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10일 아침, 기무사가 날린 ‘김정일 중국 방문’ 첫 보고
- 내곡동 자극한 ‘익명의 군 관계자’發 확인 기사
- “中情 간부가 위장 수출 관여”…남산 포위한 방첩부대 요원들
- 허위보고 문제 삼아 보안사 정보처 해체한 김기춘 중정 국장
- 1979년 10월27일 아침 중정, “탱크가 와 있는 줄 알았다”
- 보안사 문서 소각한 중정, 중정 문서 압수한 보안사
- “안기부가 왜 군 인사에 개입하나”…이양호, 권영해 그리고 김현철
- 청와대로 날아든 투서 ‘이라크에 있는 자이툰 기무부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청사(왼쪽)와 종로구 소격동의 국군기무사령부 본부.
잠시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자. 1월10일 새벽 외신들이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 것 같다”는 소식을 타전하자, 누가 이 ‘설(說)’을 ‘사실’로 확인하느냐를 두고 정부 관련부처에는 온통 비상이 걸렸다. 국정원과 외교통상부 등은 ‘모든 채널을 열고’ 사실확인에 나섰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의 특성상 1분이 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0일 아침 일과시간 직전에 청와대에 전달된 최초 확인보고는 뜻밖의 부서에서 나왔다. 국군기무사령부였다. “특별열차가 중국 단둥(丹東)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2위는 이날 오후 중국측 소스를 인용해 확인보고를 날린 주중(駐中) 한국대사관. 4년 넘게 베이징을 지키고 있는 김하중 대사의 ‘내공’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반면 국정원의 공식확인은 이날 저녁에야 나왔다. 외교부 기자실에서는 “국정원이 외교부보다도 늦단 말이냐”는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특히 국정원측을 자극한 것은 이날 아침 연합뉴스가 내보낸 최초의 ‘당국자 확인보도’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군 정보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이 기사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기정 사실화하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온 시점은 기무사의 청와대 보고 직후였다. 군 정보당국자가 특정 언론에만, 그것도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사항을 확인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첫 보고에 늦어 체면을 구긴 국정원에서는 “기무사가 자신들이 ‘한 건’ 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더욱이 국정원은 ‘지난해 10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북한을 방문했으므로, 당분간 김 위원장이 중국에 갈 이유는 없다’고 분석하던 상황이었다. 첫 보고에 늦은 것은 중국 등 국외정보를 담당하는 1차장 산하 해외파트의 책임이지만, 사전예측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북한파트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국정원 관계자들은 곤경에 처해 있는데 ‘군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광고를 하고 나선 셈이니, 분위기가 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내곡동 주변에서는 “도청사건과 황우석 파동 등으로 국정원이 의기소침한 틈을 타서 소격동(기무사)이 분위기를 주도해보겠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흘러나왔다. 군내 방첩활동에 주력해야 할 기무사가 김정일 방중(訪中) 같은 정치정보에 관심을 갖고 보고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1970년대 정보기관 사이의 갈등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보기관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상존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국익을 위해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지만, 열심히 뛰다 보면 업무영역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제도적으로는 ‘종합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부문정보기관’인 기무사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갖는다. 기관장의 직급만 봐도 국정원장은 장관이지만 기무사령관은 중장일 뿐이다(상자기사 참조).
