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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19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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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계획의 원안은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명시적으로 지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1차산업의 생산물과 합판 등 민간기업의 단순 가공품 수출 실적이 예상외로 급속히 목표치를 상회했기 때문에 1964년 2월 보완계획의 완성 시점에 수출지향적 목표가 맹아적 형태나마 일정부분 반영됐다.

“수출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한국은 일본의 후방기지로서 세계경제의 분업구조 속에서 보세가공 등에 치중한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5·16 이전에는 2000만∼3000만달러에도 못 미치던 수출실적이 1962년에는 5700만달러, 1963년에는 8300만달러에 이르렀다. 1963년에는 공업제품 수출이 32.4%로 수위를 차지했으며(단순 가공품 합판이 최대 수출품으로 등장), 비식용원료 30.4%, 식료품 및 생동물은 20.6%로 점차 비중이 낮아졌다.

1963년 상반기에 이미 1차산업 생산물의 수출은 둔화되고 공산품 수출이 증대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1964년 2월의 수정안은 그러한 추세를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었다. 1963년 시정방침 경제정책의 12번째 항목에는 “수출산업은 외자도입에서 제제한(諸制限)을 배제할 것이고, 현유(現有)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전환할 것을 적극 조성할 것이며, 원료수출을 제한하고 가급적 제품수출로 전환”하자고 적혀 있다. 물론 아직 수출지상주의적 전환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1963년의 시정방침에서 강조한 수출 장려도 수입 억제와 ‘외환 수급의 적정’이라는 소극적인 차원과 연결된 것이었다.

수출 드라이브는 1965년 한일회담 타결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 가동됐다. 박정희가 이후 자주 사용한 개념인 ‘수출입국’을 명확히 한 것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작 시점이 아니라 1964년 후반 이후였다. 5·16군사정변 때 발표된 혁명공약에는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다한다’는 표현만 있을 뿐 수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1962년과 1963년의 여러 연설에도 수출에 대해선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1960년대 초기의 수출지원정책은 1950년대 후반의 각종 지원정책을 정비 내지는 강화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1964년 6월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한 후 10월5일 박정희는 자립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제1과제가 바로 수출진흥을 통한 외화 획득이며 경제시책의 중요한 목표를 ‘수출제일주의’로 삼고 있다고 역설했다. 수출지원정책 중 1950년대부터 존속한 지원정책을 제외한 나머지는 1964년과 1965년에 새로 추가된 것들이다.

민정(民政) 첫 해이던 1964년 전반기는 혼란과 시련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이를 진정시킨 후인 1964년 후반기, 1965년 초에 이르러서야 수출지상주의 깃발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5년 연두교서에서 ‘증산-수출-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처칠 총리가 외친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호소를 인용했다.

1964년 연두교서에서는 “정부가 수출진흥에 최대한 노력을 경주하고자” 한다고 언급했지만, 외환보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소극적 방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구호였으므로 1965년 연두교서의 적극적인 수출증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1차 계획 기간 중 1962년을 제외하고는 1963년부터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1965년엔 1억7000만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이에 박정희는 수출 1억달러 달성 기념으로 1964년 12월5일을 수출의 날로 제정했다. 1965년 이후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본격 수행되는 과정에 수출에 대한 맹신이 싹텄으며 ‘수출은 성장의 엔진’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사생결단적인 구호가 등장했다. 따라서 1965년경부터 수출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렸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을 현실화할 것(원화의 50% 평가절하)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직면한 한국 정부는 1964년 5월3일 공정환율을 달러당 130원대에서 255원으로 대폭 인상해 순응했는데 이것이 수출증대로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원화의 달러에 대한 환율이 고평가됐으며 무역 및 외환의 제한, 차별관세, 저금리 등으로 수출보다는 수입 또는 수입대체산업이 유리해서 수출산업이 부진했다. 그런데 환율현실화 조치로 고환율 시대가 도래하자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는 전기가 조성됐다.

상공부는 그간 산만하게 시행되던 제반 수출지원책을 1964년 6월24일 통합 정리해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하고 1965년부터 시행함으로써 정책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종합시책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출지원정책의 전범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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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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