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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구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자존심보다 실리를 좇고, 승리 후엔 방어를 도모하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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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진족 정벌을 앞두고 벌어진 조정의 난상토론. 먼저 중국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중국에 알려 불필요한 마찰 소지를 없애도록 한 세종은 여진을 소탕한 뒤엔 승리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와 영구보존의 대책을 세우게 했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도성까지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오라”(‘세종실록’ 32년 2월11일조, 이하 ‘32/2/11’ 형태로 표기. 윤달은 ‘#’로 표시)는 짤막한 상(上)의 명령. 하명을 받자마자 급히 치달려왔으나 함흥에서 이곳 무악재까지 무려 13일이나 걸렸다. 눈 녹은 벽제관(碧蹄館, 경기도 고양시 벽제역에 설치된 객관) 앞의 벌판은 왜 그리도 질퍽거리던지. 달리던 말도 진흙구렁에서는 도무지 맥을 추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초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받아 떠날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이미 예순여섯이나 된 노구를 이끌고 요동지역의 환란을 대비해 떠나야 하는 내 처지도 처지였지만, 극도로 쇠약해진 상과 고향의 노모를 떠나는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당신도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가 소속해 있는 의정부에 잔치를 크게 내리셨다. 그러고 나서도 아쉬워 다시 동부승지 김흔지를 모화관까지 보내 나를 전송케 하셨다(31/8/3). 그때 무악재에서 바라본 삼각산(북한산) 인수봉은 왜 그리 쓸쓸해 보이던지. 그리고 4개월이 지난 지금 그 푸르던 숲은 간데없고 눈 덮인 산자락에 매서운 바람만 휘몰아친다.

개성을 지나면서 국상(國喪) 소식을 들었다. “들판은 텅 비어 있고” 사람들은 “쇠문짝을 잠근 채 온 거리가 적막하기만” 했다. 개성 연복사를 지날 땐 “대행왕(시호를 올리기 전에 죽은 임금)이 훙서(薨逝)하시던 날 저녁에 10여 명의 후궁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다”(‘문종실록’ 00/2/28)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러나 통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질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근(精勤)으로 고비를 넘기지 않으셨던가. 게다가 상께서는 이제 겨우 쉰다섯으로 나보다 열한 살이나 연소하시지 않으신가.

‘어머니 산’ 무악(毋岳)! 아이를 업고 집을 나가는 어미 모양의 인수봉[負兒岳]을 달래기 위해 이름붙였다는 어머니 산. 나는 그 산 고개에서 새삼 ‘내게 주상은 어떤 분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상은 실상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최고지휘관인 도총제(都摠制)까지 지냈지만 부친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상(像)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살아 계시다면 아마 주상과 같은 분이셨으리라. 그래서 ‘상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나는 믿었고 또 그대로 따랐다.

내가 북쪽의 변방 일에 매달리던 7년 동안 우리 가족을 돌보신 분은 주상이셨다. 노모께서 작은 질병만 앓으셔도 온갖 의약과 음식을 내려주셨고, 또 나를 불러서 만나볼 수 있게 하셨다(18/1/21). 노모에게는 물론이고 아내에게도 혜양(惠養)하시는 은혜가 극진했다.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의 아내가 지금 공주(公州)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니, 어육의 종류는 다소를 논하지 말고 연속해 주어 섭양하게 하라”(21/2#/11)는 충청도 관찰사에게 내린 전지가 그것이다. 심지어 내 형 김종흥(金宗興)으로 하여금 우리 집 가사를 돌볼 수 있도록 황주(黃州)목사에서 남양(南陽)도호부사로 부임지를 바꾸어 발령을 내리기도 하셨다(21/7/21).



상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은 노모까지 감동시켰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어머니는 “너는 빨리 네 직책으로 돌아가라. 네가 능히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18/1/21)고 말씀하셨다.

물론 상은 내가 가족의 병문안만 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다. 편전으로 불러 안부를 묻고, 또 북변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하셨다. 의정부의 대신들과 병조판서 등 관련 부처의 판서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은 국정자문회의가 열리곤 했다. 이 회의에서 나는 ‘파저강(婆猪江) 토벌’ 이후의 야인의 동향과 서북쪽에 새로 설치한 4군의 방어태세를 말씀드리곤 했다. 동북6진의 개척과 사민책(徙民策)의 현황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몸소 현장을 가볼 수 없는 상을 위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놓고 여진족과 달달족(몽골)의 정황을 상세히 설명드렸다. 태종2년(1402) 좌정승 김사형 등이 제작한 이 지도는 비록 압록강의 상류와 두만강의 유로(流路)가 부정확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의 위치, 그리고 각국의 도읍지 등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우리나라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14/02/10)는 주상의 말씀처럼,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은 늘 위태위태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1393년에 중원대륙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만주지역은 여전히 여러 정치세력의 각축장으로 남아 있었다. 만주지역의 여진족인 오랑캐[兀良哈]와 우디캐[兀狄哈], 몽골지방의 몽골족인 타타르부[흝朝部, 동쪽]와 오이라트부[瓦剌部, 서쪽]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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