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성배와 아더왕의 전설 ‘아발론 연대기’

  • 이경덕‘신화 읽어주는 남자’ 저자 papuan@naver.com

    입력2006-02-16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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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배와 아더왕의 전설 ‘아발론 연대기’

    ‘아발론 연대기’(전8권) 장 마르칼 지음/김정란 옮김/북하우스각 420쪽 내외/각 1만1000원

    현대에 들어 서양의 상상력은 오래되어 식상해버린 그리스 신화를 떠나 싱싱한 켈트 신화로부터 힘을 얻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말은, 켈트 신화 또한 오래된 것이지만 그리스 신화가 오랫동안 햇빛(대중)에 노출되어 신화성이 퇴색되고 휘발되는 동안 켈트 신화는 달빛을 받으며 생명의 기운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근래에 큰 인기를 끌고 있거나 끌었던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나니아 연대기’ 등의 뿌리가 켈트 신화에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켈트 신화의 주인공인 켈트족은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독일 남부 지방에 거주하다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 사이에 이동을 시작해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에 이르렀고 기원전 375년에는 로마를 침략하기도 했다. 켈트족은 거칠고 활동적인 민족으로 유럽에 철기 문명을 퍼뜨렸고 축제, 모험, 전쟁을 좋아했다.

    켈트족은 기록 남기는 것을 싫어하고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현재 이들의 흔적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영국의 남서부인 콘월,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역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켈트신화는 이들 지역에서 전승되는 것이 중심이고 ‘아발론 연대기’의 주요 무대 또한 이곳이다.

    ‘아발론 연대기’는 다누 여신의 일족인 투아하 데 다난이 북쪽에서 아일랜드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북쪽에 있는 네 도시에서 얻은 네 가지 보물을 가지고 나타난다. ‘운명의 돌’로 부르는 돌, 승리의 창, 빛의 검,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풍요의 솥이 그것이다. 여기서 특히 풍요의 솥은 ‘아발론 연대기’의 핵심인 성배의 원형적 이미지다.

    투아하 데 다난 부족은 여러 부족과 싸움을 벌이고 결국 게일족에 패해 지하세계로 쫓겨나 신이 되고 요정이 된다. 유난히 아일랜드에 요정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풍경

    ‘아발론 연대기’는 고대 켈트신화와 현대의 신화, 그러니까 신화가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당대의 삶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때, 현대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반지의 제왕’ 등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시기적으로 그렇다. ‘아발론 연대기’는 켈트 신화에서 제기된 여러 주제를 체로 치듯 걸러서 얻은 핵심 주제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옷을 입혀놓았다.

    그래서 ‘아발론 연대기’에서 다루고 있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보여주는 모험, 성배의 탐색, 란슬롯과 귀네비어의 안타까운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련 등은 시기적으로 중세 유럽의 풍경을 옮겨놓은 것이다.

    12세기를 전후한 중세 유럽의 풍경을 몇 가지로 압축해보면 신성하면서 잔인한 십자군, 제후들의 궁정을 돌아다니며 시와 이야기를 낭송하던 음유시인, 궁정의 로맨스를 떠올릴 수 있다. 이 모두를 종합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더왕 이야기, 그러니까 이 책 ‘아발론 연대기’다.

