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물고기도 지능 있고 고통 느낀다…생선회 먹는 것은 동물학대?

  • 이한음 과학평론가 lmgx@naver.com

    입력2007-12-06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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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고기도 고차원의 지능이 있다. 물고기는 소리 내어 대화하고 집단문화가 있으며 경작을 하기도 한다. 동물은 알면 알수록 지적 존재이며 인간과 비슷하다. 미래의 인류는 스테이크, 생선회, 치킨구이 등 ‘동물 신체의 일부’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먹는 지금의 ‘식(食)체계’를 포기할지 모른다.
    물고기도 지능 있고 고통 느낀다…생선회 먹는 것은 동물학대?
    우리는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갈 때도 그렇고, 친숙한 무언가를 더 자세히 살펴볼 때도 그렇다. 그런 지식은 틈새를 좁혀주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지식은 반대의 기능도 한다.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한국인임을 알면 가까운 느낌을 받다가 그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경계선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이든 상세히 파헤칠수록 틈새와 경계선은 점점 더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소한 그 틈새들이 때로는 통합을 거부하는 강력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물론 연속성을 원하면 전체를 보고 단절을 원하면 세부 경계선을 보는 식으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관점을 바꿀 수도 있지만,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도 생기게 마련이다.

    ‘지(知)적 존재’를 먹는 부담

    사람에게 친숙한 일정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종(種)을 먹이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도 그렇다. 개는 가축이 된 이래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사람의 친구도 되고, 파수꾼도 되고, 구조자도 되고, 화풀이 대상도 되고, 식량도 된다. 하지만 개를 방에 들이고 친구나 자식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개의 역할 중 하나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개는 알면 알수록 지능, 행동, 감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으니 ‘식량’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에 대한 지식은 개와 인간이 어떤 면에서는 동질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로 활용되며, 그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도 꽤 많아졌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떨까. 진화 단계로 볼 때 어류와 인간은 그리 가깝지 않은 편이다. 둘 사이에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가 놓여 있으니까. 진화적으로 좀 먼 친척이니 먹이로 삼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거기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류도 나름대로 영리하며, 그 지능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1990년대 초 생물학자 리 듀거킨은 관상어로 애용되는 거피를 야생에서 잡아다가 키우면서 재미있는 실험들을 했다. 그는 칸막이를 넣어 어항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양쪽 끝 방에 크기와 무늬가 비슷한 수컷을 한 마리씩 넣었다. 가운뎃 방에는 암컷을 놓았다. 적응 기간을 거친 뒤 그는 한쪽 칸막이를 열었다. 암컷은 그 방에 있는 수컷과 구애 행동을 했고, 그 광경을 다른 암컷이 지켜보게끔 했다.

    그런 다음 원래 암컷을 빼내고 지켜본 암컷을 풀어서 마음대로 짝을 선택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그 암컷은 모델이 됐던 암컷이 선택한 수컷을 선택했다. 20번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가 17번 나왔다. 거피는 짝을 선택할 때 다른 암컷의 행동을 보고 모방한 것이다. 그것은 거피가 수컷 개체의 특성을 구분할 수 있고, 모델 암컷이 선택한 수컷을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거피의 뇌는 콩알만하지만 ‘고등동물’ 못지않은 인지능력을 갖고 있었다.

    듀거킨은 후속 실험을 통해서 이 모방 요인과 유전적 요인의 상대적인 세기를 비교했다. 그가 잡아온 강의 거피들은 유전적으로는 밝은 오렌지색 수컷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관찰자 암컷에게 모델 암컷이 더 칙칙한 수컷을 선택하는 광경을 지켜보도록 한 뒤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러자 수컷이 다른 수컷에 비해 훨씬 더 칙칙할 때에는 모방 요인보다 유전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했지만, 칙칙한 정도가 덜할 때에는 모방 요인이 상당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방은 문화 현상이자 사회적 현상이다. 물고기 거피의 세계에서도 소위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고기도 기억력 있다

    그렇다면 어류의 기억력은 어떨까. 사람들은 어류의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해왔다. “금붕어는 3초면 잊는다”고 했다. 하지만 동굴의 물속에 사는 눈먼 동굴 물고기들을 연구한 학자들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토마스 테이케는 눈먼 동굴 물고기가 익숙한 환경에 있을 때와 낯선 환경에 있을 때 헤엄치는 행동이 달라진다고 했다.

