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안병영 당시 교육부 장관이 필자에게 교육부 출입 30년을 기념해 수여한 감사패.
필자는 1966년 5월15일부터 꼬박 40년간 교육부를 출입하고 있다. 역대 교육부 장관 48명 중 33명의 장관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 부처는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다시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40년간 지켜본 교육장관들의 면면을 돌이켜보며 100년을 내다봐야 할 교육정책이 조령모개(朝令暮改)를 거듭해 신뢰를 잃고, 교육부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역대 정권의 교육 각료는 1년이 멀다 하고 바뀌었다. 이렇게 자주 바뀐 것은 장관이라는 자리가 역대 정권의 전리품이어서 그렇다. 1948년 건국 이래 초대 안호상 장관부터 현 김진표 교육부총리까지 48명 장관의 평균 임기는 1년2개월밖에 안 된다.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 3년5개월이다. 단 3일 만에 물러난 장관도 있다. 반면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자리를 두 번이나 차지한 사람도 있는데, 권오병·안병영 전 장관이 그렇다. 권 장관은 제16대 장관으로 취임해 1년 만에 떠났다가 다시 1년 반 만에 제18대 장관을 지냈다. 안병영 장관은 김영삼 정부 때 처음 들어왔으며 노무현 정부 때 다시 한 번 교육부총리로 기용됐다.
필자가 교육부를 처음 출입할 당시 장관이 16대 권오병 장관이니 초대 안호상 장관부터 15대 윤천주 장관까지는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해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꾸짖지 않는 교육, 졸리지 않는 수업’
초대 안호상 장관은 교육법을 제정하고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립했다. 아울러 교육정책은 ‘일민주의’로 못박았는데, 일민주의의 정의는 ‘남녀 상하 차별 없는 민주주의 교육’이다. 오늘날 부르짖는 ‘양성평등’에 버금가는 교육정책을 일찍이 공교육의 틀로 만든 것이다.
제2대 백낙준, 제3대 김법린 장관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미군정청 과도기에 시행한 교육정책의 맥락을 살리는 데 힘썼다. 미군정 과도기의 교육정책은 ‘꾸짖지 않는 교육, 졸리지 않는 수업’이었다. 꾸짖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폭력과 체벌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졸리지 않는 수업은 교원의 자질과 학습 지도 기술을 겨냥한 것이다.
제4대 이선근 장관 때는 ‘한글파동’을 겪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은 맞춤법이 괴이하니 개량하는 게 옳다”고 문제 제기한 것을 장관이 곧바로 정책에 반영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장관은 “이 대통령이 세종대왕의 뜻을 재천명한 것”이라며 ‘표기법 간소화안’을 발표했다. 간소화안대로라면 ‘믿다(信)→밋다, 밖(外)→박, 높다(高)→놉다, 낳다(産)→나타’로 바뀌어야 한다. 국어학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대통령이 직접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해 사태가 일단락됐다. 혼란을 빚긴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누가 보고 들어도 뜻을 알아차리기 쉽게 담화문을 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대통령이 즐겨 쓴 “내 말 잘 들으시오” 같은 서민풍 어투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제5대 최규남, 제6대 최재유 장관에 이어 제7대 이병도 장관 때는 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시기로 기록된다.
제8대 오천석 장관은 스승상(像) 정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헨리 반 다이크의 시(詩)‘무명교사 예찬’을 장관이 직접 번역해서 전 교원이 암송하도록 했고 교육계 행사 때마다 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