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자존심보다 실리를 좇고, 승리 후엔 방어를 도모하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입력2006-02-02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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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진족 정벌을 앞두고 벌어진 조정의 난상토론. 먼저 중국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중국에 알려 불필요한 마찰 소지를 없애도록 한 세종은 여진을 소탕한 뒤엔 승리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와 영구보존의 대책을 세우게 했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도성까지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오라”(‘세종실록’ 32년 2월11일조, 이하 ‘32/2/11’ 형태로 표기. 윤달은 ‘#’로 표시)는 짤막한 상(上)의 명령. 하명을 받자마자 급히 치달려왔으나 함흥에서 이곳 무악재까지 무려 13일이나 걸렸다. 눈 녹은 벽제관(碧蹄館, 경기도 고양시 벽제역에 설치된 객관) 앞의 벌판은 왜 그리도 질퍽거리던지. 달리던 말도 진흙구렁에서는 도무지 맥을 추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초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받아 떠날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이미 예순여섯이나 된 노구를 이끌고 요동지역의 환란을 대비해 떠나야 하는 내 처지도 처지였지만, 극도로 쇠약해진 상과 고향의 노모를 떠나는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당신도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가 소속해 있는 의정부에 잔치를 크게 내리셨다. 그러고 나서도 아쉬워 다시 동부승지 김흔지를 모화관까지 보내 나를 전송케 하셨다(31/8/3). 그때 무악재에서 바라본 삼각산(북한산) 인수봉은 왜 그리 쓸쓸해 보이던지. 그리고 4개월이 지난 지금 그 푸르던 숲은 간데없고 눈 덮인 산자락에 매서운 바람만 휘몰아친다.

    개성을 지나면서 국상(國喪) 소식을 들었다. “들판은 텅 비어 있고” 사람들은 “쇠문짝을 잠근 채 온 거리가 적막하기만” 했다. 개성 연복사를 지날 땐 “대행왕(시호를 올리기 전에 죽은 임금)이 훙서(薨逝)하시던 날 저녁에 10여 명의 후궁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다”(‘문종실록’ 00/2/28)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러나 통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질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근(精勤)으로 고비를 넘기지 않으셨던가. 게다가 상께서는 이제 겨우 쉰다섯으로 나보다 열한 살이나 연소하시지 않으신가.

    ‘어머니 산’ 무악(毋岳)! 아이를 업고 집을 나가는 어미 모양의 인수봉[負兒岳]을 달래기 위해 이름붙였다는 어머니 산. 나는 그 산 고개에서 새삼 ‘내게 주상은 어떤 분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상은 실상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최고지휘관인 도총제(都摠制)까지 지냈지만 부친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상(像)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살아 계시다면 아마 주상과 같은 분이셨으리라. 그래서 ‘상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나는 믿었고 또 그대로 따랐다.

    내가 북쪽의 변방 일에 매달리던 7년 동안 우리 가족을 돌보신 분은 주상이셨다. 노모께서 작은 질병만 앓으셔도 온갖 의약과 음식을 내려주셨고, 또 나를 불러서 만나볼 수 있게 하셨다(18/1/21). 노모에게는 물론이고 아내에게도 혜양(惠養)하시는 은혜가 극진했다.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의 아내가 지금 공주(公州)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니, 어육의 종류는 다소를 논하지 말고 연속해 주어 섭양하게 하라”(21/2#/11)는 충청도 관찰사에게 내린 전지가 그것이다. 심지어 내 형 김종흥(金宗興)으로 하여금 우리 집 가사를 돌볼 수 있도록 황주(黃州)목사에서 남양(南陽)도호부사로 부임지를 바꾸어 발령을 내리기도 하셨다(21/7/21).



    상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은 노모까지 감동시켰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어머니는 “너는 빨리 네 직책으로 돌아가라. 네가 능히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18/1/21)고 말씀하셨다.

    물론 상은 내가 가족의 병문안만 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다. 편전으로 불러 안부를 묻고, 또 북변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하셨다. 의정부의 대신들과 병조판서 등 관련 부처의 판서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은 국정자문회의가 열리곤 했다. 이 회의에서 나는 ‘파저강(婆猪江) 토벌’ 이후의 야인의 동향과 서북쪽에 새로 설치한 4군의 방어태세를 말씀드리곤 했다. 동북6진의 개척과 사민책(徙民策)의 현황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몸소 현장을 가볼 수 없는 상을 위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놓고 여진족과 달달족(몽골)의 정황을 상세히 설명드렸다. 태종2년(1402) 좌정승 김사형 등이 제작한 이 지도는 비록 압록강의 상류와 두만강의 유로(流路)가 부정확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의 위치, 그리고 각국의 도읍지 등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우리나라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14/02/10)는 주상의 말씀처럼,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은 늘 위태위태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1393년에 중원대륙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만주지역은 여전히 여러 정치세력의 각축장으로 남아 있었다. 만주지역의 여진족인 오랑캐[兀良哈]와 우디캐[兀狄哈], 몽골지방의 몽골족인 타타르부[흝朝部, 동쪽]와 오이라트부[瓦剌部, 서쪽]가 그것이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조선 후기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여연(閭延) 부근.