    물고기도 지능 있고 고통 느낀다…생선회 먹는 것은 동물학대?

    상당수 물고기종은 작은 뇌 속에 집단생활을 위한 지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신체 절단에 따른 물고기의 고통감지능력은 고등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낯선 환경에 풀어놓거나 익숙한 환경에 변화를 주면 이 물고기는 감각기관인 옆줄에 환경 정보가 더 많이 와 닿도록 헤엄치는 속도를 빨리 한다. 그리고 경계지점의 특징들을 파악하기 위해 그 주변을 더 자주 돌아다닌다. 테이케는 이 행동을 이용해 물고기가 낯선 환경을 탐사하는 횟수와 지속시간을 측정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격리시켰다가 다시 집어넣는 실험을 했을 때, 처음 그 환경에 넣었을 때보다 탐사 시간이 짧았다. 격리 시간이 그보다 더 길어지면 처음 넣었을 때만큼 오랫동안 탐사했다. 탐사 시간은 지형에 따라 달라졌다. 어항이 좌우대칭일 때 탐사 시간이 더 길었다. 작은 막대 같은 것을 한쪽에 붙여서 대칭성을 파괴하면 탐사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런 실험 결과들은 눈먼 동굴 물고기가 탐사를 통해 뇌 속에 환경의 인지 지도를 작성하며, 그 지도를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곧 어류의 기억력이 형편없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레사 버트 드 페레라의 실험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많은 동물이 자신이 지각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먼 곳까지 제대로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껏해야 자기 주변밖에 감지할 수 없는데 어떻게 멀리까지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녀는 멕시코 눈먼 동굴 물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물고기의 지각 범위는 5cm에 불과하지만, 서식 공간은 30m나 된다. 그 넓은 공간을 어떻게 제대로 돌아다닐까.

    스페인의 크리스티나 브로글리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드 페레라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그들은 어류가 원시적이므로 뇌가 덜 발달하고 학습능력도 떨어질 것이라는 기존 견해를 반박했다. 그들은 발생학 및 신경해부학적으로 뇌의 진화는 더딘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어류나 육상 척추동물이나 학습 및 기억과 관련된 부위의 능력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즉 학습 및 기억을 담당한 뇌 부위는 일찌감치 진화했고 그 뒤로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류도 신경학적으로는 포유류나 조류처럼 복잡한 공간을 학습하고 기억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테이케는 어류가 주변 환경의 인지 지도를 작성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제는 지각 범위보다 더 넓은 공간의 지도를 어떻게 작성하는가에 있었다.

    머리에만 고통감지기 22개

    테레사는 육상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어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침팬지, 쥐, 비둘기, 꿀벌에 이르기까지 육상동물들은 특징적인 이정표들을 순서대로 연결해 서식 공간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녔다. 어류도 그렇지 않을까?

    그는 어항에 원형 통로를 만들어놓고 모양이 서로 다른 이정표 네 가지의 거리, 순서, 조합을 변화시켜봤다. 물고기들은 낯선 환경을 접하면 더 빠른 속도로 헤엄치면서 새로운 인지 지도를 작성하려 애썼다. 실험 결과 물고기들은 이정표의 절대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위치와 순서 변화에도 반응했다. 즉 뇌 속 공간 지도에 지형지물의 순서를 기입했고 각 공간을 순서대로 연결지음으로써 전체 서식 공간을 파악한 것이다.

    이렇듯 어류는 집단 문화가 있고, 기억력과 학습력이 있으며, 지형지물을 이용해 넓은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도 갖췄다. 인간과 물고기의 거리가 꽤 가까워진 듯하다. 그래도 아직 둘 사이에는 미지의 계곡이 있다. 이를테면 고통은 어떨까? 물고기도 우리처럼 고통을 느낄까? 물 밖으로 꺼냈을 때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행동은 덫이 발목을 꽉 물었을 때 아파서 펄쩍펄쩍 뛰는 사슴의 행동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물고기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고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원론적 문제에서부터 논란을 빚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한 연구진은 물고기가 고통을 느낀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냈다. 린 스너든 연구진은 무지개송어가 해로운 물질에 노출됐을 때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모르핀을 투여하자 무지개송어의 비정상적인 행동의 강도가 약해졌다. 최초의 비정상적 행동은 그저 반사반응이 아니라 해로운 물질을 접했을 때 느끼는 통증임이 분명했다.

