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日 건국신, 백제·신라에서 건너온 흔적 확인”

  • 마유미 쓰네타다 일본 야사카 신사 궁사

    입력2006-02-16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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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일본에서는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여신과 그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烏尊)’를 최고의 신으로 꼽는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현재 일본 교토(京都)의 대표적 신사인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에 모셔져 있다.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신(神)’이다. 하지만 일본 사학계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일본 최고의 신관(神官)으로 꼽히는 야사카 신사의 궁사(宮司) 마유미 쓰네타다(眞弓常忠)씨가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신라신으로 인정하고 한국 내 유적지를 직접 돌아본 것은 의미가 크다. 마유미씨는 유명한 신학대학인 고가칸(皇學館)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신학자로서도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한국 유적지를 돌아보고 한국외대 홍윤기 교수(일본사)에게 보내온 답사기를 정리해 소개한다.]

    서기 720년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일본서기’의 신의시대 편(神代·上) 제8단의 역사기록에 이런 글이 나온다(괄호 안은 옮긴이 해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그의 아들인 ‘이타케루’신을 거느리고 ‘다카마가하라(高天原·하늘나라 벌판)’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곳은 신라국의 ‘소시모리(牛頭·소의 머리)’였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소시모리에서 다시 바다(동해)를 건너 왜나라 ‘이즈모국(出雲國·현재 일본 시마네현의 바닷가 지역)’으로 왔다. 이즈모국에서 스사노오노미코토는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야마타노오로치)을 ‘가라사비(韓鋤·한국 삽)’로 쳐서 물리쳤다.”

    여기서 신라국 소시모리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총독부는 강원도 춘천을 스사노오노미코토의 강림지(降臨地)인 소시모리로 정하고, 그곳에 신사를 세우려 했으나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실현하지 못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춘천이 소시모리이자, ‘기원신(祇園神)’인 ‘우두천왕(牛頭天王)’의 연고지라는 학설이 대세를 이룬다. 또 ‘소도(蘇塗)’는 솟대라는 기둥을 세워 제사를 지낸 터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소’는 고대 한국어의 ‘소우(牛)자’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필자는 2004년 강원도 춘천을 찾았다. 이 지역은 6~7세기경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의 영토로 복속됐다. 춘천에는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부르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가 자그마한 만두를 올려놓은 듯한 분구형인데,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산(牛頭山)’ 또는 ‘우수산(牛首山)’으로 불린다고 한다.

    춘천에 ‘맥국’이 있었다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한국 학자로부터 이 산에 얽힌 전설 하나를 전해 들었다. 목동이 소를 산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풀을 먹였는데, 그 소가 갑자기 분구를 짓밟아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틀 뒤 다시 분구가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솟을뫼(뫼가 다시 솟아났다)’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소시모리’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일까.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사이메이 천황 2년(서기 656년)에 고구려 사신인 ‘이리지(伊利之)’ 등 81명이 일본 왕실로 건너왔다”는 글이 있고, 서기 815년에 역시 일본 왕실이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산성국제번(山城國諸藩)에는 “야사카노미 야쓰코(八坂造)는 맥국 사람(貊國人) 이리좌(之留田麻之意利佐)의 후손이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야사카 신사가 사이메이 천황 2년에 세워졌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야사카 가문의 조상 ‘이리좌’는 일본서기의 고구려 사신 ‘이리지’와 같은 인물이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사실 필자는 그동안 야사카 가문이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내심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해 한국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됐다. 그 옛날 춘천 지역에 맥국(貊國·예맥)이라는 자그마한 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이 지역에 살던 맥국인이 일본으로 망명해 왔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야사카 신사(人坂神社) 입구.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신사는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신다.

    또 신라, 백제와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가 강성해져 남하하던 시기가 656년 전후라는 점도 주목된다. 이와 함께 우두산 인근의 ‘바리뫼’라는 언덕은 우두천왕비(牛頭天王妃)인 ‘하리채녀(頗梨采女)’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좀더 면밀한 조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튿날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그곳에는 무쇠로 만든 높이 16m의 당간(幢竿)이 우뚝 서 있다. 법주사에서는 법사(法事) 때 그 당간에 흰 깃발을 단다고 한다. 하지만 법주사의 법사는 고대 제사와 크게 다르다. 과연 그 옛날에 깃발을 달기 위해 이처럼 높은 당간을 세웠을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간은 신사(神事)를 위해 세워진 상징물일 가능성이 높다. 드높은 기둥은 신이 내려온 소시모리인 동시에 우두산의 상징일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당간이나 당간지주의 흔적은 백제문화권인 충남의 부여와 공주, 가야문화권인 고령 등지에서도 나타난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에는 당간을 세웠던 지주가 남아 있다. 미륵사는 백제 멸망 뒤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명찰이다. 이곳 경내 9층 석탑 앞 좌우에 세워진 2기의 당간지주는 소시모리 또는 춘천의 우두산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 그 구체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 스와(諏訪) 지방의 ‘어주제(御柱祭)’, 이즈모 다이샤(出雲大社) 신궁에서 거행하는 ‘심어주(心御柱)’, 그리고 야사카 신사 ‘기온 마쓰리(기원제)’ 때의 호코(·양쪽 면에 칼날이 서 있는 창) 등이 소시모리 또는 우두산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신화 속 구마나리는 백제 공산성?