    이 가운데 오랑캐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는 다시 강성해진 타타르부의 압력에 밀려 파저강(지금의 훈강) 근처까지 내려와 살게 됐다. 이 때문에 여연(閭延) 지역 주민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중국 쪽으로 불쑥 솟아난 백두산 아래의 여연 지역은 오랑캐 접경지대로 우리 조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종께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띠를 두르듯이 요새를 만들어 ‘울타리 국경’을 만드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유사시에 지형상 좌우의 도움 외에는 배후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자칫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압록강 중상류의 이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 백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 건너편의 땅을 일구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조정에서도 이를 묵인했다. 묵인할 뿐만 아니라 강 건너편 땅에서 거둔 곡식에 대해서는 조세의 절반을 감면하는(14/09/09) 등 ‘장려’하는 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432년(재위 14년) 9월경 평안도 도절제사 문귀(文貴)는 월경(越境) 농사를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여진족이 월경 주민을 노략해서 노비로 삼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15/04/02). 하지만 조정에서는 “백성의 생계” 때문에 금지할 수 없다는 대답을 보냈다(14/09/09). 이런 점에서 그해 겨울 오랑캐의 대대적인 약탈은 예정된 것이었다.

    1432년 12월 초 이만주는 400여 기(騎)의 오랑캐를 이끌고 여연 지역에 침입해 쑥대밭을 만들었다. 아래쪽의 강계절제사 박초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추격해 붙들려가던 사람 26명과 마소 80여 마리를 도로 빼앗아왔다. 하지만 워낙 예상치 못한 기습인데다 그 규모도 커 우리 쪽 피해가 막심했다. 평안도 감사의 치보(馳報·급히 달려가서 알림)를 받은 상께서는 심히 노여워하셨다. 이 지역에 조심스럽게 형성된 균세(均勢)를 깨뜨릴 수 있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그동안 조선의 울타리 구실을 한다는 이유로 생필품을 공급받아왔던 여진족이라는 점에서 상의 배신감과 우려는 더욱 컸다.

    즉시 비상회의가 소집됐다. “야인들이 이번에 침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탈출한 포로의 처분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상의 판단이었다. 그동안 우리 경내에 들어온 탈출 포로가 중국인이면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나라 사람이면 이내 본고장으로 보냈는데, 여진족이 이에 원한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14/12/09).

    상께서는 먼저 중국 황제께 글을 올려 이 사건을 보고[奏文]할 것인지 신료들에게 물었다(의제1. ‘토벌’과 관련해 중국에 보고하는 문제). 이제 중요한 국사에 관해 신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은 주상의 두드러진 정치 방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의심스럽고 어려운[疑難] 일이 있으면 아래로 원로대신과 식견 있는 사람에게 물어 그 물정(物情)이 귀착되는 데로”(14/08/21)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판단의 첫째 조건이라고 보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상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신하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해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명나라에 보고한 다음에 토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영의정 황희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록 우리 군사가 중국 땅까지 뒤쫓아 들어갈지라도 방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사대하는 의리에 해로움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좌의정 맹사성은 “보고하는 것이 편하겠다”고 말했다(14/12/09). 의논이 길어지자 상께서는 다음날로 회의를 연기했다.

    다음날 아침 상께서는 사정전에 납셔서 “어제의 미진했던 일을 의논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서 맹사성은 “황제께 보고하면 야인들이 듣고 두려워 반드시 복종[畏服]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의정 권진도 이번 일이 중국인 포로를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 일에서 발단된 만큼 “명나라에 보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조와 최윤덕은 아예 보고하는 일이나 거병(擧兵)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에 보고해보았자 “금수와 다름없는 오랑캐들이 그 일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국경을 넘어선 거병을 황제가 인준할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허조). 설사 황제의 인준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곳은 행병(行兵)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며, 또 만일 인준을 얻지 못할 경우 저들이 이것을 듣고 더욱 독한 성미를 부릴 것이 뻔한 만큼 “이번 거사는 그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최윤덕).

    그러자 상께서는 “주문 올리는 일이 어렵다면, 오랑캐 경내로 사람을 보내 침입한 이유를 따져 묻는[致問]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이에 대해 권진 등은 지금 여연에서 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고 있는 홍사석이 돌아온 뒤 다시 의논하자고 말했다. 맹사성은 “사람을 보내 문책하다가 도리어 구류당할 수 있지 않으냐”면서 우선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 힘을 모으자고 주장했다. 이조판서 허조 또한 “잠자코 말하지 마옵시고 국경이나 스스로 견고히 하는 것이 좋겠다”며 맹사성의 ‘조용한 외교론’을 지지했다.

    ‘조용한 외교’를 비판하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황희는 “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는 것은 불가”하다면서, 일단 파견한 홍사석이 돌아온 다음 사람을 보내 저들의 잘못을 힐문(詰問)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문(致問)하는 것까지 그만둘 수야 없지 않느냐는 말이었다(14/12/10). 결국 ‘주문’과 ‘치문’에 대한 논의는 21일까지 계속되다가, “빨리 주문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상의 뜻에 따라 새벽녘에야 보고문[奏本]에 인장을 찍을 수 있었다.