국정원과 기무사 법적 관계 |
사업·예산감사, 보안점검 틀어쥔 국정원의 절대우위 “기무사는 절대로 국정원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두 기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내리는 결론이다. 제도적으로 기무사는 국정원에 철저히 예속된 상태라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보안사가 나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법과 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21세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단언이다. 우선 기무사는 정보보고 과정에서부터 국정원과 긴밀히 연동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 정보기관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관행은 사라지고 모든 관련정보는 청와대 안보실(지난해까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을 경유하게 됐지만, 예전에는 안기부가 이 통로역할을 맡았다. 지금도 기무사가 청와대에 보고하는 첩보는 국정원에도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 관례다. 정보조정 최고책임을 맡은 국정원이 이들 첩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확실한 정보’로 만든다는 취지다(김정일 방중 보고와 관련해 국정원이 시간상 ‘늦은’ 것에는 두 기관이 올리는 보고 사이의 이러한 성격차이가 숨어 있다). 기무사의 업무추진도 상당부분 국정원의 승인을 받도록 돼있다. 각 정보기관이 추진하는 공작사업은 먼저 국정원장에 보고서를 제출해 부호를 발급 받아야 한다. 부호가 없는 공작사업은 불법이므로 ‘공무’가 아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돈. 국정원은 국내 각 관련기관이 사용하는 모든 ‘정보예산’을 통제한다. 기무사와 국군정보사령부, 경찰 정보파트 등은 경상비용은 상부기관 예산에서 타지만 공작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예산은 세목별로 국정원에 신청한다. 국정원은 이 예산안을 심사해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고 국회는 이를 총액개념으로 승인한다. 국회는 어떤 사업, 어떤 세목으로, 얼마나 예산이 배정되는지까지 꼼꼼히 감독하지 못한다. 사실상 기무사의 예산 승인권은 국정원이 갖고 있는 셈이다. 예산을 타서 쓰므로 감사도 받아야 한다. 국정원 감찰실에는 크게 두 부서가 있다. 하나는 각급 시설의 보안현황을 점검하는 팀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예산을 받아쓰는 기관들을 순회하며 감사하는 팀이다. 1년에 한 번 이뤄지는 기무사 정기 사업·예산감사는 3~4일 동안 진행되는데, 담당 팀은 준비기간과 정리기간을 합치면 1년의 절반을 감사로 보낸다고 할 정도로 꼼꼼하게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기무사의 상당수 업무를 바닥까지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정보예산의 특성상 예산이 적절히 집행됐음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관계자는 “해외 정보원 포섭을 위해 돈을 뿌리면서 영수증을 받아올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공작사업은 감찰관이 ‘걸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예산·사업에 이상이 있을 경우 국정원 감찰실은 피감기관에 담당직원의 징계를 요청할 수 있고, 해당 기관장은 이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 보안점검 역시 간단치 않다. 국정원은 국내에 산재한 각급 보안시설에 대해 1년에 한번 점검을 한다. 기무사와 정보사는 물론 국방부와 합참도 대상이다. 시설, 통신, 문서, 인원 등으로 나뉘어 실시되는 점검기간 중에는, 감찰관이 야간에 불시로 해당시설 사무실 문을 열어 보안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비밀문서가 일반 캐비닛에 있다든가 하는 이상이 발견되면 역시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 전직 군 정보당국자들 사이에서는 국정원의 이러한 ‘압도적인 제도적 우위’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경쟁 없는 권한독점이 계속되면 정보기관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여기에는 군 정보기관의 활동공간을 넓혀 국가 주요정보의 교차확인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사항’이 암묵적으로 배어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 국정원측 인사들은 “1970년대 같은 비효율과 기관간 대립으로 인한 혼선을 다시 만들자는 말이냐”며 “구태의연한 조직이기주의”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 기무사(옛 보안사, 육군 방첩부대)는 늘 국정원(옛 국가안전기획부, 중앙정보부)의 통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군사정권 때는 기무사가 ‘문민(文民)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남산의 그늘을 벗어나려 애썼다”고 회고했다. 군 정보당국의 한 전직 고위관계자는 “군사정권 때는 청와대가 그러한 갈등을 부추겨 서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두 기관으로부터 같은 주제로 보고를 받아 교차확인하는 식이었다”고 말한다. 분위기가 심각했을 때는 무력충돌에 준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중정 포위한 윤필용의 방첩부대
두 기관의 긴장관계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1960년대부터 계속돼왔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전까지 정보를 독점해온 육군 방첩부대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중앙정보부 사이에 알력이 빚어진 것이다. 특히 이들 기관의 수장(首長)이 어떤 인물인가에 따라 긴장은 고조되기도 하고 잦아들기도 했다.
전직 관계자들이 ‘최초의 충돌’로 꼽는 사례는 1967년의 이른바 ‘나일론백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1월말, 육군 방첩대 정보처는 위장수출과 관련한 첩보를 입수한다. 인천과 홍콩을 오가는 무역선이 수상하다는 내용이었다. 12월 이 무역선을 급습한 방첩부대는 적재된 나일론백 속에 수출품 대신 쓰레기와 돌덩어리가 가득한 것을 적발한다. 수출실적을 속여 수입쿼터를 따내 돈을 버는 수법이었다. 공범을 추적하던 방첩대는 기대 밖의 소득을 건졌다. 사건의 배후에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중견간부가 있다는 진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자 무섭게 떠오르던 하나회의 대부였던 윤필용 당시 방첩부대장은 이를 중정을 견제하는 데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낸 윤필용은 남산 중정 본부에 무장요원 10여 명을 급파하고, 배후로 지목된 중정 중견간부를 체포하기 위해 출입구마다 진을 친다. 사태를 눈치챈 이 중견간부는 사무실에서 버티며 시간을 끌었다.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은 청와대로 달려가 “위장수출은 해외공작기금 마련을 위한 자구책”이라는 논리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유신선포 후 최대의 권력층 숙정이었던 윤필용 사건은 동기생인 강창성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수사하게 한 데서도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사단장 시절 육사 8기 장성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차규헌 육본장교보직처장, 강창성 5사단장, 윤필용 20사단장, 이범준 15사단장.
