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들은 “TV를 통한 정보 습득이 편한 대신에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후루이치 유키오는 “TV 보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건강보조식품을 사는 데 돈을 소비할 필요가 없으며 실질적인 인생의 활동 시간 역시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다. 그러나 그 시간으로 일군 소득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진 이상 직장이나 학교, 학원, 각종 모임으로 일정이 빽빽한 사람이 시간에 쫓길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TV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제때 마무리하지 못하고 “시간이 없다”며 투덜댈 때가 더 많다. 이에 관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몸으로, 눈으로 숱하게 확인한 바다.
직장인 이주승(가명·33)씨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씨는 오락 프로그램만 골라 본다. 한동안 미국 드라마에 심취했으나 한번 보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며 ‘끝장’을 보는 통에 얼마 전 시작한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3’은 아예 ‘맛’도 보지 않았다. ‘24’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1, 2’ 등을 보는 동안 TV에 끌려가는 ‘관계 역전’을 경험한 뒤로는 미국 드라마 시청을 경계하는 중이다.
이씨는 스스로 TV에 대한 자제력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씨의 아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얼마 전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평일 하루를 쉬게 된 이씨에게 부인 김미경(가명·30)씨가 출근하면서 몇 가지 ‘사소한’ 부탁을 했다. 아침에 식사대용으로 먹을 과일을 사다놓을 것,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릴 것, 주거래 은행에 관리비 자동이체를 신청할 것…. 김씨가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이씨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김씨가 부탁한 세 가지 중 처리된 건 한 가지도 없었다. 이씨는 한술 더 떠 “이발을 했어야 했는데…” 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씨는 종일 TV 보다, 자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선별해서 보는 게 더 어려워”
숙명여대 박사과정에 있는 황인정씨도 TV가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로챘는지 실감했다. 세 아이를 둔 주부인 황씨는 4년 전부터 TV 없이 지내다가 2년 전부터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몇몇 프로그램만 선별해 본다. 황씨는 “TV를 즐겨 볼 때는 늘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TV를 보면, 한공간에 있어도 대화가 잘 안 되죠. 아이들이 한창 TV에 빠져 있을 땐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도 본체만체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아빠 오기를 기다리고, 함께 붓글씨도 배워요.”
자영업을 하는 김종진(44)씨는 2005년 3월부터 TV를 보지 않는다. 그 전까지는 ‘TV광(狂)’이었다고 한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늘 TV가 켜져 있는 환경에서 자랐고, 결혼해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역시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저녁 내내 보고 주말에는 10시간 이상 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익숙한 생활이었기에 잘못된 습관이라거나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TV를 ‘끊은’ 결정적 계기는 ‘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라는 책이다. ‘한국일보’ 고재학 기자가 쓴 이 책은 갖가지 연구와 실천 사례를 바탕으로 TV가 가정생활, 특히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TV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선물받은 김씨는 책에 등장하는 ‘문제 가정’ 사례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확인하자마자 TV 코드를 싹둑 잘라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되지 굳이 TV를 없앨 필요까지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기준도 애매한 데다 아예 안 보는 것보다 선별해서 보는 게 더 어려운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