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사상 최악의 오보가 불러온 사상 최악의 참사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02-06 1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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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7월5일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폐허가 된 평양 중국인 거리와 사건의 발단이 된 ’조선일보’ 1931년 7월3일자(위).

    1931년 7월5일, 뜨거운 여름 햇살은 오후 8시가 지나서야 자취를 감췄다. 평양 시내는 일요일 저녁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뜩 화난 표정으로 핏대를 세워 열변을 토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내 중심가의 중국음식점 동승루 앞에 10여 명의 소년이 모여 야유를 퍼붓다가 일제히 돌을 던졌다. 조그만 돌멩이들은 유리창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장정 60여 명이 몰려왔다. 장정들은 소년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이번엔 주먹만한 돌덩이들이 동승루를 강타했다. 출입문과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졌다.

    “복수하자!”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 없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성을 듣고, 여기저기서 군중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군중은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성난 군중은 돌과 각목을 들고 동승루 안으로 밀려들어가 가구와 집기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허름한 목조건물에 수백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기둥이 흔들리고 마룻바닥이 갈라졌다.

    “집주인은 조선인이다. 집은 부수지 말자!”



    선두에 선 장정이 외치자 군중은 썰물처럼 동승루를 빠져나왔다. 군중이 휩쓸고 지나간 가게에 성한 물건이라곤 2층 한 귀퉁이에 걸린 전화 한 대뿐이었다. 군중은 여세를 몰아 대동강변 중국집과 중국요정을 모조리 파괴하고 대동문통 대로로 몰려나왔다.

    대동문통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포목점과 잡화점이 밀집한 서문통이었다. 군중은 200~300명씩 떼를 지어 중국인 상점으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몇몇은 전봇대만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영치기 영차’ 소리에 장단을 맞춰 굳게 닫힌 문을 부쉈다. 기관총을 난사하듯 수백 군중이 일제히 돌을 던지자 제아무리 튼튼한 문도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죄다 박살났다.

    문이 열리자 수십명의 장정이 상점 안으로 뛰어들어 불난 집에서 물건을 집어내듯 닥치는 대로 상품과 집기를 길 밖으로 내던졌다.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길 밖으로 내팽개쳐진 상품을 밟고 찢고 뜯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은 깡그리 파괴된 중국인 상점에 불을 놓았다.

    중국인 대학살

    어느덧 군중 숫자가 1만을 훌쩍 넘어섰다. 남문정에서 종로통까지 평양시내 전역을 성난 군중이 점령했다. 시내 교통은 완전히 마비됐고, 인파에 치여 걸어 다니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길 위에는 주단, 포목, 잡화 등 찢어지고 깨진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중국인들은 성난 군중을 피해 도망 다니며 흐느껴 울었다.

    밤 11시, 폭동이 시작된 지 세 시간이 흘렀다. 평양 시내 웬만한 중국인 상점과 가옥은 거진 파괴됐다. 더 이상 파괴할 것이 없어 중국인을 향한 폭력도 끝나는 듯했다. 그때 군중 사이에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폭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평양역으로 몰려든 중국인들.

    “중국인 목욕탕 영후탕에서 목욕하던 조선인 네 명이 칼에 맞아 죽었다!”

    “시외 대치령리에서 조선인 서른 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당했다!”

    “서성리에서 중국인이 작당해 무기를 들고 조선인을 살해하며 시내로 진군하고 있다!”

    “만주 창춘에서 동포 예순 명이 학살되었다!”

    세 시간 동안 파괴와 약탈의 희열을 맛본 군중에겐 유언비어를 가려낼 분별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유언비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한껏 부풀려졌다.

    “중국인의 씨를 말리자!”

    누군가가 외치자, 군중은 일순간 피에 주린 이리떼로 돌변했다. 피가 흥건히 묻은 곤봉을 든 장정 예닐곱 명을 앞세우고 무리를 지어 토끼몰이하듯 중국인을 찾아 헤맸다. 잿더미가 된 가게와 집을 정리하던 중국인들은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다.

    “저기 중국인이다!”

    중국인이 발견되면 수백명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가 기어이 때려눕혔다. 군중에게 발각된 중국인들은 채 10분이 못 돼 피투성이 시체가 돼 길가에 널브러졌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안면이 굳어버린 노인의 시체, 고사리 같은 두 주먹을 예쁘장하게 쥐고 두 눈을 뜬 채 땅바닥에 엎어진 영아의 시체, 젖먹이를 품에 안고 맞아죽은 여인의 시체, 온몸에 피멍이 든 임신부의 시체…. 거리에는 중국인들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평양 시내가 무정부 상태에 빠진 그날 밤,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자 간밤의 참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길 위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해 보행조차 곤란했고, 전깃줄에는 찢어진 이불이 걸려 새벽바람에 흩날렸다. 평양 시내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전락했다. 온 도시가 쓰레기더미와 시체로 뒤덮였다. 서성리에 사는 중국인 조성암의 집에서만 한꺼번에 10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밤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경찰은 폭동의 기세가 한풀 꺾인 아침에야 중무장을 하고 출동했다. 뒤늦게 나타난 경찰은 밤새 공포에 떤 중국인들을 호위해 중국영사관으로 대피시켰다. 약탈과 살인은 경찰이 출동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피난 가던 중국인 한 명이 대낮에 몰매를 맞고 살해됐고, 지하실에 숨어 있던 중국인 아홉 명이 갑자기 들이닥친 군중의 손에 몰살당했다.