    ‘일본서기’ 신의시대 편(上 제8단 1서-5)에는 “스사노오노미코토는 구마나리(熊成) 봉우리에 계시다가, 드디어 네노쿠니(根國·뿌리의 나라)에 들어가셨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구마나리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즈모(出雲)’, 고사기의 ‘구마노(熊野)’ 등과 같은 지역의 다른 표기로 해석되고 있다. 또 구마나리는 음 그대로 ‘久麻那利’로 쓰고 읽기도 한다.

    ‘일본서기’(雄略 21년 3월 초)에는 “천황은 백제가 고구려 때문에 파멸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文州王)에게 주어 그곳을 터전으로 나라를 구원해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고, 그 각주를 보면 “구마나리는 임나국(任那國)의 별읍(別邑)이다”라고 돼 있다.

    유랴쿠(雄略)왕 21년은 서기 476년이다. 그 한 해 전인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광주(廣州) 도성을 함락당해 웅진(지금의 공주)을 거쳐 다시 538년에 사비(扶餘)로 왕도를 옮겼다. 이때 웅진에 머물던 63년간 도성으로 사용했던 곳이 충남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이다.

    결국 각주에 나타난 임나의 별읍은 시기상으로나 역사적 배경을 기준으로 볼 때 공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본 역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이에 대해 “일본의 권위와 은혜를 나타내고자 한 문장이며 거짓 가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공주 시내로 들어서는 다리 앞에는 곰(熊) 석상이 서 있다. 공주가 구마나리이며 한자로는 ‘熊成’이고, 그곳이 바로 ‘일본서기’의 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노미코토가 바다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머문 땅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공산성은 금강 기슭에 있는 산성으로 과거 백제 때는 웅진성이라고 하던 곳이다. 성곽 총연장은 2660m이고, 쌍수정과 그 앞에 왕궁터와 임류각 및 성문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또 이곳에는 서기 523년과 526년에 각각 사망한 무령왕과 왕비를 안장한 무령왕릉이 있다. 1971년 종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왕과 왕비의 묘지석이 발견돼 뒤늦게 대규모 매장유물이 발굴됐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입구 옆에도 곰의 석상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실패한 일본의 ‘백제 구하기’

    한편 ‘일본서기’에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던 백제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지원군을 파병해 나당연합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신라신(일본 최고신)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위를 모신 사당. 뒤쪽 본신전은 5년째 복원공사 중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부여의 부소산성은 금강(백마강)과 접한 언덕 위에 있다. 완만한 언덕길이지만 산성까지는 한참을 올라야 한다. 그 옛날 백제왕은 매일 아침 이 길을 올라 영일루(迎日樓)에서 해돋이를 보고, 군창(軍倉)터와 사비루(泗?樓), 백화정(白花亭)을 거쳐 금강 선착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백화정 바로 앞에는 백제를 침공한 나당연합군을 피해 궁녀 3000명이 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다.

    백제는 사이메이(齋明) 천황 6년(서기 660),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그 직후 백제의 장수 귀실복신(鬼室福信)의 지원요청을 받은 일본 천황은 2만7000여 명의 병사를 백제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이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패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백촌강은 현재의 금강 하류를 말한다.

    덴치(天智) 천황2년(663) 8월, 배 170척과 병사 7000명을 거느린 일본 수군은 백촌강에서 다시 한 번 당나라 수군과 대전했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백제국의 부활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옛 가야문화권인 경북 고령의 가야대학교 캠퍼스 내에는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 고천원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노닐던 하늘터전을 말한다.

    고령이 ‘고천원’이라는 새로운 학설

    가야대 이경희 총장은 캠퍼스에 조성된 고천원 공원을 안내하면서 경북 고령이 바로 고천원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 총장의 주장 중 일부다.

    “하늘신의 후손은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일본 규슈 가사사(笠狹)의 미사키(御崎)로 건너갔다. 일본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성한 기물 세 가지는 청동거울, 옥, 칼이다. 그런데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칼인 환두대도(環頭大刀)와 똑같은 생김새의 칼이 일본 이즈모의 스사 신사(須佐神社)에 있고, 가야 특유의 문양을 가진 토기가 일본 규슈의 미야자키현에서도 발굴된 사실 등을 볼 때 고령이 고천원이라는 학설이 타당하다.”

    필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을 한국 역사서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고천원의 주역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와 그의 동생인 스사노오노미코토와 국조신 다카미무스히노미코토(高皇産靈尊) 3명이다. 고천원에서 신라에 내려왔다는 천자가 스사노오노미코토이고, 다카미무스히노미코토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를 고천원에서 지상으로 내려 보낸 신이다. 그런데 ‘高皇産靈尊’이라는 신의 이름은 ‘高靈’과 ‘皇産’이라는 두 단어로 엮여 있는데, 여기서 경북 고령(高靈) 출신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가야산 남쪽에 우두산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직접 찾아가 확인하지는 못했다. 옛 가야 땅에 고천원의 터가 있고, 우두산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고령이 고천원이라는 설은 긍정하거나 부정할 만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해 아직은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런 학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眞弓常忠
    ● 일본 고가칸(皇學館)대 신도 (神道)학과 졸업
    ● 스미요시타이샤(住吉大社) 신관
    ● 現 고가칸대 명예교수, 야사카 신사 궁사
    ● 저서 : ‘일본 고대제사의 연구’ ‘신도(神道)의 세계’ ‘일본 마쓰리와 대상제’ ‘기온신앙사전’ 등


    무엇보다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한 최고신들이 신라 또는 백제의 땅에서 건너왔다는 학설이 ‘일본서기’의 내용과 일치할 경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다. 그동안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려왔다.

    ‘번역·홍윤기 한일국제왕인학회장·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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