    저자인 장 마르칼은 후기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러니까 각지에서 전하는, 또한 여러 시대의 아더왕 이야기를 모았을 뿐 스스로 덧붙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8권에 이르는 ‘아발론 연대기’의 엄청난 분량은 고스란히 아더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아발론 연대기’는 마법사 멀린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더왕, 호수의 기사 란슬롯, 오월의 매 가웨인 등 원탁의 기사들이 펼치는 모험과 사랑, 퍼시발과 갈라하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성배의 탐색, 이들을 지켜보는 마법사 멀린과 모르간,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아발론 연대기’의 기원은 앞에서 살펴본 켈트인들이다. 따라서 ‘아발론 연대기’ 아래에는 신석기와 청동기의 신화와 유산이 켜켜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기사들의 모험 이야기와 ‘아발론 연대기’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용어로 구별한다면 일반적인 기사들의 모험 이야기는 민담의 성격이 강한 반면 ‘아발론 연대기’는 신화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예를 하나 들면, 신화학자 하인리히 침머는 원탁의 기사를 대표하는 가웨인이 정오가 될 때까지 힘이 강해지다가 해가 지면 힘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중세의 갑옷으로 몸을 가린 태양신”이라고 해석했다. 이 같은 ‘아발론 연대기’의 신화성에 대해서는 저자와 역자가 상세하게 주를 달고 각 권의 뒤에 해설이 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자신을 온전히 담을 성배

    ‘아발론 연대기’는 신화의 여러 얼굴 가운데에서도 영웅 신화의 전형을 지니고 있다. 신화 속에서 영웅은 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괴물과 싸워 물리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사람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신화는 거대한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나와 있는 것만 보아서는 신화를 이해할 수 없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은 실제로 숲이나 산속에 사는 사나운 짐승이나 괴물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람들 앞에 닥친 어려움이나 고난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괴물의 의미에는 폭넓게 굶주림, 질병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면, 영웅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질투, 시기심, 남과 싸우려는 마음이라는 괴물과 싸워 이긴 사람들이다.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한 삶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노력해서 목표를 이룬 사람도 영웅이라는 말이다.

    ‘아발론 연대기’에는 이런 영웅들이 즐비하다. 용기와 절제, 인간의 위엄이 무엇인지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그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영웅은 타인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부름을 받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기사가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웅이 자기에게 부여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력자를 필요로 한다. ‘아발론 연대기’에서는 마법사 멀린과 모르간, 성배의 수호자인 어부왕, 호수의 부인을 비롯한 많은 여인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아발론 연대기’에서 궁극의 영웅적인 과업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배(聖杯)의 획득이다. 성배는 예수의 피를 담은 잔으로 최고의 성물(聖物)이다. 수많은 원탁의 기사가 이 성배를 찾아 모험을 하지만 성배에 접근하는 것은 단 세 사람뿐이다.

    책을 보면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출발할 때 뿔뿔이 흩어져 각자 결정한 길을 따라갔다고 나온다. 어떤 모험이든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쉽겠지만 굳이 원탁의 기사들은 홀로 떠난다. 그것은 성배가 각각의 기사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원탁의 기사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가웨인과 란슬롯은 성배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성배를 찾았기 때문이다. 가웨인에게 성배는 아더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이며 란슬롯에게 성배는 귀네비어 왕비인 탓이다.

    이렇듯 ‘아발론 연대기’는 읽는 사람에게 원탁의 기사들처럼 자신만의 성배를 찾아갈 것을 주문한다. 자신을 온전하게 담을 수 있는 성배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기사들의 모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원탁의 기사들은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간 것이다.

    아발론은 아더왕이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이 옮겨진 곳이다. 그리스 신화의 엘리시온이나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와 같은 곳이며 켈트신화에서 보면 투아하 데 다난 신족이 싸움에서 패해 쫓겨 간 티르 나 노그이다.

    티르 나 노그에는 흔히 죽은 자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분위기가 없다. 오히려 한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세상이다.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나 무릉도원과도 같은 곳이다.

    따라서 아더왕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아더왕은 아발론에서 살며 세상이 다시 그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날 것이다. 아발론 또한 성배가 그렇듯이 상징이다. 영웅처럼 용기와 절제, 인간의 위엄을 가진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을 상징한다.

    ‘아발론 연대기’를 보면서 우리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처럼 방대한 작품을 만날 수 없음을 한탄했다. 마지막 권을 덮은 뒤, 한국 신화에도 판테온(만신전)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그래서 아더왕이며 란슬롯이며 가웨인의 이름을 부르듯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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