‘강성’이었던 윤필용의 낙마 이외에도, 1·21 사건은 중정 쪽에 여러모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청와대 뒷산까지 접근한 무장공비에 대해 관할부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까닭에 종로경찰서 전투경찰이 출동해 청와대 지척에서 교전을 벌인 것. 초기 대응의 혼선에 크게 실망한 박 대통령은 ‘기관간 업무협조는 중정이 책임진다’는 지침을 세우고 이를 명시한 ‘대통령 훈령 28호’를 발령한다. ‘대간첩 작전 등에서 중정이 정보를 취합하고 상황을 판단해 군과 경찰에 지시를 내린다’는 이 훈령을 통해 중정은 방첩부대에 대해 압도적인 위상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상승세를 타고 중정은 1972년 단행된 10월유신을 실질적으로 주도할 수 있었다. 10월17일을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졌으므로 전 사회에 대한 통제권은 형식상 군이 갖고 있었지만, 10월16일 밤 각 지역 군 사령관들과 기관장을 모아 준비조치를 지시한 것은 중정 지부장들이었다. 사실상 유신선포를 지휘한 이가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창성의 공격, 김기춘의 반격
그러나 제도상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 시절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군은 ‘문민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 마찰을 빚으며 중정의 활동반경에 적잖은 제약을 가했다. 당시 중정에서 일한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울을 예로 들어보자. 중정의 책임자는 서울지부장이고 군의 책임자는 수도경비사령관이다. 중정 서울지부장은 대통령이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장이 천거하면 임명되지만,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만이 임명된다. 기관의 힘은 절대권력의 거리와 정비례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1970년대에는 비록 제도적으로는 중정이 위였지만 세력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특히 박 대통령이 권력 주변을 통제하는 데 보안사를 적극 활용하면서, 보안사의 위상은 눈에 띄게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다.
박 대통령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주도하며 권력의 절정에 있던 이후락 중정부장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은밀히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불러 제보를 하나 건넨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에게 “각하가 노쇠하시기 전에 물러나도록 해야 하며,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는 제보였다. 강 사령관은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전두환 준장 등 하나회 구성원들까지 전원 보안사에 연행해 조사를 벌였다. 결국 뚜렷한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사 대상자들과 소문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후락 부장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고 중정이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계기는 1977년 10월 전방 대대장이 부하를 데리고 월북한 사건. 당시 보안사는 “자진월북이 아니라 피랍”이라고 허위보고를 올렸다가 중정에 진상이 파악되어 곤욕을 치렀다. 비슷한 시기 군 비행기 한 대가 월북한 사건과 겹쳐 진노한 박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고, 신직수 중정부장은 검찰에서 파견 나온 젊은 특명국장 김기춘에게 보안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임무를 맡긴다.
감찰에 들어간 중정은 보안사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던 정보처를 잘라내는 직제개편안(案)을 밀어붙인다. 정보처는 국회, 법원, 정부부처 등 민간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보안사의 손발이었다. 이듬해 2월부터 보안사 요원들은 기관출입을 금지당했고, 보관 중이던 서류는 모두 강제로 소각됐다. 보안사에서는 ‘우리가 다시는 남산과 경쟁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음모’라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후 보안사는 1970년대 말까지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박 대통령의 측근이던 전두환 소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정보수집 기능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 맺힌 보안사 직원들의 ‘응어리’는 10·26 이후 고스란히 복수로 이어진다.
10·26, 그리고 칼바람
“혹시 탱크가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1979년 10·26 다음날, 당시 중정에서 일하던 한 관계자는 전날의 험악한 소식을 전해 듣고 청사로 출근하며 느낀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 시해 혐의로 보안사에 감금되고 난 아침, 중무장한 보안사 요원들은 남산(국내파트)과 이문동(해외 및 북한파트) 청사를 점령했다. 이들은 중정 고위간부 전원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 등으로 연행해 저격사건 연루 여부를 조사했다. 모진 수모를 당한 중정 간부들은 거의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햇볕을 볼 수 있었다.
