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독도에 독도의용수비대장 동상을 못 세운다고?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2-01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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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는 2월22일은 일본 시마네현이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일본이 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맞불을 놓아야 할까.독도에‘마지막 의병’ 홍순칠씨의 동상을 세우자는 데 왜 해양수산부는 반대하는가.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하늘에서 본 독도. 독도 관람객은 500t짜리 배를 댈 수 있는 면적 569평의 접안시설에만 머물러야 한다.

    “정부에서 만들면 예술영화고 민간인이 제작하면 에로물입니까?”

    십수년간 ‘독도 지키기’에 몰두해온 독도연구보존협회 한송본(64) 이사의 한탄이다. 한씨는 왜 이런 불만을 내뱉는 것일까.

    지난해 3월16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2005년은 다케시마(竹島)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고시 제40호를 발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라며 ‘고시 제40호가 발표된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한다’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했을 때 한국사회는 들끓는 냄비 같았다. 3월18일, 경남 마산시의회는 ‘이종무 장군이 마산포에서 대마도 정벌을 떠난 (1419년) 6월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제정해 맞불을 놓았고, 일부 시민들은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독도는 천연기념물 제336호다. 따라서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천연기념물 관련사안을 다루는 문화재청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내 대중적 인기가 높은 유홍준씨가 2004년 9월 문화재청장에 취임했는데, 유 청장은 독도 문제가 불거진 직후인 지난해 3월24일부터 독도 방문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일반인도 신고만 하면 배를 타고 독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 그러나 일반인의 상륙은 ‘콘크리트 시설까지만’이다.

    독도에는 500t짜리 배를 댈 수 있는 콘크리트 접안시설이 있는데, 일반인은 이곳에 내려서 독도를 올려다보며 감상해야 한다. 콘크리트 시설 끄트머리 부근 ‘독도 땅(독도에서는 흙을 거의 볼 수 없다), 독도 바위’가 시작되는 곳부터는 천연기념물이라 함부로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접안시설을 제외하곤 온통 어린이 주먹에서 수박만한 크기의 검은 돌이 깔려 있어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와그락” 소리를 내지르는 ‘자갈마당’까지만 겨우 밟아볼 수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 여행하기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다. 신청자가 워낙 많다 보니 독도행 배를 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차례가 돌아와도 날씨가 나쁘면 배(삼봉호)가 뜨지 않는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배는 뜨더라도 독도에 도착할 때쯤 해서 풍랑이 거세면 배는 접안을 포기하고 독도 주변을 한 바퀴 돈 뒤 울릉도로 되돌아온다.

    독도는 수심 2270여m 바닷속에서 2000m쯤 솟아 있는 해산(海山)의 화산 폭발로 치솟은 용암이 물 밖으로 나온 구조다. 따라서 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수심이 엄청나게 깊어져 독도 접안시설 주변에는 방파제를 만들지 못한다. 여느 섬 같으면 방파제를 쌓아야 할 곳의 수심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설사 이곳에 어렵사리 방파제를 쌓는다 해도 강한 파도에 유실될 가능성이 높다.

    깊은 바다는 해류와 조류가 복잡하게 섞이기 맑은 날에도 파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날씨는 좋은데 파도가 높아 독도 접안에 실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리해서 접안시키면 배가 접안시설로 밀려들어온 강한 파도에 밀려 접안시설에 “쿵쿵” 부딪혀 파손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말 운 좋은 사람만 독도에 입도할 수 있다. 어렵게 독도에 상륙했는데,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569평 남짓한 시멘트 시설뿐이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애국적인 시민에게 독도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다. 독도의 역사와 문화를 접할 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맥아더 라인과 이승만 라인

    한송본씨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이다. 그는 독도를 찾는 사람들을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자비(自費)를 들여 찾아온 애국 시민’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들의 ‘코드’에 맞는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직후인 지난해 3월20일, 그는 자신이 이사로 있는 독도연구보존협회에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씨 동상을 제작하자고 발의했다.

    1986년 57세를 일기로 작고한 홍순칠씨는 울릉도 출신으로 6·25전쟁 때 부상을 당해 1952년 제대한 상이용사였다. 그가 25세의 나이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한 것은 당시 무섭게 변모하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환경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당시 동북아 정치 상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945년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패배한 일본은 대일(對日)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28일까지 미 군정 치하에 있었다. 군정은 맥아더 원수가 이끌었는데, 맥아더는 일본 점령 직후인 1946년 6월22일 ‘일본인과 일본 선박은 독도 반경 12해리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 허가구역’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맥아더가 선포한 일본 어선의 조업 한계선을 ‘맥아더 라인’이라 불렀다.

    맥아더 라인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준비되자 맥아더 라인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5차 초안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인 시볼트를 로비스트로 고용해 집요한 공작을 펼친 결과 제7차 초안에는 이 문구가 빠지게 됐다.