    야인 정벌을 위한 제2차 논의는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월11일에 재개됐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이만주 등이 거주하는 파저강 일대에 “무위(武威)를 보이는 것”, 즉 토벌 여부였다(의제2. 토벌 여부를 둘러싼 논쟁). 토벌론은 그 사이 드러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에 힘입어 제기됐다. 그 하나는 여연 침입의 주범이 이만주 일당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점이다. 이만주는 먹칠로 위장한 채 여연을 침입했는데, 아무도 몰라볼 것이라고 여기고 이번 소행이 수풀 지역에 사는 우디캐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디캐의 홀라온 야인들이 노략질해 지나가는 것을 자기들이 뒤쫓아 포위해 조선인 포로 64명을 붙잡아 두고 있는데 이제 추가로 돌려보내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포로들을 통해서 나온 말이나, 결정적으로 여연 침입 후 돌아가다가 만난 중국 사신 장도독의 증언 등에 비추어 조정에서는 이번 소행이 이만주의 행위가 틀림없다고 믿게 됐다. 즉 이만주의 야인 부대가 홀라온 부대를 만났을 때 “겉으로는 포위한 척했으나, 서로 반갑게 포옹하고, 술과 고기를 나눠 먹은 일”이 알려졌다. 또한 이만주의 부대가 조선 포로들을 ‘빼앗아’ 돌려줄 때 자기 공을 자랑하고 상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본국의 길 가는 사람을 만나 급하게 교부(交付)하고는 스스로 의혹해 도망해 피한 것”(15/02/15)도 의심을 샀다.

    상황이 이쯤 되자 상께서는 허조의 ‘조용한 외교론’을 비판하셨다. “야인들이 우리 지경(地境)에 가까이 살면서 이유 없이 변경을 침범해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가는 데도, 나라에서 가만히 있다면 후일에 자주 침범하는 근심을 열 것”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경들의 논의가 안정을 지키는 도리에는 합당할지 모르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군사를 정돈하고 베풀어서 무위를 보여야” 한다는 주상의 생각을 허조는 비판하고 나섰다. “야인의 종류가 많아서 지금 비록 토벌할지라도 반드시 뒤에 우리나라 누대의 근심이 될 것”이며, 따라서 “아직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며, 스스로 경계를 굳게 지켜서 침범하거든 방어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황희는 이제는 “군대를 훈련해 마땅히 무위를 보여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15/01/11).

    결국 이 문제를 결정하는 데는 최윤덕의 태도가 중요하게 됐다. ‘북정(北征)’을 담당할 최고 지휘관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아무리 주상의 뜻이 강하더라도 추진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께서는 1월19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과 도진무 김효성을 불러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오랑캐를 방어하는 방도에 예전에도 좋은 계책이 없었다. 삼대(三代)의 제왕들은 오면 어루만지고, 가면 쫓지 아니해, 다만 횡포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다. (…) 옛사람이 이와 같이 한 까닭은 나라의 크고 작음이 없이 벌[蜂]에 독이 있는 것과 같다. (…) 그러나 파저강의 도적은 이와 다르다. 지난 임인년(壬寅年, 1422년) 사이에 우리 여연을 침노했고, 그 뒤에 홀라온에게 쫓긴 바가 돼 그 소굴을 잃고는, 그 가족을 이끌고 와서 강가에 살기를 애걸하기에, 나라에서 가엾이 여겨 우리나라에 붙어 살 것을 허락했다. 보호한 은혜가 적지 아니한데, 지금 은덕을 저버리고 무고히 쳐들어와서 평민을 죽이고 잡아갔으니, 궁흉극악(窮凶極惡)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만약 정토(征討)하지 아니한다면 뒤에 뉘우치고 깨달음이 없어, 해마다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군사의 진퇴는 경의 뜻대로 하라”

    대마도 토벌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대마도 토벌에 대해 칠 수 없다는 논의가 있었고, 상 자신도 “그 일이 비록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태종께서 대의로써 결단하고 토벌한 결과 “적들이 마침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윤덕은 “대마도의 일은 100년 동안의 준비였고, 오늘날의 일은 겨우 10년 동안의 준비인데” 좀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상은 “경의 말이 옳으나, 다만 그 내침한 도적의 실상만 살펴서 알게 된다면야 군마를 정리해 밤낮으로 행군해 한두 마을을 쳐부수어도 족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비로소 최윤덕이 마음을 바꾸었다. “지금은 땅이 얼고 물이 흘러넘치니 4, 5월 봄에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서 행군하는 것이 가하옵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전쟁은 “때와 운수로 인해 서로 이기고 패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상께서는 “경이 말한 바를 내가 어찌 듣지 않겠는가. 군사의 진퇴에 이르러서는 경의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말씀하셨다(15/01/19).

    늘 그러셨듯이, 상께서는 이 문제도 ‘숙의(熟議)’와 ‘전장(專掌)’이라는 방식으로 결정하셨다. 찬반토론을 거쳐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미리 짚어본 다음,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전적으로 주장[專掌]”하게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천·장영실에게 천문과 기술을 맡길 때나, 박연에게 “오로지 음악을 맡아 주관하게[專掌樂事]”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연이 그 일을 맡은 다음엔 “앉아서나 누워서나 매양 손을 가슴 밑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律呂) 소리를 짓고 한 지 10여 년 만에 비로소 (음악에 관한 일을) 이룩”(이긍익,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고사본말)한 것도 이런 방식에 힘입은 것이었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1402년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위치가 나타나 있다.

    야인 정벌을 위한 3차 논의는 다음달인 2월15일에 열렸다. 이번 의제는 파저강 야인 토벌의 구체적인 전략 수립이었다(의제3. 토벌의 방법, 시기 등에 관한 논쟁). 대체로 먼저 성토하고 난 다음 토벌하자는 얘기가 많았다. 즉 저들의 “죄를 성토하고, 납치된 사람과 가축을 다 돌려보내게 하되, 만약 따르지 않으면 토벌해야 한다”(황희)는 주장이나, 성토를 하되 “1, 2년을 기다려서 저들의 무비(武備)가 느슨해질 때 토벌하자”(이맹균)는 주장이 그것이다. “화친하기를 허락지 말고, 삼가고 굳게 지켜서 저들로 하여금 자복하게 하되, 만약 횡포하게 굴거든 급히 공격하자”(맹사성)는 기습론도 있었다(15/02/15).