    이어 연구진은 몸에 손상이 가해졌을 때 고통을 느끼는 ‘통각 수용기’가 물고기에게 있는지 살펴봤다. 그들은 마취시킨 물고기의 머리에 기계적 자극, 열 자극, 화학적 자극을 주면서 신경 활동을 기록했다. 그들은 물고기의 머리에서 적어도 한 가지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58개 찾아냈는데, 그중 22개가 기계적 압력과 고열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통각수용기라고 보았다. 그 가운데 18개는 화학적 자극에도 반응하는 다형 통각수용기였다. 그 수도 양서류, 조류, 포유류와 비슷했다. 통각수용기를 충분히 갖췄기에 물고기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동물의 권리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육상 동물이나 어류나 비슷한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면, 광어나 우럭이 입을 벙긋거리며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날것으로 그 신체를 먹어들어가는 ‘생선회’는 논쟁의 대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바늘로 물고기의 입을 꿰는 낚시 역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다는 결코 고요하지 않다

    어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주로 행동과 몸짓으로 대화한다. 우리 눈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는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하여 구애, 놀람, 두려움 등을 표현한다. 또한 서로 몸을 비벼대거나 꼬리를 건드리거나 씰룩거리거나 특이한 자세로 헤엄치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지느러미를 뻗음으로써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소리를 이용해서도 대화를 나눈다. 물고기는 입만 뻐끔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는 듯하지만, 특수한 청음기를 갖다대면 바닷속에서 물고기들이 내는 온갖 소리가 들린다. 물고기들은 음파가 뼈를 진동시키는 현상을 이용해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속귀로 소리를 듣는다. 또 옆줄로도 소리를 듣는다. 부레의 도움을 받아 소리를 더 명확히 듣는 종류도 있고, 척추를 이용해 진동을 전달하는 섬세한 방식을 쓰는 어류도 있다. 대부분의 물고기가 내는 소리는 진동수가 낮아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는 인간에게는 고요하지만, 정작 물고기에게는 온갖 소리로 가득 찬 곳이다.

    2003년 영국의 컬럼 브라운, 케번 랠런드, 젠스 크라우스 등 세 과학자는 어류의 지능을 연구한 500편이 넘는 논문을 조사했다. 그들은 최근 들어 연구자들이 어류의 심리·신적 능력에 관해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했다.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류가 훨씬 더 뛰어난 지능을 지닌 동물이라고 지적했다.

    어류는 물풀이나 돌을 모아 둥지나 피신처를 만드는 등 도구를 사용할 수 있고, 장기 기억도 지녔고, 복잡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자기 집단에 소속된 개체를 구별할 수도 있다. 어릴 때 다른 물고기들이 그물에 잡히는 것을 본 물고기는 그물을 피하기도 한다. 또 갈등을 조정하고 처벌하고 화해하는 등의 전략을 쓸 수 있으며, 서로 협력해 포식자를 감시하고 먹이를 잡는 문화 전통을 유지한다.

    연어처럼 민물에서는 후각을 이용해 자기 고향을 찾고, 바다에서는 자기를 이용해 멀리 항해하는 능력을 가진 종도 있다. 입맛에 맞는 바닷말은 키우고 맛이 없는 바닷말은 솎아내면서 경작을 하는 종도 있다. 컬럼 브라운은 나아가서 어류가 몇몇 분야에선 고등한 척추동물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컬럼 브라운과 빅토리아 브레이스웨이트는 어류의 뇌도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또 하나 색다른 점은 야생에서 포식자들을 접하며 자란 물고기는 새로운 대상을 볼 때 왼쪽 눈을 사용하는 반면 실험실에서 자란 물고기는 오른쪽 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뇌와 눈은 서로 반대로 이어지므로 실험실에서 자란 물고기는 좌뇌가 새로운 대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한다. 야생의 물고기는 더 경계하면서 살고 실험실의 물고기는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또 그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류도 좌뇌와 우뇌가 처리하는 정보가 서로 다름을 뜻한다. 야생의 물고기에 있어 새로운 대상은 대개 신기하거나 수상쩍은 것을 의미하므로 그 정보는 정서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야생의 물고기는 이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정서를 관장하는 우뇌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 직접 섭취’의 윤리성