    당시 한국에선 ‘외교의 귀신’으로 불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고 1952년 1월18일 독도를 한국 영해에 편입시킨 평화선을 선포했다. 평화선은 맥아더 라인에 빗대 ‘이승만 라인(李 라인)’으로 불렸는데, 당시 일본은 미 군정하에 있었기에 이에 대해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 달 후인 4월28일 미 군정이 막을 내리자 일본은 즉각 이 라인을 부정하며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외쳤다. 이에 따라 일본 어선이 ‘이승만 라인’을 넘어와 조업하자 이 대통령은 북한과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즉각 해군 함정을 동원해 포를 쏴 쫓아내거나 나포케 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일본 어민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외교적 항의를 거듭하던 일본은 해가 바뀌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27일 새벽 3시, 일본 수산청과 법무성, 시마네현청 소속 공무원 30명이 해상보안청 순시선인 ‘오키’와 ‘구스류’함을 타고 독도에 상륙해, 텐트를 쳐놓고 조업하던 한국 어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고는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영토 표목을 세우고 돌아갔다.

    이때 퇴거 명령을 받은 한국 어민들은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에 퇴거하지 못하고 일본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작업을 마친 일본 공무원들이 철수하자 이들은 표목을 뽑아내 때마침 도착한 배를 타고 울릉도로 돌아와 군청과 경찰서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은 즉각 국회로 전달됐다.

    국회에서는 김정실 의원이 나서서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것을 빗대 “1953년 6월27일 새벽에는 일본이 기습 북침을 했다”고 성토하는 등 일본을 비난하며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북한과 전쟁을 치르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해 10월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들어가, 그 사이 일본이 새로 박아놓은 일본 영토 표목을 뽑아내고 ‘대한민국 독도’라고 새긴 영토 표석을 세워놓고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홍순칠은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벌이는 실력대결을 지켜보았다.

    임의로 만든 ‘소집영장’ 돌려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씨 동상을 만들고 있는 한송본씨(왼쪽).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은 다가오는데…

    1953년 10월15일 독도에 들어간 한국산악회가 ‘시마네현…다케시마’라고 쓰인 일본의 영토 표목을 뽑아내고 있다.



    겨울에는 풍랑이 거센데다 독도에 들어가는 사람도 없으므로 한국과 일본은 실력대결을 벌이지 않는다. 그러나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독도에 사람이 들어가므로 한일 간에 언제든 마찰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홍순칠은 어떻게든 독도를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울릉도의 예비역들에게 자신이 임의로 만든 소집영장을 돌렸다.

    여전히 전쟁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였으므로 영장을 받아든 제대 군인들은 투덜거리며 소집장소로 나왔다. 홍씨는 이렇게 모은 동년배의 장정들을 향해 “독도를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했다. 마침내 4월20일 의용수비대는 독도로 들어갔다. 이때 울릉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조직이 의용수비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홍씨는 일명 ‘양공주’라고 하는 미군 위안부들의 도움을 받아 부산 미군부대에서 빼낸 소총으로 의용수비대를 무장했다. 그리고 김종원 경북도 경찰국장의 도움으로 고물 박격포 1정을 지원받았다. 울릉경찰서는 의용수비대원인 허학도씨를 경찰관으로 채용해 의용수비대와 울릉경찰서 간의 교신을 맡는 무선사 일을 하게 했다. 민관 합동의 ‘독도 지키기’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도 의용수비대가 독도 지키기에 들어간 것을 안 일본은 1954년 8월14일 시마네현 오키(隱岐)섬 수산고등학교 졸업생들이 탄 수산실습선 ‘다이센마루’를 독도에 접근시켰다. 학생들이 탄 비무장 선박을 접근시켜 의용수비대의 반응을 떠본 것이다.

    수비대는 단호히 대처했다. 그들은 독도로 접근해온 이 배를 나포해 학생과 교사, 승조원을 모두 내리게 한 후 ‘독도는 한국 땅이며 다시는 독도를 넘보지 않겠다’는 내용의 자필 각서를 쓰고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런 다음 자갈마당 앞에 의용수비대가 설치해놓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지표(之標)’비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나서야 이들을 풀어줬다. 그로 인해 일본은 일본 학생들이 탄 실습선이 다케시마에 있는 해적들에게 나포됐다며 발칵 뒤집혔다.

    그해 10월23일 오전 8시30분쯤 일본 해상보안청 제8관구 소속의 P9과 P11 순시함이 수산실습선 나포 행위를 징벌하고 독도를 접수하기 위해 독도 가까이로 다가왔다. 이를 안 의용수비대는 철통 같은 방어전에 돌입했다. 순시함이 가까이 올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의용수비대는 두 척의 배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서기종 대원으로 하여금 고물 박격포를 발사케했다. 포탄은 P9 순시함에 명중했다. 당시 일본 NHK 라디오는 이 공격으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은 실력행사를 통한 독도 점령 시도를 포기했다. 한국으로서는 실효적 지배를 굳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대신 일본은 외교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대일청구권 자금을 놓고 협상 중이었는데, 일본은 한국 정부가 독도에 있는 ‘해적(海賊)’을 소탕하지 않으면 협상에 응할 수 없다고 압력을 넣었다.