    이 날 회의는 “비밀리”에 열렸는데, 의정부와 육조는 물론이고 삼군도진무 소속의 모든 담당자가 소견을 말할 기회를 가졌다. 즉 영의정 황희를 비롯해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권진, 이조판서 허조 등 참석자 20여 명 모두 순서대로 “계책을 각각 진술”했다. 이 때문에 회의 시간은 다소 길어졌지만, 토벌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거의 대부분 드러났다.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토론의 예방적 효과’ 때문인지 상께서는 중요한 문제일수록 꼭 숙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곤 했다.

    토벌시기에 대해 먼저 황희와 허조는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겨울 공격설’을 주장했다. 4월에는 큰 비가 와서 압록강을 건너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최윤덕은 큰 비는 6~7월에 내리며, 공격하려면 마땅히 4월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상께서는 “4월에 풀이 무성할 때 군사를 내어 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최윤덕의 의견을 채택하셨다(15/2/28). 토론하다가 좋은 의견이 나오면 그것에 힘을 실어서 실행하는 당신 특유의 회의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상께서는 병력규모, 강을 건너는 방법, 진법의 문제, 그리고 지휘자의 선발 등 제반 사항을 아울러 “숙의해 아뢰라[熟議以啓]”(15/2/26)고 지시하셨다.

    온천행 속임수

    “온정(溫井)엘 좀 다녀와야겠다.” 모두들 의아해했다. 야인토벌을 결정하고 이미 종묘와 사직에 고하기까지 한 이 시점에 난데없이 온천엘 가시겠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달 27일(2월27일) 이미 온정(충남 온양온천) 행차에 따라갈 군사와 재상의 명단까지 작성해둔 상태였다. 왕세자 이하 종친들과, 의정부·육조·대간 등에서 각각 한 사람씩, 그리고 도진무·절제사 등을 데려가기로 하셨다. 중궁(中宮, 왕비)에게는 연(輦·임금이 타는 가마의 한 가지)이, 숙의(淑儀, 종2품의 후궁)에게는 교자(轎子)가, 소용(昭容, 정3품의 후궁)과 숙용(淑容, 정3품의 후궁) 두 후궁에게는 말이 각각 제공됐다. 그야말로 왕실 전체가 한 달 동안 이동하는 셈이었다(15/3/25).

    이 행차에 대한 반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前) 고사(庫使) 박흔은 “지금 이미 장수를 명하고 군사를 일으켜 파저강을 치게 하셨는데, 온천에 행차하시어 도읍을 비우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상언했다(15/3/24). 사헌부에서는 그보다 먼저 “한 달 동안 나라의 도읍을 비우는 것은 진실로 염려되는” 일이라면서, 적어도 세자만이라도 도성에 머물러 “군사를 어루만지고 나라를 감독”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간했다. 하지만 “아뢴 바를 따를 수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15/3/6).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그 사이 파저강 토벌을 위한 계책들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평안도 사람 중에서 스스로 출정해 공을 세울 경우 한량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향리와 역졸에게는 부역을 면제하며, 과노는 천인을 면한다는 유시(諭示)가 내려갔다(15/3/18). 이만주의 거주지에 전 소윤 박호문을 보내 동태를 알아보도록 했다. 박호문은 이만주와 타납도 등의 여진추장들이 점차 긴장을 풀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또한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의 굽고 곧은 것과 부락의 많고 적음”까지 파악해 주상께 보고드렸다(15/3/21). 중국 황제로부터도 “각각 지방을 지키고 서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만일 혹 고치지 않거든, 왕이 마땅히 기회를 보아 처치”하라는 칙서가 내려왔다(15/3/22).

    4월20일 환궁길에 오르실 때까지 당신이 하신 일은 그저 백성을 돌보거나 수차(水車)를 실험하는 등 ‘북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상께서는 온수현 백성에게 벼와 콩을 내리셨다. 대가가 머무르면서 끼칠 민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가를 따라온 사람으로서 밭의 벼를 밟아 손해를 끼친 자는 모두 행궁찰방에 맡겨서 죄를 다스리도록”(15/4/9) 했기 때문에 함부로 민폐를 끼치는 자는 없었다.

    하루는 아산현에 사는 할머니가 마떡 한 동이를 올리자 상께서는 내정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면포 두 필 등을 하사하셨다. 또 하루는 행궁 근처에 수차를 설치하고 실험해보기도 하셨다. 나와 안숭선이 80여 명을 동원해 하루 종일 수차를 돌려보았지만 길어올리는 양이 워낙 적은 데다 그 물도 금방 새버렸다. 호종하는 여러 재상과 의논한 끝에 결국 스스로 도는 수차 외에는 모두 철거할 것을 지시하셨다.

    기습공격으로 전멸시키다

    마지막으로 환궁한 뒤에 온정의 상탕(上湯)을 제외한 나머지 탕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충청감사에게 지시하셨다. 월대 밑의 더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도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모든 남녀가 다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15/4/16). 돌아오는 길에 헌릉(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릉)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흥인지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는데 “좌우 길가에 부교(浮橋)를 메고 관광하는 자가 만명으로 추산됐다.”(15/4/23).

