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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0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부잣집 방탕아와 기생, 그 질긴 연정이 부른 비극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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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때 개성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상한, 유영혜, 유의탁.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진 후 결혼식은 예정보다 한 시간 지연된 오후 4시에 시작됐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기생은 분노에 타오르는 눈으로 신랑과 신부를 번갈아가며 응시했고, 그런 기생을 경관이 한시도 놓치지 않고 감시했다. 주례는 준비한 원고를 절반도 읽지 않은 채 대충 주례사를 마무리했고, 주례사가 진행되는 동안 신랑은 차마 주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식장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결혼식이 끝나자 신랑 신부는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타고 허겁지겁 식장을 떠났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보낼 본정호텔에 짐을 풀었을 때, 호텔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신부가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아까 그 기생이 떡하니 서 있었다. 기생이 신부의 두 손을 덜컥 움켜쥐며 말했다.

“나는 나의 행복까지 두 사람에게 주면서 오늘의 결혼식을 길이길이 축복하겠소.”

신랑은 분노와 공포에 떨고 있는 신부를 달래 소파에 앉히고 기생을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신랑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신부 곁에 앉았을 때 기생이 문 밖에서 호텔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유 여사, 나는 본처이니 첩 노릇을 잘해주시오!”



이튿날 김상한과 유영혜는 평양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신문에는 ‘결혼식장에 연출된 삼각연애전 일막’이라는 장문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모름지기 청춘의 사랑은 괴로움의 연장이며 눈물과 한숨의 ‘플러스’다. 이것을 증명하는 ‘삼각연애 쟁의극(爭議劇)’이 27일 명치정(오늘날의 명동·편집자) 봉래각에서 발생했다. 오후 3시에 거행될 예정이었던 김상한과 유영혜의 행복한 ‘웨딩 마치’는 신랑의 옛날 애인인 조선권번 기생 최옥희 때문에 한 시간가량 지연돼 시작되었다. (‘결혼식장에 연출된 삼각연애전 일막’,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8일자)


한여름 새벽의 활극

김상한과 유영혜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내수정에 집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한동안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그들의 결혼식 이야기도 한 달쯤 지나자 시들해졌다.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8월2일 새벽, 유영혜는 내수정 신혼집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새벽 거리를 넋이 나간 듯 걸었다. 종로 화신상회까지 걸어가서 첫 전차를 타고 충신정 친정집으로 갔다. 유영혜는 친정집 문을 두드렸다. 새벽 5시도 되기 전이었다.

“언니가 꼭두새벽부터 어쩐 일이우?”

새벽잠을 설친 여동생이 놀라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버지는 평소 새벽잠이 적었지만 그날만큼은 그 시간까지 자고 있었다. 유영혜는 아버지가 깰까 봐 동생을 데리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대강의 내력을 들려줬다. 여동생은 분개했다.

“아니, 언니는 그 꼴을 보고만 있었단 말이우? 언니 바보야?”

잔뜩 화가 난 여동생은 말리는 언니를 뿌리치고 안방으로 달려가 잠자는 아버지를 깨워 언니가 찾아왔다고 알렸다. 집안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아버지는 이부자리도 걷지 않고 유영혜를 불러 새벽부터 찾아온 사연을 들었다. 유영혜가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네가 경솔하다. 돌아가라. 이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참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못 가요.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김상한이 있는 집에는 다시 가지 않겠어요.”

유영혜는 울면서 안방에서 뛰쳐나왔다. 대청마루에서 오빠 유의탁이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와 누이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유영혜를 붙잡아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유영혜는 오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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