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눈앞의 일에 연연 말고 더 멀리 바라보게”

  • 김승진 한국외대 교수·경제학 seunjkim@hufs.ac.kr

    입력2006-09-14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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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부총리, 서울시장을 지낸 조순 선생님은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목으로서 더 큰 발자취를 남긴 이 시대의 선비시다. 또한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내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학업, 진로, 결혼은 물론 건강까지 음으로 양으로 보살피고 챙겨주신 아버지 같은 존재이시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조순 선생은 ‘관악산 산신령’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일 관악산을 올랐다. 필자 김승진 교수가 조순 선생과 함께 영주 부석사를 찾았을 때 사진.

    소천(少泉) 조순(趙淳) 선생님을 처음 뵌 때가 1967년 9월이다. 선생님께서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부교수로 갓 부임해 오셨다. 그때 선생님은 10년 미국 유학생활을 마친 불혹(不惑)의 연세였고, 나는 갓 성년이 된 서울 상대 경제학과 2학년생이었다.

    당시 서울 상대엔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교수가 전무했기에, 선진 경제학 배우기를 갈구하던 학생들에게 조 선생님의 부임은 구세주의 등장과 같았다. 특히 입학 당시 서울대 최고 ‘커트라인’을 기록한 경제학과 66학번 동기들은 선생님이 처음 가르쳐주신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완전히 매료됐다.

    선생님은 모든 수강생에게 기말 리포트를 영어로 타이프해 제출하도록 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겨우 리포트를 쓰고, 또 난생 처음 타이프를 치느라 며칠 동안 고생한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서는 “영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이니 경제학과 더불어 영어에도 주력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조언에 따라 나는 학창 시절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는 훗날 미국 유학 시절 큰 힘이 됐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화폐금융론, 경제발전론, 경제계획론, 경제이론세미나 등을 배우며 그의 심오한 학문세계에 빠져들었고, 많은 학생이 선생님처럼 실력 있는 경제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경제학과 66학번 동기생 50명 중 21명이 졸업 후 해외 유학 등을 거쳐 경제학 박사가 되어 지금 학계와 관련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선생님은 학문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제자들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으셨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매사를 순리대로 풀어가는 모습은 조선시대 선비와 같았으며, 또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마치 자상한 어머니와 같았다. 이는 한학(漢學), 영문학, 그리고 경제학에 통달한 학문적 깊이에서뿐만 아니라 당신이 걸어오신 인고(忍苦)의 인생역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심오한 학문세계에 매료

    조순 선생님은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부족한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공부해야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의식주는 가정교사 등을 하며 해결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계시던 선생님은 내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면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셨다.

    내가 대학 3학년이던 1968년, 선생님은 서울 상대 부속 경제연구소 연구부장이란 보직을 갖고 계셨다. 당시 경제연구소는 경제학 관련 주요 영문 자료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는데, 선생님은 그 일부를 내게 맡기셨다. 나는 이 일을 통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어 실력도 향상됐고, 선생님과도 더욱 가까워졌다.

    1970년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선생님의 권유로 한국은행에 입사, 조사1부 금융재정과에 근무했다. 선생님은 내가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다니도록 선처해주셨다. 또한 내 석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로 수고하시면서 나를 이끌어주셨다.

    내가 군대 문제로 고민하자 선생님은 당신께서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사관학교 영어과 교관으로 근무하신 것처럼 나도 육사 교관으로 군 복무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 말씀을 따라 197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육사 교관을 지원, 1975년까지 육사 생도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쳤다. 이 기간 나는 경제학을 더 깊게 공부할 수 있었고, 군 제대 후 바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1972년 8월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사 경제학과 교관이 되었을 때 나는 거처할 곳이 없어 열악한 육사 BOQ(미혼 장교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를 측은히 여긴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 자택에 기거하도록 해주셨다. 이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새벽 5시면 기상하셔서 집에서 가까운 동덕여대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셨다. 또한 식사시간 틈틈이 당신의 인생역정과 인생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가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미국 유학생활 체험을 들려주시면서 내게 제대 후 바로 미국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하셨다. 이외에도 경제학, 중국고전, 영문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으셔서 내가 선생님의 학문세계로 한 발짝씩 더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제자의 건강까지 챙겨

    나는 아내를 한국은행 조사1부에서 근무하면서 만났다. 사내 커플이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누구보다도 선생님께 먼저 신붓감을 보여드리고 결혼허락을 받고 싶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나로서는 선생님의 허락이 부모님의 허락과 다름없었다. 선생님과 사모님은 친히 음식을 준비해 우리를 초대하셨고, 어려워하는 아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면서 결혼하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부모님으로부터 승낙을 받은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로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나와 똑같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다.