    많은 사람에겐 이번 행차가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고도로 계산된 작전이었다. 이미 파저강의 여진족들은 여연 침범 사건 때문에 우리의 보복이 언제 있을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파저강 일대를 돌아본 박호문이 보고한 것처럼 “모두 어린애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서 우리나라가 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는”(15/2/28)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최윤덕이 만전을 기한다 하더라도 그 공격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안심하고 그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뜻하지 않은 때를 틈타 공격”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조정이 해야 할 급선무였다. 귀화한 여진족 중에는 이만주의 “간첩”도 없지 않았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상께서는 대규모 온천행이라는 속임수를 쓰셨던 것이다.

    환궁한 지 이틀이 지나자(25일) 파저강의 승첩 보고가 들어왔다. 평안감사 이숙치가 이순몽의 승전보를 전해온 것이다(15/4/25). 다음날 다시 이숙치는 최윤덕과 홍사석의 승전보를 보내왔다. 다음달 5일에 최윤덕이 “야인평정을 하례하는 전”에서 자세히 드러난 것처럼, 최윤덕이 지휘하는 총 1만4962명의 토벌군은 1433년(재위 15년) 4월19일 새벽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기습했다. 상의 뜻에 따라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해간 것이다.

    최윤덕에 따르면, “전교의 명을 받들어 전군을 절제하는 권한을 잡고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쳐들어가자 적들은 “강물이 구렁에 몰려드는 듯, 돌이 산봉우리에서 구르는 듯, 빈 알[卵]처럼 스스로 깨어졌다”(15/5/5). 전투는 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동가강과 혼하(渾河) 일대를 소탕하는 9일간의 전투 끝에 183명의 여진족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 소 110두, 말 67필 및 각종 무기도 노획했다(아군 4명 사망).

    “승리했으나 두렵다”

    속속 승전보가 들어오는 사이, 상께서는 어전회의를 소집하셨다. 전승 후의 후속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서정(西征)한 까닭으로 (인근의) 동맹가첩목아도 의심을 품고 있으니, 술과 음식을 주어 안심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근자에 최윤덕이 이만주에게 술과 음식을 주고 곧 토벌했으니, 지금 음식을 주면 도리어 저들의 의심을 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것이었다. 황희, 맹사성 등은 모두 “저들이 처음에는 의심할지라도 나중에는 우리나라의 신의를 알고 편히 살 것이니, 사람을 시켜 효유(曉諭·알아듣도록 타이름)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상께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매양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군사의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했다. 내가 어찌 큰일을 좋아하고 공을 이루기를 즐겨서 야인을 정벌했겠느냐. 적이 먼저 우리에게 해를 끼치므로 할 수 없이 거행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크게 승리했으니 진실로 기쁜 일이나, 역시 두렵다. 지금은 비록 성공했을지라도 어떻게 이 공을 보전해 영구히 후환을 없게 할 것인가”(15/5/3).

    다들 이 말씀을 당신의 겸사로만 보고 가볍게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공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공을 영구히 보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처럼, 그 후속대책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따라 일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전투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추격전’과 후속조치였다. 물론 본 전투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전과와 전리품은 대부분 추격전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곤 했다. 따라서 뛰어난 장수라면 적의 ‘작전상 후퇴’와 ‘진정한 패퇴’를 구별하고, 추격전과 연계해 후속조치를 신속히 취하는 능력을 아울러 갖춰야만 한다.

    결국 상의 생각은 한 달이 지난 뒤에 드러났다. “지금 토벌한 뒤에 야인들이 들떠서 적변(賊變)을 추측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방어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상은 또한 북변(北邊) 지역의 농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대책을 찾고 계셨다. 모두들 “강계·자성·경원 등 요해지에 군사를 더 파견해 굳게 지키게 할 것”을 아뢰었다(15/6/6).

    그러나 상과 내 생각은 달랐다. 군사를 더 파견한다고 해서 그 넓은 지역의 적변을 다 막아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해법은 한 가지. 그 지역에 사람들이 농사 짓고 살면서 유사시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르는 농병(農兵) 병행체제의 정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 지역으로 이주해 살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해낼 것인가. 삭풍이 몰아치고 적변이 끊이지 않는 북방의 변경지역에서 일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그 어려운 곳으로 이주하게 하는 난제를 누가 맡을 것인가.

    상의 그 고민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께서 즉위하던 그 해의 사헌부 암행감찰[行臺]로부터 시작해 1433년(재위 15년) 승정원 좌대언 시절 주상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온 내가 아닌가. 당신이 병환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에는 내게 의정부 등 요처를 다니며 대신 말을 전하고 받아오게 하셨으며, 주요한 인사 문제를 결정하실 때도 꼭 내 의견을 묻곤 하셨다. ‘북정(北征)’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다. 상께서 내게 “최윤덕을 아는가”라고 물으셨다. 나는 “사람됨이 비록 학문의 실력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종서를 함길도로 보내라”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대동여지도 중 육진(六鎭) 부근.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최윤덕은 아버지 최운해가 국경 수비로 나가 있던 탓에 고향인 합포 인근의 양수척(楊水尺, 그릇 만드는 천인)의 집에서 자랐다. 따라서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뛰어났고, 양수척에게 배워 특히 굳은 활을 잘 쏘았다. 산속에서 마소를 먹이다가 덤벼드는 호랑이를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일 정도였다.

    그런데 최윤덕을 훌륭한 장수로 만든 것은 사실상 서미성(서거정의 아버지)이었다. 마침 서미성이 경상남도 합포에 수령으로 와 있을 때 최윤덕을 만나본 다음 시험을 해보았다. 최윤덕이 활을 쏘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서미성은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다”면서 활쏘는 법과 말달리는 법 등을 가르쳤다(‘연려실기술’ 권3, 301).