간부들이 돌아오던 날, 이들을 마중하던 중정 실무자들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국정원 내부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이후 수개월 동안 중정은 사실상 업무를 중단했고, 보고서도 거의 내지 않았다. 곧 신군부의 실세인 유학성 중장이 부장서리에 임명되긴 했지만, 이 시기 중정은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동수사본부의 시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977년 중정이 보안사 문서를 강제로 소각했듯, 10·26 직후에는 남산과 이문동 청사에 진입한 보안사 요원들이 보관 중이던 중정 비밀문서를 대부분 휩쓸고 가버렸다는 사실이다. 남산에서 보관하고 있던 정치인·공직자들의 존안자료는 물론, 이문동 정보학교에서 사용하던 학습교재, 예산과 사업명세등 내부자료까지 통째로 압수됐다. 이때 보안사가 확보한 자료는 이후 수년간 보안사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중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됐다.
12·12와 5·17을 통해 절대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4월 중정 부장서리를 겸임하며 중정을 완전히 물갈이했다. 인원교체뿐 아니라 권한축소까지 포함한 대대적인 조직개편이었다. 허화평, 허삼수 등 보안사 출신 장교들이 휘두른 칼날에 당시 중정 직원의 10%에 가까운 300명이 조직을 떠났다.
곧 이은 1980년대, 정보를 다루는 데 능숙한 전두환 대통령은 두 기관을 적절히 견제하는 데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가까스로 내상(內傷)을 치유하고 이름을 바꾼 안기부에는 종합정보기관으로서의 ‘제도적 우위’를 유지해줬고, ‘권력의 산실’인 보안사에는 실질적인 신뢰를 주는 식이었다. 이 무렵 두 기관은 간간이 서로 견제구를 날렸지만 이전과 같은 ‘불상사’를 연출한 적은 없다는 게 양 기관 전직 관계자들의 회고다.
새로운 사안이 발생하면 두 기관의 직원들이 공조하거나 ‘팀’을 형성하는 이른바 ‘모듈형 체제’가 완성된 것도 이 무렵이다. 직제표에 따라 경직되게 사안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따라 그때그때 모였다 흩어지는 오늘날의 ‘태스크포스’ 개념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기관간 업무영역이 불분명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이는 훗날 보안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민간인 사찰’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한편 1985년 무렵부터 기무사가 유학생들의 간첩활동 감시 명목으로 해외활동을 늘려나가기 시작하자 부분적으로 판도가 달라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그전에는 주로 안기부 국내파트와 보안사 정보처 간에 마찰이 심했지만, 이때부터는 안기부 해외파트도 해외에 장기출장 나와 있는 보안사 요원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생겨나곤 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양 기관은 모두 내리막을 걸었지만, 타격을 더 크게 입은 것은 아무래도 군 소속인 보안사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1990년 10월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다. 보안사에 근무 중이던 윤석양 이병이 내부문건을 들고나와 정치인 및 재야운동가에 대한 미행 및 동향관리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보안사는 1991년 1월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꿨고, 민간인 사찰을 금지하는 내용이 법률에 반영된다. 무소불위였던 보안사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기부가 기무사에 대해 행사하던 영향력도 줄었다. 기존의 보안감사가 ‘보안지도점검’으로 약화됐고, 기무사의 공작사업이 줄어들면서 안기부가 사업·예산감사를 할 수 있는 부분도 줄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거치면서 개혁의 파도를 맞은 안기부로서는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안기부가 군 인사에 영향력 행사”
전직 군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그전까지는 보안사가 안기부의 업무영역을 침범했느냐를 두고 말썽이 있었다면, 이후부터는 안기부가 기무사의 업무영역을 침범했는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고 전한다. 국정원이 작성하는 장교 인사파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는 불만어린 목소리다.
장교사회 초미의 관심사인 장군 진급심사와 관련해, 심사대상자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은 1차적으로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 소관사항이다. 진급자를 결정하기 위해 열리는 심사위원회는 기무사가 수집·축적한 자료를 제공받아 심사에 참고하는 것이 관례다. 내부적으로 대상자를 선발한 뒤 청와대의 최종결재를 받아 장군 진급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서울 남산의 옛 국가안전기획부 청사.
이들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1996년 9월의 진급심사.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이 만들어 청와대에 들고 들어간 대상자 명단이 사실상 백지화된 일이었다. 이때의 인사에 대해 군 주변에서는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를 등에 업은 권영해 안기부장이 ‘작업’을 펼친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 장관이 특정 군맥을 형성하려 한다’는 논리로 권 부장이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것. 이 일이 있은 직후 이양호 장관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공직을 떠났다.