    1973년 3월에 결혼했는데, 신혼생활도 선생님 댁 옆에 있는 조그만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매일 새벽 등산도 선생님과 같이 했고, 선생님 댁에 자주 방문해 가르침도 계속 받았다. 선생님은 결혼 후 군인의 박봉으로 고생하는 제자를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주선해주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다.

    이때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선생님의 ‘경제학원론’ 교과서 집필을 도운 것이었다. 이 책은 선생님께서 제대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만들어야겠다는 소명의식에서 1년여에 걸친 혼신의 노력 끝에 완성한 것으로, 이후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됐다. 이때 나와 함께 선생님을 도운 제자들은 동기생인 박종안, 김중수, 강호진 군과 2년 후배인 이정우(전 청와대 정책실장) 군이다.

    1975년에 내가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1979년 미국을 방문할 일이 생기자 바쁘신 와중에도 나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를 만나는 등 나의 공부를 독려해주셨다.

    1981년 내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KDI(한국개발연구원)에 근무할 때도 선생님은 제자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 함께 관악산 등반을 하자고 권유하셨다. 당시 선생님은 관악구 봉천동에 사셨고 나는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KDI 관사에 살았다. 우리는 지금의 서울대 호암회관 부근에서 새벽 5시에 만나 관악산 중턱에 있는 마당바위까지 오르는 일을 거의 매일 반복했다. 처음엔 젊은 내가 오히려 힘들어 몇 번씩이나 쉬어 가야 했는데,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기꺼이 기다려주시곤 하셨다.

    그러다 내 등산 실력도 점차 향상되어 나중에는 이 코스를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선생님과 함께 한 등산 덕분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산악회 회원들은 나를 선생님의 친아들로 알 정도로 닮았다고들 했는데, 모든 면에서 선생님과 닮고 싶었던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게 큰 기쁨이었다.

    꾸준한 등산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한국외대 무역학과 부교수로 부임한 후 과로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이때 내가 누워 있던 경희대 응급실로 제일 먼저 달려오신 분도 바로 선생님이셨다. 그날 굳어진 내 사지를 주물러주시면서 선생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김군! 목전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먼 훗날을 바라보게”라는 훈계였다. 이 천금(千金) 같은 꾸지람을 들은 후 나는 매사를 조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가능한 한 넓고 멀리 바라보면서 신중하게 추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있는 정부간 국제기관인 아시아태평양 개발센터(Asian and Pacific Development Center)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한 것과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남태평양에 있는 피지공화국의 총리 경제자문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 역시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다. 선생님께서 1982년에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ADB(아시아개발은행)에서 컨설턴트로 일하신 적이 있는데,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게 학문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시고 내게 권유하신 것이다.

    1995년 선생님께서 서울시 초대 민선(民選) 시장으로 출마하셨을 때 미력이나마 선생님을 도운 것은 내게 큰 영광이고 보람이었다. 1997년 대선(大選)에 선생님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셨을 때 선생님은 내게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다. 나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했으나 지금도 부족했음을 느끼고 있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2000년 오랜만에 다시 모인 서울대 경제학과 66학번 동기들. 뒷줄 왼쪽부터 박중희 대주전자재료 부회장,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김승진 한국외대 경상대학장, 유백열 전 장기신용은행 지점장, 강명구 농업연수원 부이사관, 김대중 두산중공업 부회장,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 민상기 서울대 교수, 김영섭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장명국 내일신문사 사장, 정일용 한국외대 교수, 이명선 연세대 교수.

    ‘미스터 클린’

    돌이켜보면 지난 40여 년 동안 선생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나를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셨다. 만약 선생님의 도움과 지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선생님의 한량없는 지도와 도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학자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할 뿐이다.

    선생님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근 팔십 평생 동안 군자(君子)의 길을 걸어오셨다. 이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배운 공맹(孔孟)사상에 연유한 듯하다. 선생님께서는 유학의 가르침대로 평생 인화(人和)와 중용(中庸)을 강조하는 군자의 길을 걸으셨다. 논어에서 인용한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몇 가지 좌우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군자들은 서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결코 서로 같지 않고, 소인들은 모두 같지만 서로 불화의 관계 속에 있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군자는 항상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않다.)

