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부안에 있는 휘목미술관 내부(위). 휘목미술관 앞 잔디광장에 있는 조각품.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쓰지 마쇼. 나도 이렇게 돈이 많이 들 줄 몰랐다니까.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의 거액이 듭디다.”
“앞으로 100억원 남짓 더 쏟아 부어야 할 것 같다”고 밝힌 그가 하얀 융보자기에 싸인 조각품 2점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헤쳤다. 손바닥만한 탈 모양의 작품과 엄지손가락 두 개를 포개놓은 듯한 작품이다. 조각가 권진규씨의 작품이라면서 “이게 얼마나 할 것 같소?” 하고 물었다. 미술품 가격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워 쉬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두 작품을 구입하는 데 2억원 조금 더 줬어요. 유명 화가와 조각가의 작품은 거의 다 수집했어요. 수집품 1000여 점 중엔 비싸지 않은 작품도 있긴 하지만. 작품 구입가가 모두 얼마인지 따로 계산해보지 않았어요. 미술관 부지 사고 건물 짓는 데 든 돈은 그림값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죠. 미술관의 생명은 작품이니까 돈 아끼지 않고 사들였어요.”
“파친코로 먹여살린 게 창피해서…”
그는 “죽으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남겨줄 생각이 없다”고 했다.
“부자라고 돈 쥐고 저세상 가는 거 봤소? 재산을 자식에게 남겨줄 생각이 없어요. 미술관은 재산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인 거고. 많은 사람이 내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간다면 그걸로 됐어요. 더 바라는 것도 없고. 전시실을 더 짓고 미술관을 완공한 뒤 여유가 있다면 능력이 있는데도 빛을 보지 못한 가난한 화가들을 돕고 싶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8세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형제를 책임진 채 힘겹게 살았다는 황씨는 “가난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황씨가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하게 된 데는 과거에 그가 벌인 사업이 밑천이 됐다. 25년 전 이른바 ‘파친코’라고 불리는 슬롯머신 사업에 손을 댄 그는 당시 적지 않은 재산을 일궜다. 황씨는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가족과 친지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과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 전력 때문에 남 앞에 나서기가 싫었어요. 그게 몸에 배었고요. 내가 누구라는 것,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처자식도 남편이,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했는지 몰랐어요. 파친코 해서 먹여살렸다는 게 창피했거든. 가족에게 그걸 감추기 위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가 큰 손해를 입었어요. 여태껏 미술시장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도 그런 과거가 적잖이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대개 건달이나 깡패들이 한 사업이었으니까. 지금 이 정도로나마 지난날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 그때 번 돈이 그림을 사랑하고 미술관을 짓는 초석이 됐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쪽 세상에 있다가 미술시장에 들어오니까 여긴 또 완전히 딴판입디다.”
재력, 권력, 주먹의 3박자
▼ 어떤 점에서요?
“그 세계(슬롯머신 업계)는 아무리 큰돈이 오가도 종이(계약서) 한 장 주고받지 않아요. 말이 곧 계약서지요. 파친코는 지분투자를 한 만큼 정확히 이익금을 나눠먹는 구조예요. 당시 잘되는 업장의 가격이 30억~40억원 했는데, 참여하고 싶은 지분만큼 돈을 건네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이에요. 몇억, 몇십억을 투자해도 계약서 한 장 안 쓰거든. 지분에 투자한 다음달부터 배당금이 착착 나와요. 그 동네는 말이 곧 법인 동네지요. 약속을 어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고. 그곳은 아군이 없어. 죄다 적군이지. 힘이 약하면 뺏기고 먹혀들어가니까. 먹혀들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하고.
그런데 이(미술) 시장은 흐름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림값이 딱히 얼마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두 업종 간의 명백한 차이점은, 그림은 돈이 있으면 사고 싶은 만큼 살 수 있지만 파친코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혼자서는 못한다는 거예요. ‘3합’이 잘 맞아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