    왜 동물은 좌뇌와 우뇌가 구분돼 있을까? 컬럼 브라운은 포식자를 근본적 원인으로 든다. 포식자의 위협이 큰 환경에서 살아온 물고기는 우뇌의 기능이 발달했다. 한편으로는 포식자를 감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을 주시하거나 먹이를 찾는 편이 생존에 도움이 됐기에 그런 편향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포식자의 위협이 크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물고기는 좌뇌와 우뇌의 역할 분화가 뚜렷하지 않았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은 유전적으로 내려올 수도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따른 학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는 듯했다.

    이상의 실험 결과 어류는 적어도 육상 고등동물이 지닌 지성적, 감성적 속성들을 거의 다 지닌 듯 여겨진다. 손발이나 날개 대신 물속 생활에 맞게 적응한 지느러미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망둑어처럼 지느러미를 발처럼 쓰는 물고기도 있고 등불을 달고 다니는 심해어류도 있으며 날치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종류도 있기는 하다.

    어류의 지능 연구가 계속될수록 또 다른 놀라운 속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하찮고 뒤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존재 안에 섬세하고 고등적인 구조가 들어 있는 사례를 우리는 자연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어류와 인간 사이의 거리는 크게 좁혀졌다. 양서류, 파충류, 조류와 인간의 거리도 어부지리로 그만큼 좁아진 셈이다.

    어류는 고통, 호기심, 두려움을 아는 감정의 소유자라는 문턱을 넘었다. 좌뇌와 우뇌의 구분이라는 문턱도 넘었다. 모방과 문화라는 문턱도 넘었다. 소리를 이용한 대화라는 문턱도 넘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어류와 인간 사이에 작은 틈새가 여전히 많다는 것이 보인다.

    온갖 해부학적, 진화적 차이가 있다. 어류의 지능이 뛰어나다는 주장이 가소롭게 들릴 정도로 씨가 마르도록 그물과 낚시에 걸려드는 단순한 물고기들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지금은 통합의 정신이 우세한 시대다. 인간의 오만함이 약해지고 관대함이 늘어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일반인도 이제는 양자론에서 말하는,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또한 미시세계는 거시세계와 다른 법칙이 통용되니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재단하지 말라는 말까지 관대하게 이해한다.

    동물들은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한 ‘지적 존재’가 되어간다. 이에 따라 동물을 먹잇감, 식량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부담은 인간의 내면에서 점증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연구가 더 깊이 진행될수록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래 음식은 형체 없는 ‘에너지’?

    물고기도 지능 있고 고통 느낀다…생선회 먹는 것은 동물학대?
    이한음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과학평론가, 전문번역가

    저서 및 역서 :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 ‘인간 본성에 대하여’ ‘조상 이야기’ ‘복제양 돌리’ ‘미리 보는 2050년 신세계’ ‘굿바이 프로이트’ ‘해변의 과학자들’ ‘만들어진 신’ 등


    이는 ‘개의 식용 논쟁’이라는 개별적 이슈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의 문명과 관련된 문화인류학적 문제가 될 것이다. 미래의 인간은 ‘삶의 지속에 필요한 단백질의 섭취’와 ‘지적-도덕적 품위 유지’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식생활에 있어 근본적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동물 신체의 일부’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직접 먹는 현재의 인류 문명체계가 미래에는 너무나 ‘야만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는 무엇을, 어떠한 형태로 섭취해야 할까. ‘채식주의’는 해답이 못 된다. 식물도 생물인 이상 그 안에도 상당히 고차원적인 지적 체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 인류의 음식은 가시적 형체가 없는 ‘에너지(열량)’와 ‘정보(맛과 질감)’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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