    그 뒤 최윤덕은 음관(蔭官)으로 기용돼 부친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419년에는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 정벌을 추진했고, 북방이 혼란스러워지자 동북면의 군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최윤덕은 이번 ‘북정’의 공적으로 정승 자리를 추대받자 극구 사양했다. “무신의 집에서 나고 자라서 손·오(孫吳)의 병서를 간략히 익혔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의정(議政)의 직책은 국사를 경위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것으로써 자신과 같은 “무신이 헤아릴[擬議]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북정’의 공훈에 대해서도 겸양했다. 즉 “성상의 명을 받들어 야인을 토벌하매, 적도들이 멀리서 관망하다가 흩어져 달아났는데, 이는 모두가 높으신 성덕(聖德)과 빛나는 신위(神威)의 소치”일 뿐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외적을 막아 북방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이 마땅히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진심진력(盡心盡力)할 것”이니(16/02/05), 무관으로서 국방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처음에 상께서 파저강 토벌의 공로로 최윤덕에게 무슨 상을 줄 것인가 물었을 때, 허조는 영중추(領中樞)를 가설해 포상하자고 말했다. 중추부 소속의 정1품의 무임소 대신직으로 예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맹사성은 자신이 맡고 있는 관직, 즉 좌의정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상께서는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라 일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면서 “최윤덕은 가히 영의정도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영의정은 그 임무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만 가지고 임명할 수는 없다”(14/6/9)고 말씀하셨다.

    상께서는 내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 대신과 다시 의논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두 “최윤덕은 영의정을 삼을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우의정이었다. 현재의 우의정 “권진의 벼슬을 대신하게 하라.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때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요. 최윤덕은 비록 배우지 않아서 말을 하는 데[建白] 어두우나,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심봉공하기 때문에 족히 그 지위를 보전할 것”이라는 말씀이셨다(15/5/16).

    상에 따르면 “장상(將相)의 직임이란 의뢰하는 바 가볍지 않은 것이니, 국가에 근심이 없으면 정치를 바로잡아 정화(政化)를 널리 펴고, 변경에 급변이 있으면 병력을 동원해 무위를 빛내야 하나니, 내외의 권한을 온전히 맡게 하는” 무거운 직책이었다. 따라서 “가정에서 훌륭한 장수의 기풍을 전해왔고, 대대로 충의롭고 정고(貞固)한 절의를 지켜왔으며, 밖으로 나가 번병(藩屛)을 진압하매 위명(威名)이 크게 드러난”(16/02/05) 최윤덕이야말로 정승으로서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최윤덕의 기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하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해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지, 천출(賤出)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다.

    “김종서를 함길도로 보내라”(15/12/ 09). 나는 차라리 기뻤다. 겨울바람이 매섭긴 했지만, 조정의 알 수 없는 음험한 세계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비록 “오늘날의 정치는 지난 옛날이나 앞으로 오는 세상에 없으리라”(12/7/28)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궁궐 안의 끊임없는 질시와 반목, 그리고 사람을 항상 겹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나는 싫었다.

    백성을 이주시켜 우리 땅으로 삼다

    상께서는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하시기 전날 나를 부르셨다. 내게 “북방의 책임”을 맡기는 이유를 일러주시기 위함이었다.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찍이 측근의 관직에 있어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을 만한 까닭으로, 일찍이 명해 함길도 도관찰사로 삼는다”(18/01/21).

    물론 나도 당시에는 장차 7년간이나 함길도에 머물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동북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백성을 이주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두만강 근처에 있는 “경원을 (지금의 청진 부근의) 용성으로 물리면 북방의 방어계책이 편리하고 백성의 폐단도 없어지리라”(19/08/06)는 조정의 다수 신료의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내가 “오랫동안 북방에 나와서 야인들의 사정을 익히 보니, 그들은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필요하면 서로 싸우고 해쳐서 원수와 다름이 없고, (…) 혹은 이(利)로써 맺었다 하더라도, 이가 다해지면 또 그 독기를 마음대로 뿜는”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밖으로는 회유(懷柔)의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비어(備禦)하는” ‘은위(恩威) 병용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지금 지키기 어렵고 백성이 힘들다고 해서 동북쪽의 땅을 저들에게 양보하면 저들은 저절로 강해지고 우리의 힘이 줄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물론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19/08/06)는 전하의 말씀도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내가 볼 때 그러한 상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남하하려는 여진족의 움직임이었다. 아직까지는 사분오열된 상태로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지만, 누군가 이들을 통합한다면 명나라는 물론이고, 우리 조선의 안전도 결코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영토를 내준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몸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2단계로 이뤄지는 사민(徙民)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남쪽에서 이주해오는 백성의 적응을 돕기 위해 함길도 중앙 아래의 주민을 북부지역으로 옮기고(1단계), 삼남지역 주민을 그곳으로 이주시키는(2단계) 작업은 곳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남쪽 지역에서는 강제 이주에 반대해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자와 자살하는 자(24/01/10)도 있었다. 함길도 이남 지역에서는 아전의 농간이 빈번했다. 지방의 호족들에게 뇌물을 받고 부호(富戶)는 숨겨 빠뜨리고 잔호(殘戶)만을 뽑아 올리는 일이 그것이다(17/07/26).

