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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 강덕지 과장의 범죄심리학 노트

사람들 속의 섬, 경계성 인격장애 외면하면 ‘걸어다니는 살인무기’

  • 강덕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죄심리과장

사람들 속의 섬, 경계성 인격장애 외면하면 ‘걸어다니는 살인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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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면 어른이 돼서도 큰 잘못을 저지르진 않는다. 술에 만취해도 집에 들어가려면 부모의 얼굴을 봐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술 마신 티를 내겠는가.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된다. 이처럼 외적으로 막혀 있는 듯 해도 내적으로는 열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이런 정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구 사회를 좇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 방엔 TV, 전화기, 컴퓨터 등 없는 것이 없다. TV를 보려고 굳이 거실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 휴대전화로 통화하기 때문에 자녀가 친구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부모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친구 집에 전화를 걸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거쳐야 했다. 이런 것도 모두 사회성을 길러주는 요인이다.

H씨 때문에 애꿎은 세 명의 여성이 희생됐다. H의 죄만 물으면 끝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H는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켜 범죄자가 됐을 뿐이다. 규범적으로, 도의적으로 보면 H의 어머니도 범죄자다. 가정을 소홀히 해 아들이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고, 그 결과 세 명의 목숨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H를 사회와 격리한다고 상황이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신병은 아니다. 일종의 성격장애인데, 어느 대학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학생 중 상당수에게서 이런 성격장애 징후가 보이며,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 없이 불을 지르는 방화범의 상당수도 경계성 인격장애자다. 무서운 것은 이들이 ‘정신병자’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수용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사고’를 칠 때까지는 누구도 이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또 다른 H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전엔 부모가 이혼하면 서로 아이들을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떠맡긴다. 아이들을 맡아도 위탁시설에 보내거나 거의 방치하기 때문에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 아이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심한 경우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거나, 가슴속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물론 H의 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위급할 때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범죄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범죄자가 되기까지 수많은 요인이 축적되지만, 그 경계선을 넘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전북 익산에서 네 명을 살해한 B의 사례가 그랬다.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얼굴을 힐끔 쳐다보니 잔뜩 찌푸린 인상이 한눈에도 불만으로 가득 차 보였다. 나를 쳐다본 B는 이렇게 입을 뗐다.

“뭐야?”

-(공손하게) 범죄분석을 하는 국과수 직원입니다.

“딱 5분만 줄 테니, 5분 안에 끝내고 돌아가. 나 오늘 굉장히 피곤하다.”

-나도 5분만 있다가 갈 테니 당신도 가시오.

순간 B는 기분 나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떨구며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됐습니다. 할 얘기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냥 돌아가세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당신의 그 말, ‘밥 한 그릇이면 됐을 것’이란 한마디로 당신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스님의 선문답처럼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밥 한 그릇을 먹고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고 내게 고백한 셈이었다. 나는 그 뜻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무기력의 누적, 그리고 자포자기

B가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원인(遠因)은 중학교 때 당한 교통사고였다. 사고로 왼팔을 전혀 못 쓰게 되자 그는 희망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열등감을 갖게 됐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됐다. 무기력이 누적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그가 그랬다. 술 마시고, 툭하면 주변 사람들과 싸우면서 그는 서서히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가족마저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자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고, 급기야 친구와 함께 강도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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