군 정보당국 관계자들의 이러한 불만에는, 국정원의 군 관련 담당라인에 대한 반감도 겹쳐 있다. 국방부를 비롯해 주요 부대를 출입하는 국정원 요원들이 장관실의 동정을 필요 이상 자세히 확인해 청와대에 보고하는 등 ‘유쾌하지 않은 일’이 간혹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가 현역 및 예비역 군인들로 이뤄진 이들 라인이 늘 진급에서 앞서나가는 것도 같은 ‘정보맨’ 처지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반면 내곡동 주변에서는 이 시기 국정원에 대해 “오히려 군 관련사항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문제였던 시절”이라는 의견도 들을 수 있다. 군사정권의 관성이 남아서 기무사는 물론 국방부 등 군 핵심기관의 동향을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거나,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긴장관계를 피하기 위해 제대로 보고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에 출입하는 국정원 요원들의 사기가 침체됐다는 전언도 있다. 1990년대 중반 내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각종 무기도입사업 관련 비리나 인사 난맥상에 대해 국정원이 적절하게 ‘경계신호’를 울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요지다.
이라크에서 온 제보
노무현 정부에 들어선 이후에도 ‘기무사령관이 바뀌면 국정원장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평온한 관계는 계속 유지돼왔다. 적어도 양 기관의 고위관계자가 부딪치는 사건이 없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반면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간간이 불만의 소리가 있었다. ‘조직적인 대립’은 없지만 ‘감정적인 긴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5년 봄, 청와대에 주목할 만한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200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이라크에 파병한 자이툰 부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요지는 이라크 주둔지에 나와 있는 기무부대 요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주로 교체시기가 되어 귀국한 장병들이 전달한 것으로 파악된 제보는 ‘기무부대 관계자가 낮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고급 장교용 개인 편의시설을 사용한다’ ‘고압적인 태도로 타 업무에 관여하려 든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자이툰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청와대는 즉시 사실확인을 지시했고, 결국 해당 기무부대원 대부분을 자연스럽게 교체하는 방안으로 사태가 정리됐다. 군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라크 현지에 나가있는 국정원 요원들이 사실확인 임무를 맡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았고, 일부에서는 이 일을 국정원과 기무사 사이의 긴장관계와 연결해 해석하기도 했다. 자이툰 파병 이전부터 적잖은 수의 국정원 요원이 현지에서 상황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정일 위원장 방중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을 두고 내곡동 주변에서 “기무사가 심상치 않다”는 반응이 흘러나온 것에는, 이처럼 2005년에 조성된 묘한 배경과 분위기가 깔려있다. 여기에 기무사측이 도청파문과 황우석 사태 등으로 국정원이 위기에 몰린 틈을 이용해 통제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결합된 것. 일각에서는 이를 정치권을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는 ‘국정원 개혁방안’과 연관짓기도 한다. “국정원이 분할되거나 축소되면 다른 정보기관으로서는 자율성이 커지므로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적극적인’ 견해다.
이는 기무사가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경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과도 연결된다. 기무사가 상당수 요원을 출장과 연수 형식으로 해외에 보내 인맥을 형성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기무사가 단둥과 옌볜(延邊) 등 북중 국경지역에 공을 들여 정보소스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그 과정에서 중국 당국과 마찰을 빚은 사례도 있다는 것.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엄밀하게 따지면, 군 관련 정보만을 다루게 돼있는 기무사가 외국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꼬집었다.
‘방치’와 ‘위기감’
그러나 ‘군 관계자의 연합뉴스 인터뷰’ 건이 기무사가 조직적인 차원에서 추진한 결과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황을 꼼꼼히 확인한 정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문제의 ‘군 관계자’가 기무사 고위간부라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개인적인 친분에 따른 ‘우발적인 사고’에 가깝다는 것.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해 여러 경로로 확인절차를 거쳤으나 ‘본격적인 기관간 대립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국정원 관계자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무사가 김 위원장의 방중을 확인한 경로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기무사가 미군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입수했다는 설도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특별열차의 움직임을 100% 신뢰도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첩보위성을 가동하는 미국뿐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월10일 아침, 한미 군 정보당국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정보를 공유했고, 한국군 당국은 미군이 최첨단 군사장비로 입수한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제공받았다는 전언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것은, 김 위원장의 방중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은 한국의 정보당국이 2006년 봄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국정원 관계자들이 스스로 자괴심을 갖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이렇듯 무성한 뒷말을 낳을 리 없었던 까닭이다. 한 정보당국 관계자는 “국정원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청와대, 그리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국정원 모두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러한 위기감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 과연 긍정적으로만 작용할 수 있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촌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