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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쓰는 이 사람의 삶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연애편지, 한 달의 동거, 딸, 그리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사랑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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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븐에 과자를 구워주고, 내가 바닥에 앉을 때면 늘 손수건을 깔아주던 사람. 그가 떠난 지도 50년이 흘렀다. 대신 그 시절 뱃속에 있던 딸과 지금껏 인생의 벗으로 동행한다. 그리고 이틀에 한 번, 그가 묻힌 산에 올라 그와 함께 보낸다.”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여기 오래 묵은 연애편지 두 통이 있다. 우선 이 편지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확실히 나에겐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사랑하는 상대에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유해한 것이어서 결국은 둘 사이 불행밖에 더 초래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보세요. 이렇게도 안타까이 못 견디게 당신을 그리는 것이니 그 어디 하룬들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는 때를 가져볼 수 있어야지요.

확실히 공부하는 놈에게 사랑의 감미란 유해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19일 중이 되는 계(戒)를 받게 되는 것이랍니다. 몇 해나 중노릇을 해 먹게 될 것인지 씨원스레 속계의 미련 활활 털어버리고 독실 중으로만 지낼 수 있을지. 결심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지금만 해도 당신과 마음놓고 만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제날이기에 떡방아 찧고 제 올리고 성찬에 떡도 먹었습니다. 오후 세 시 넘어 혹여 서울 문인들 오지 않나 싶어 용하 행자 아이와 함께 아랫마을까지 나려갔습니다. 마음 한구석엔 당신이 와주었으면 싶은 마음 떠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내일 배달날이니 학수고대합니다. 정 아모 소식 없다 하드래도 내 자존심이니 뭐니 다 뿌리치고 당신의 곳 찾아가야겠습니다. 홧김으로 해선 뺨을 갈겨놓고만 싶습니다…. (중략) 보름달이 휘황합니다. 왠일인지 까닭없이 눈물겨워집니다. 이럴 것이면 당신을 괜히 알아두었다 싶습니다.”

1956년 8월15일과 20일에 씌어진 편지다. 이 편지를 쓴 이는 당시 오대산 월정사의 탄허스님 밑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문학평론가 김종후였다. 그는 이 편지를 쓴 지 일년 반 만에 사고로 죽었다. 사고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저렇게 김종후를, 뺨을 때리고만 싶은 그리움으로 내몰던 여자는 당시 낙산사에서 보육원 보모 노릇을 하고 있던 최옥분이었다. 김종후가 사고를 당할 때 이 편지를 받았던 여자의 뱃속에는 그들 자신도 모르는 새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유복녀로 태어난 그 아이가 지금 마흔아홉이 됐다.

지난 50년간 두 모녀는 세상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았다. 재혼 같은 건 단 한 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50년 만에 김종후가 남긴 8편의 평론과 2편의 에세이를 수습하여 얼마 전 ‘김종후의 삶과 문학’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젊어 요절했지만 한평생 지극한 그리움으로 떠받들려진 김종후의 삶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너무 일찍 사랑(결혼식을 치른 정식 남편이 되기도 전에 김종후는 세상을 떠났다)을 잃었지만 평생 한결같이 추억하고 그리워할 대상을 간직했던 최옥분은 불행한가. 행복한가.



한평생 그리워한 남편

저 의문을 풀자면 최옥분 모녀를 만나야 했다. 들끓는 볕을 머리에 이고 안광이 서늘하고 해맑은 청년 김종후의 사진이 든 책을 들고 나는 속초로 차를 몰았다. 인간의 행불행을 한 가지 잣대로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재단할 수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궁금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에 지상에 없는 한 남자만을, 그것도 결혼으로 묶인 사회적 관계도 아닌 한 남자의 죽음을 평생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살아온 사람, 그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죽은 김종후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아무리 네 개의 외국어에 능통하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공부했던, 드물게 보는 한국 문단의 기린아였다고 해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재능과 열정을 아까와하고 너무 이르게 그를 잃은 한국문단의 불운을 안타까와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다르다. 스물여섯에 일을 당한 후 평생을 고스란히 밀봉한 채 살아온 최옥분, 그의 삶의 좌표는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뱃속의 아이라니. 요즘같은 개방된 시대에도 미혼모가 된다는 건 전 인생을 건 도전일 텐데 1950년대 한국사회에서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막막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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