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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89년 학생들 요구로 교수 임용… 이제 ‘부르주아 서울대’는 마르크스를 버릴 것인가”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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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수행 교수를 처음 본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상이 동네 아저씨 같아 놀란다고 한다.

▼ 학생들의 요구로 서울대 교수가 됐는데, 후임도 없이 물러나니 책임감이나 안타까움 같은 게 있을 듯합니다.

“1989년 2월에 서울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학생들 덕분이에요. 당시 학부 교수회의에선 안 된다고 했거든요. 학생들이 수업 거부하고 농성하니까 결국 교수들이 졌지요. 그런데 지금은 학생운동이 약화됐고, 서울대생의 사고방식도 부르주아화했다고 할까.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롯한 비판적 학문에 대해 별 가치를 두지 않고, 공부해보고자 하는 의욕도 약해졌다고 봐야죠. 교수 임용은 학부 교수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됩니다. 아무래도 채용할 교수의 전공을 정할 때 교수진의 호불호가 크게 작용하지요. 그걸 제어할 수 있는 건 학생들뿐이죠.”

▼ 얼마 전 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생 10명 중 4명이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요. 다른 대학들보다 보수성향이 강한 편이라지요.

“그렇습니다. 돈 있는 집안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가정에서나 주위에서 실업자, 비정규직, 빈곤, 농민 등을 접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 한국 사회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 어떻게 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됐습니까.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습니까.



“공부할 형편이 못돼서 대구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에 들어갔어요. 당시 대구에서는 대구상업학교를 나오면 은행 취직이 가장 잘 됐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서울대 상과에 합격하면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이 나오는 제도가 있어서 서울대 상과에 진학했지요. 어릴 적부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가지 못하는 걸 보면서 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죠. 대학에선 동아리 ‘경우회’를 통해 경제학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선후배들과 토론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발견했고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우리말로 설명해주는 책을 만나볼 수 없어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었지요. 그때부터 ‘경제학 비판’에 눈을 뜬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살아온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거죠.”

김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던 시절, 안병직 현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이 전임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안 교수로부터 “많이 얻어먹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경우회’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이 선후배로 얽혀 있었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지만 4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각기 다른 ‘노선’에 서 있다.

내 인생의 은인

▼ 학생에서 은행원으로, 교수로, 노(老)교수로…시간이 흐르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던가요.

“그러지 않은 게, 제가 좀 미련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제 고등학교 때 별명이 곰입니다, 곰(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마르크스에 일편단심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의 부인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김 교수보다 먼저 외환은행에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른바 ‘사내 커플’로 인연을 맺어 1969년 9월 결혼했다. 김 교수가 런던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부인도 외환은행을 그만두고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금호실업, 삼성건설 런던지사에 다녔다.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고부턴 부인이 실질적인 가장이 돼 남편과 세 자녀를 먹여 살렸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서점에 마르크스 책들이 깔려 있고, 학교와 병원은 무료이고, 노동조합은 힘이 세고…. 자본주의의 선진적인 면에 큰 감명을 받았죠. 그런데 1972년 가을에 휴지를 구할 수 없게 됐어요. 자본가들이 삼림과 펄프를 매점·매석한 바람에 휴지가 귀해져서 한 사람에게 두루마리 휴지 한 개씩만 팔았어요. 이런 투기 열풍이 1973년 석유 가격 폭등을 계기로 완전히 파탄에 빠져서 기업이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실업과 빈곤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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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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