    홍익대에서 동상 제작 협조

    그로 인해 한국 정부도 독도 의용수비대를 거북하게 여기게 됐다. 의용수비대원들도 오랜 섬 생활로 지쳐갔다. 그리하여 1956년 12월 홍순칠씨를 비롯한 의용수비대원 33명은 독도 방어를 경북 경찰에 넘기고 조용히 울릉도로 철수했다. 관병(官兵)에게 맡기고 마지막 의병(義兵)은 깃발을 내린 것이다.

    현재 ‘관병’은 두 가지 방법으로 독도를 방어하고 있다. 독도 외곽 12해리 영해에는 동해해양경찰서 소속인 3500t급의 삼봉함(울릉도에서 일반인을 태우고 독도를 오가는 ‘삼봉호’와 이름이 비슷하다)을 띄워 지킨다. 그리고 육지인 독도에는 경북지방경찰청의 통제를 받는 울릉경비대 예하 독도경비대가 포진해 있다. 해경과 ‘육경(陸警)’이 합동으로 독도를 지키는 것이다.

    생전에 홍순칠씨는 ‘이 땅이 뉘 땅인데’라는 제목의 저서를 남겼다. 한송본 씨는 ‘이 땅이 뉘 땅인데’라는 글귀를 새긴 홍씨 동상을 독도 관광객들이 발을 디디는 접안시설 위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5월3일 그는 홍익대 미술대 이두식 학장과 조소과의 이수홍 교수를 만나 홍씨의 동상 제작을 부탁했다.

    이 학장과 이 교수는 대학원생인 최일호 작가를 추천했는데, 최 작가는 포대경(砲臺鏡) 앞에 서 있는 홍씨 동상 원형을 무료로 만들어줬다. 홍씨는 이 원형을 들고 주물 제작소를 찾아가 600만원을 주고 동상 제작을 마쳤다.

    독도는 천연기념물이라 시설을 설치하려면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콘크리트 접안시설은 독도 정상에 있는 등대와 함께 해양수산부에서 관할한다. 한씨는 해양수산부에 동상 설치 허가를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다.

    그러나 지난해 7월7일 해양수산부는 태풍이 불어오면 동상이 무너질 수 있어 위험하다며 이를 불허한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에 한씨가 안전 문제를 강화한 방안을 마련해 다시 허가해달라는 문서를 보내자 해양수산부는 12월29일 ‘독도는 천연기념물이라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불허 답신을 보내왔다.

    민간인인 한씨가 허가를 얻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상북도가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해 8월15일 경상북도는 1950년 3월20일 제2대 경북지사 조재천씨가 독도에 세운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와 1953년 10월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세운 ‘대한민국 독도’ 영토 표석을 복원하고, 1954년 8월 독도의용수비대가 세운 ‘대한민국~독도지표’ 비석을 바로 세우는 작업을 벌였다.

    ‘다케시마의 날’, 대책은 있는가

    경북도는 ‘이 비석들은 원래 독도에 있던 것’이라는 논리를 들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이를 집행하는 ‘실력’을 보였다. 원래 있던 것을 복원하고 대한민국 영유권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 문화재청도 반대할 이유가 없어 행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한씨의 노력은 민간인이 하기 때문인지 2005년 내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씨가 “정부가 만들면 예술 영화고, 민간이 제작하면 에로영화냐”고 푸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재 치안총감이 이끄는 해양경찰청이 홍씨 동상을 독도에 세울 수 있게 되면 해경 함정으로 동상을 운반해주겠다고 약속한 것. 이제 해양수산부의 허가만 얻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는데, 허가가 나오지 않아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독도 영유권을 굳히기 위해서는 독도 탐방자들에게 독도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달아오르던 지난해 3월19일 건축가 승효상씨와 함께 처음 독도를 방문한 후, 독도로 올라갈 수 없는 관광객들을 위해 독도 주변에 탐방로를 만들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망양대(望洋臺)를 세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시설과 홍씨 동상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는 2월22일은 일본 시마네현이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이 날을 앞두고 시마네현이 또다시 ‘돌아오라 다케시마여!’란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행사를 벌인다면 한국은 또다시 분노로 달아오를 것이다.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조용히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이 ‘돌아오라 다케시마여!’라고 외칠 때 한국은 민간인이 만든 홍씨 동상을 독도에 세우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모토로 내걸었다. 노무현 정부의 해양수산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독도 영유권을 굳히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길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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