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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진정한 연기 정신 일깨워준 거목 - 이해랑

“끼와 열정이 아니라 기와 에네르기가 필요해!”

  • 장두이 연극배우, 인덕전문대 방송연예과 교수 du-yee@hanmail.net

진정한 연기 정신 일깨워준 거목 - 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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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하기 힘들지? 하지만 더 어려운건 작품 분석이야. 그 속은 망망대해거든. 마치 양파 껍질을 끝없이 벗겨내는 일 같지.”

공원의 가을을 쓸쓸히 관조하시던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재주가 많으니까 연기만 하지 말고 연출도 겸했으면 해.”

선생님의 그 말씀은 당시 연극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내겐 하나의 감로주였다. 선생님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본격적인 연극 강론을 이어가셨다.

“진정한 연기자는 연출자의 경지에 올라 있어야 해. 그래야 서로 대화가 되지. 셰익스피어를 봐. 작가지만 연출자, 그리고 연기자의 경지에서 작품을 썼거든. 바꿔 말해 연극은 인생을 꿰뚫어보는 인생 천리안의 직접 내지는 간접 체험 예술이야.”



마치 인도의 사두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일문일답을 주고받는 듯한 진풍경이었다. 난 선생님께 물었다.

“연극이 다른 예술보다 더 어려운 건 무엇 때문인가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지. 연극엔 문학이 있고, 시각적인 무대장치는 물론 의상, 조명, 분장과 같은 회화적인 요소에다 음악, 배우의 대사, 음향 같은 청각적인 요소도 있어. 또 살아 있는 율동과 액션의 무용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거든. 그뿐인가, 생생하게 현장에서 하는 예술로 관객이 함께 숨쉬고 있어. 그래서 이 어려운 연극에 한번 빠져들면 못 벗어나는 거지.”

어떤 연극론 책에서도 맛볼 수 없는, 선생님의 오랜 연극 인생에서 우러나온 걸쭉한 진국이었다.

“연기는 영혼의 폭발”

1977년, 그러니까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1년 전, 정부의 주선으로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가 치러졌다. 오직 창작극만 무대에 올리게 되어 있어 우리 연극 활성화에 청신호가 켜진 해였다. 그 가운데 극단 가교가 당시 젊은 작가 오태영의 ‘아득하면 되리라’란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주인공인 곱사등이가 그 마을의 처녀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나눈다는 ‘한국판 노트르담의 꼽추’와도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가교에서는 주인공 곱사등이 역엔 여지없이 배우 장두이가 적격이란 의견에 일치했고 곧바로 날 찾아왔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건 영혼의 일체감이었다. 동네 어귀 동산에서 연을 날리면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지금도 나의 가슴을 아련히 적신다. 지금도 변함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최주봉, 윤문식, 박인환 선배들과의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공연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분장실에서 이해랑 선생님이 객석에 오셨다고 알려줬다. 순간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처럼 공연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막이 오르고, 나는 진땀에 흠뻑 젖은 채 어떻게 공연했는지 몰랐다. 어느새 막이 내렸다. 분장을 다 지우고 극장 로비에서 스승님과 맞닥뜨렸다. 그건 외나무다리였다. 강의 시간이나 일상생활에서 별 표정 없는 모습에 익숙해 있던 내게 그날 밤 선생님의 얼굴은 전혀 달라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는가 하면 맥주를 함께 마시자고 ‘프러포즈’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우리는 광화문 근처까지 걸어가 어느 맥주집엘 들어갔다. 담갈색 맥주를 흥건하게 따르시며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공연 좋았어. 오랜만에 배우의 열정과 끼가 아닌 기(氣)를 봤지. 에너지가 보이더군. 연기는 바로 그것이거든. 몸에서 뿜어져 나와 극장 안을 가득히 메우는 에네르기, 거기에 연기의 자석이 숨어 있지.”

사실 난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에너지며 에네르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끼와 기는 어떻게 다른지….

“우리 배우들은 힘으로 연기를 하지. 하지만 진정한 힘은 물리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거든.”

선생님의 면도날처럼 예리한 지적에선 ‘비록 이제는 연출만 하고 있지만 역시 연극예술은 연기자의 예술’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당신 마음속에 연기를 다시 하고픈 열망의 불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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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이 연극배우, 인덕전문대 방송연예과 교수 du-y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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