    물론 정부의 시책을 이용해 신분의 변화를 꾀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예컨대 자진해 사민에 응모하는 향리나 천민들에게 신역(身役)을 면제한다든가, 토관직을 제수하는 일(15/11/19)은 삼남지역 하류민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제를 서울에서 벼슬하게 하되 새로 설치된 경재소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20/03/03)는 함길도 이남 주민들에게 환영받았다.

    이 때문에 나는 “성상께서는 빨리 이루는 것을 구하시지 마시옵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오며, 작은 폐단을 계교하지 마시옵고 작은 근심을 염려하시지 말아서, 세월을 쌓아 오래도록 기다리시면 뜬말[浮言]이 저절로 없어지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라고 말씀드리기도 했다. 결국 “민폐가 자연히 제거되고 백성의 원망이 자연히 근절돼, 백성의 먹을 것이 자연히 넉넉해지고 병력이 자연히 강해져서, 도둑이 자연히 굴복해 새 읍이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19/08/06)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모함과 비방

    실제로 서북 지역과 달리 동북 6진 지역의 백성은 점차 정착했다. 주민의 계속적인 도망으로 나중에는(세조 때) 폐지하게 되는 서북 지역과 달리, 동북 지역은 “온성의 동쪽 입암에서 시작해 두만강변을 거슬러 올라가서 종성을 지나 회령부의 앞들에 이르러 그치는 무릇 200여 리”에 해당하는 행성을 중심으로 안돈(安頓)된 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

    나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북변의 삭풍도, 여진족의 침입도, 백성의 반대도 아니었다. 바로 내가 믿었던 박호문(朴好問), 그 자의 모함이야말로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본래 타협할 줄 모르는 내 성격 때문에 미움 받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박호문 그 자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본래 활을 잘 쏘고 또 총명했으므로 내가 천거해 회령절제사가 됐고(22/7/17), 파저강 토벌 당시에는 적진을 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주상 앞에서 나를 헐뜯은 것이다.

    “김종서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장수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잘 못해 그저 야인들에게 (병사의) 위엄만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가 어떻게 능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속시킬 수 있겠습니까”(22/01/19).

    이 정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주상께서 이미 나를 잘 아시고, 공연한 그의 치기를 우습게 넘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말만 듣고 나를 탄핵하려던 사헌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은 10여 가지 죄목을 들어 나를 제거하려 했다. 그 죄목이란 나의 애기(愛妓)가 여진족에게서 받은 뇌물을 내가 다시 서울에 보냈다는 것과, 내 마음대로 전지(田地)를 주고 빼앗는다는 것과, 모친상을 당한 후 기복(起復)해서 진(鎭)으로 돌아갈 때에 안변(安邊)에서 기생을 데리고 경성(鏡城)으로 갔다는 것 등이었다(22/1/17). 한마디로 적의 뇌물을 받고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기생과 놀아난 ‘국가’와 ‘부모’께 죄를 지은 몹쓸 인간이라는 말이었다. 특히 전자는 “죽이기를 청해도” 할말이 없는 무서운 모함이었다.

    나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즉시 주상께 “눈물로써 아뢰는” 편지를 올렸다. “예부터 일을 이룩하는 신하는 비방과 헐뜯음을 많이 당하는데, 이치와 형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니” 굳이 혐의할 것은 없겠으나, “다만 수천리 밖에 있으므로 구중궁궐과 멀리 떨어져 있사와 변명할 길이” 없어 “박절한 일을 슬피 울면서 간절하게” 말씀드릴 뿐인데, “학식이 있는 자들이 자기의 사정(私情)을 억누르지 못하고 남 몰래 비방하고 헐뜯는” 일은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세종 때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의 동상.

    이 편지를 받아 본 상께서는 옆에 있는 도승지 김돈에게 “김종서가 어찌해 이런 말을 하는가. 경도 들은 바가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김돈은 사헌부에서 탄핵하려는 “김종서의 불법한 일”에 대해 말씀드린 다음 “그러하오나 종서는 유학자이옵니다”라면서 나를 변호하는 말을 했다. 상께서는 “그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김종서의 공은 크다. 그를 움직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상께서는 “그에게 북변의 일을 묻고자 인견했더니 박호문은 도리어 김종서를 참소하고 해치려” 했다고 그의 “경박함”을 나무라셨다. 그리고 이 문제의 발단이 여진족에 대한 “신조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다. 즉 “김종서는 위력으로 범찰을 제압하려고 하고, 박호문은 범찰을 회유하려고 하는”(22/01/19) 데서 생긴 갈등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조정의 조사가 시작되고

    그러나 살을 에듯이 흐느끼는 통절(痛切)한 호소[膚受之]나, 물이 스며들듯이 서서히, 그리고 깊이 믿도록 하는 참언(讒言)[浸潤之?]은 때로 성왕도 흔들리게 만드는 것인가(‘논어’ 안연). 박호문의 첫 번째 헐뜯음을 비판하시면서도 상께서는 “내가 묻는 바에 따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죄 주지 않겠다”(22/01/19) 하셨는데, 두 번째 참소에는 흔들리시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잘못도 있었다. 그 전년 11월에 박호문이 “회령의 백성이 입거한 이래로 자애의 정치를 입지 못해 정군(正軍)으로서 도망한 자가 152명”이라고 왜곡 보고했을 때, 분명히 잘잘못을 가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상께서 지적하신 대로 “입거(入居)한 백성이 겨우 500호인데, 불과 7년 사이에 정군 중에서 도망한 자가 150여 명이라면 남아 있는 자가 얼마일지”(21/11/12)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나는 승정원에 글을 올려서 박호문과 함께 이징옥(李澄玉)의 잘못을 양비양시론의 시각에서 보고했다. 즉 도망친 정군이 경흥에서 20호, 종성에서 12호, 회령에서 152호로 회령이 제일 많은데, 그 이유는 “이징옥은 방수(防守)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달래고 기르는[撫育] 데는 잘하지 못하고, 박호문은 영선(營繕)하는 데 급해 건축한 관청이 장려하게 만드는 데” 공력을 들이다 보니, 새로 옮겨온 백성이 견디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박호문에게 백성에게 토목 역사보다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즉시 경력(經歷) 이사증(李師曾)을 보내어 장려하고 긴급하지 않은 영청(營廳)은 헐어버리게” 했다. 나는 보고서에다 “두 사람은 각기 장점이 있으니, 이징옥은 방수를 잘해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며, 박호문은 이적(夷狄)을 잘 대접해 오랑캐들이 은혜를 생각해, 모두 변경에 이롭다”고 썼다(21/12/10).

