음악이 흐른다. 춤꾼이 무대 위를 천천히 돌듯이 혀를 돌린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내고 뒤로 당기고. 혀가 잇몸과 이를 스치며 지난다. 혼자 추는 춤도 좋지만 혀가 잇몸에 닿는 감촉은 둘이서 브루스를 추는 양 감미롭다.
혀는 파트너를 바꾸며 춤을 춘다. 잇몸, 이빨, 입술, 입천장. 이빨은 이따금 혀를 놓지 않으려고 잘근잘근 씹는다. 침이 많이 고인다. 꼴깍.
다시 혀는 혼자다. 서서히 입술을 지나 입 밖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려고 뻗으니 온 얼굴에 피가 몰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혀를 입술이 잡는다. 혀는 입술에 침을 묻히고 입술은 혀를 품어준다. 혀가 입술을 애무하고 입술은 혀를 애무한다. 눈을 감고 오래오래 애무한다.
이 느낌으로 말을 한다면 달콤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에 묻었던 말을 입술을 적시면서 토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향기로우랴. 또 말과 말이 서로를 맛보듯 서로를 북돋우고 살릴 수 있다면 우리 혓바닥은 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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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몸이 움직인다. 서서히 일어서며 두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얼굴. 내 몸, 내 존재를 다시 느낀다. 이번에는 손을 문질러주고 싶다. 손은 무언가를 어루만지기만 했지 어루만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얼굴로 손을 문지른다. 손은 가만히 있고 얼굴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 무릎, 목, 어깨가 얼굴을 돕기 위해 들썩인다. 차츰 두 손도 서서히 움직인다. 몸을 비틀며 두 손이 가슴으로 내려오고 엉덩이가 돌아간다. 다시 가슴으로 오르고 내리다가 사타구니로 내려간다. 몸 구석구석이 서로 부둥켜안고 만져주고 쓸어주고 보듬어준다. 몸이 달뜬다. 몸 구석구석이 깨어난다.
이제 아내와 둘이서 춤을 추고 싶다.
“Shall we d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