    선생님은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오셨다. 예를 들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등장한 신군부의 협조요청을 사양하셨다. 1995년 서울시장선거와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선생님의 캠페인은 지극히 깨끗했고 상대방을 고의로 헐뜯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맡으신 모든 공직(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장, 경제부총리, 한은 총재, 서울시장,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을 한 점 의혹 없이 효율적으로 수행하셨다. 선생님을 ‘미스터 클린’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깨끗하고 고고한 인생을 살아오셨다.

    또한 중국 송나라 시대의 ‘포청천’처럼 매사를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그리고 무리함이 없이 순리대로 풀어 나가셨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돌봐주시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가지고 선생님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실망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선생님의 주변엔 당신의 학문과 인격을 잘 아는 사람들만 남아 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이에 대해 전혀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 ‘보스 기질이 없다’ ‘조직하는 힘이 없다’ ‘정치력이 없다’고 혹평하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 같은 분이 어떻게 서울시장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당선되셨으며, 또 그렇게 많은 공직을 수행하셨는지 모르겠다. 정말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지금도 당신이 받으신 국민의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선생님은 “나는 서생으로 태어났고, 이제 다시 서생이 됐다”고 말씀하시고, 또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신다.

    선생님은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매사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추진하신다. 지금도 새벽 5시에 기상해 관악산 등반으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선생님의 건강은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이런 강한 의지력에서 기인한다. 1980년대 말 경제부총리로 재직할 때는 종종 봉천동 자택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 정부청사로 출근하셨다. 지금도 같이 등산을 하면 선생님을 따라 갈 제자는 별로 없다. 선생님이 ‘관악산 산신령’으로 불리시는 것도 아름다운 백미(白眉)와 백발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한 관악산 새벽 등반을 매일 지속적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지, 우리 제자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경제학을 위시한 모든 분야에 있어 해박한 지식과 탁견은 선생님의 방대한 독서와 사유, 그리고 강력한 의지에 힘입은 것이다.

    선생님은 매사에 치밀하시고 최선을 다하신다. 1997년 대선후보 시절, 하루에도 서너 건씩 연설해야 하는 바쁘신 중에도 제자들이 작성한 연설 원고를 직접 읽으시고 필요한 부분을 첨가하셨다. 과히 초인의 경지였다. 이와 같이 치밀하시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오늘의 선생님을 만들었다고 본다.

    진정한 의미의 선비

    선생님은 칼날같이 명석한 두뇌를 지녔고, 한번 듣거나 보면 결코 잊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계신다. 선생님 앞에서 부조리한 추론과 불합리한 궤변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는 마치 자상한 어머님과 같으시다. 외국을 방문하실 때면 아무리 바빠도 그곳에 있는 제자를 몸소 찾아가거나 꼭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하신다.

    선생님은 친지나 제자들과 더불어 약주를 드시면서 학문과 시국에 대해서 담소하시기를 즐기신다. 술을 전혀 못하는 나를 늘 재미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선생님은 학자들과 교유하기 좋아하시고 풍류를 즐기시는 진정한 의미의 선비다.

    또한 사랑과 규율로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완벽히 이루신 훌륭한 가장이시다. 노모가 환후 중이었을 때는 정성껏 간호하셨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도 장학금 일부를 한국으로 송금하셨으며, 네 아들을 모두 훌륭히 키워내셨다. 이렇듯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문에 비춰볼 때 선생님은 우리 한국이 20세기에 탄생시킨 훌륭한 경제학자며 교육자며 사상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기회에 선생님의 평생 반려자인 김남희 여사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사모님은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셔서 유족하게 지냈지만 결혼 후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 특히 선생님이 미국 유학하신 10년 동안 어려운 살림으로 시어머님을 모시고 세 아들을 양육하느라 무척 고생하셨다. 가계에 보태려고 집에서 수확한 감을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강릉시내에 있는 시장까지 십리 길을 수없이 걸으셨다고 한다. 이처럼 뒤에서 소리 없이 수고하신 사모님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선생님이 있었다고 본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김승진

    1948년 대구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국제경제학)

    한국은행 행원, KDI 연구위원, APDC 코디네이터, 피지 총리 경제자문관

    現 한국외대 경상대학장

    저서 : ‘Pure Trade Theory’ 등


    인생은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다. 어떠한 사람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조순 선생님은 수많은 제자에게 참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내게는 인생행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만약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상아탑이 아닌 다른 직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경제학자로서 또 한학자로서, 한국의 메마른 학문 풍토를 촉촉이 적셔주셨다. 나를 포함한 제자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선생님의 사상, 학문체계 및 경세(經世)철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의 건강과 선생님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지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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