    그런데 박호문은 그런 내게 원한을 품고 계속해서 참소한 듯하다. 앞의 첫 번째 무고사건이 있은 지 두 달 만에 조정의 조사 명령이 내려왔다. 정군 외에 도망한 일반 군민의 숫자를 조사해 올리라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회령에서 도망한 자가 626명이요, 경원이 585명, 종성이 255명, 경흥이 186명이었다.

    문제는 “4진의 백성이 서로 이사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하는 상의 의심이었다. 당신의 재위기간에 대략 3200호의 2만6000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돼 있는데, 상당수가 부풀려진 숫자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성 또한 깊은 지역에 있는데도 그 백성 중에는 이사하는 자가 없는데, 유독 4진 백성만이 이처럼 많이 유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관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알았더라도 죄책을 면해 은폐하고 보고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수년이 못돼 1650여 명이 감손된 연고를 다시 상세하게 조사해 계달하라”는(22/3/15) 호된 지시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무능력’에 ‘기만’까지 한 관리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전하께 정말 서운했던 것은 다른 데 있다. 노역과 방수의 일이 힘들어서 달아나는 자들을 막지 못한 내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나, 나 몰래 함길도 절제사를 바꾸려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당신 말처럼 나는 “유신(儒臣)으로서 장수로는 적합지 않을” 뿐 아니라, “돌아오니 머리가 희어졌는데, 또다시 변방에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임무·衛戍) 서러 가는”(19/8/6) 일도 이젠 지겨워진 나이가 됐다.

    후임자 천거케 해 자존심 세워주다

    하지만 “지금 오도리의 동창과 범찰을 위엄으로써 대했고, 어진 마음을 베풀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야인들로 하여금 온 종류가 도망가게 했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며 반드시 중국으로부터도 비웃음을 받게 됐다”는 말씀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렇다면 박호문이 한 것처럼 관청을 장려하게 지어서 저들을 초청해 술자리를 베푸는 식으로 달래야 한단 말인가. ‘오랑캐는 은혜와 위력을 병용할 때만 복속해 온다’는 그동안의 말은 어디로 흘리셨단 말인가.

    그나마 황보인을 보내서 내 사정 얘기를 적어 올리게 하신 것과, 내 후임자를 내가 천거케 해 자존심을 지켜주시고, 업무의 연속성을 살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박호문의 모함을 겪으면서 세상을 더욱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정치적 결단이 최선의 의도로 단행되고 그 방향을 잘 인지했다 할지라도 항상 계산된 결과와는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귀함과 비열함, 무관심과 필생을 건 적극성, 성실성과 배반을 접한 후 나는 정치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꿈이었을까. 내가 함길도를 돌아다닐 때였다. 힘들게 산마루를 타고 도는데, 문득 정상 근처에서 평원이 펼쳐졌다. 가파른 산길과 까마득한 절벽 사이의 아슬아슬함을 지나 새 땅[新地]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럽게 펼쳐진 평원의 아늑함이란…. 백두산 한가운데서 만난 예상치 않은 평지의 감미로움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바위투성이의 내리막길과 천길 낭떠러지의 산길로 이어졌다. 길주에 사는 통역관에 따르면 그곳은 “토지가 비옥해, 30~40호의 주민이 모두 곡식을 쌓고 부유하게” 산다고 했다(15/4/29).

    상께서 떠나신 지금, 당신의 치세 32년을 돌아다보면, 아마도 우리에겐 그 백두산의 평원과도 같았던 것 같다. 태종시대까지의 그 가파른 산길과 아슬아슬한 절벽 길, 그리고 이제 당신이 돌아가신 다음의 이 살벌한 ‘정치벌판’과는 사뭇 다른, 그야말로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상왕 치하의 ‘강상인 옥사(獄事)’를 제외하면 당신의 치세 동안 거의 모든 인재가 나라의 보석처럼 다뤄졌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朴賢謀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 박사(정치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저서 : ‘정치가 정조’


    그런데 그 인물들이 이제는 마치 권력의 화신인 양 서로 불신하고 대립하고 있다. 수양과 안평대군은 당신의 치세에서 유능한 일꾼으로, 그리고 탁월한 예인(藝人)으로 경쟁적인 친구였지만 동시에 서로 존중하는 형제였다. 하지만 당신이 서거하자 둘 사이는 정적(政敵) 관계를 넘어서 하늘 아래 함께 설 수 없는 관계로까지 악화되고 있다. 좋은 울타리 안에서만 진정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말인가. 아! 앞으로 닥칠 일이 나는 심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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