    그날 오후 1000여 명의 군중이 흰색 깃발을 휘날리며 기림리 중국인 피신처를 습격했다. 30여 명의 장정을 태운 트럭 한 대가 군중 사이를 오가며 폭동을 선동했다. 경찰이 중국인 보호를 명분으로 시위대에 발포해 조선인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날이 저물자 폭동은 평양 시외와 진남포까지 번졌다. 중국인 상점과 가옥은 모조리 불탔고, 곳곳에서 폭행과 살육이 자행됐다. 불타는 중국인 상점과 가옥 때문에 그날 밤 평양 하늘은 유난히 밝았다.

    총독부는 이틀 동안의 폭동으로 평양에서만 중국인 119명이 사망하고, 163명이 부상당하고, 63명이 실종됐으며, 방화 49건, 가옥 파괴 289건, 재산 손실 250만원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조사 결과는 사망자 133명, 부상자 289명, 실종자 72명 등으로 피해 규모가 더 컸다. 뒤늦게 폭동 주동자 색출에 나선 경찰은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검거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상 최악의 오보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은 사흘 전인 1931년 7월2일 한밤중에 간행된 ‘조선일보’의 호외에서 촉발됐다.

    싼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만주 완바오산(萬寶山) 부근 싼싱바오에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피땀 흘려 닦은 수로를 중국 관민 400여 명이 모조리 파괴, 매립해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호외는 이튿날 밤에도 이어졌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완바오산 사건의 발단이 된 싼싱바오의 수로.

    수로 파괴 이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조선농민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조선농민이 ‘살상’되었고, 150m 거리를 두고 대치하던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호외에 적힌 대로라면, 야박한 중국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생활 터전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은 셈이었다. 연이틀 한밤중에 간행된 호외는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전보의 발신지가 ‘싼싱바오’가 아니라 ‘창춘’인 것을 눈여겨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선일보’ 창춘 특파원 김이삼은 일본영사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서둘러 타전했고, 서울의 본사 편집국은 전보만 믿고 부랴부랴 호외를 간행했다. 너무 서둘러 간행한 나머지 ‘부상’이 ‘살상’으로 오기된 것조차 걸러내지 못했다.

    역사상 최악의 오보는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첫 번째 호외가 간행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7월3일 새벽 2시, 인천 율목리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잠결에 놀라서 뛰쳐나온 중국인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주동자 7명을 체포하는 데 만족했다.

    날이 밝자 인천경찰서 도가와 서장은 인천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번인 순사까지 소집하는 한편 경기도 경찰부에서 40명의 순사를 지원받아 시내 곳곳에 비치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시내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들을 중국영사관으로 대피시켰다. 인천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자 중국인 거류지로 또다시 성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수천 군중은 철통 같은 경찰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중국인 가옥과 요릿집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이튿날부터 전국적으로 번졌다. 7월3일 밤 11시, 서울 봉래정 중국음식점 동문루에 10여 명의 장정이 몰려가 돌을 던졌으나 이웃집인 동북여관 유리창 넉 장을 깨뜨리는 데 그쳤고, 같은 시간 30여 명의 장정들이 장기환의 호떡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 수십장을 깨뜨렸다. 이후 태평통 유효서의 호떡집, 북미창정 중국집 고빈루, 남미창정 서수승의 호떡집, 봉래정 중국집 중화루, 무교정 중국음식점 다옥점 등에 차례로 돌이 날아들었다. 7월3일 밤부터 4일 오전까지 서울에서만 55건의 폭행과 기물파손 사건이 발생했고, 47명이 검거됐다. 7월4일 밤 평양에서는 6건의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고, 중국인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호외 이후 인천, 서울, 평양, 진남포, 부산, 전주, 대구, 개성,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청주, 공주, 이리, 군산, 안주, 재령, 신의주, 의주, 선천, 수원, 청주, 춘천, 마산, 선천, 운산, 해주, 안변 등 전국적으로 400여 회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났다. 심지어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있는 중국인들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일주일 남짓 지속된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전국적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중국인이 사망했고, 546명이 부상당했으며, 91명이 실종됐다. 조선에 있던 7만여 명의 중국인 중 1만7000여 명이 영사관에 피신했고, 재산 피해도 400만원(현재 가치 4000억원)에 달했다. 인명피해의 대부분은 7월5일 밤 무정부 상태에 놓인 평양에서 발생했다.

    완바오산 사건의 진상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중국인 배척 폭동 진압을 위해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싼싱바오에서 조선 농민이 중국 관민의 손에 ‘살상’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오보였지만,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7월1일, 중국 농민 400여 명은 실제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애써 파놓은 수로를 파괴했다. 하지만 이날의 충돌은 중국 농민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조선 농민은 수로를 건설하기 전 합당한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고, 충돌 직후 일본 경찰은 기껏해야 삽이나 곡괭이를 든 중국 농민들을 향해 서른여덟 발의 실탄을 발포했다. 조선, 중국, 일본 3국의 복잡미묘한 이해관계가 충돌해 이른바 ‘완바오산 사건’이 일어났다.

    한일 강제합방 이후 조선인의 국적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국적 역시 일본이었다. 중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중국적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중국의 토지를 소유하려면 국적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변경해야 했는데, 일본은 원칙적으로 조선인의 일본 국적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대다수의 조선인은 중국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토지를 장기임차해서 경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1931년 4월, 완바오산 지역 싼싱바오로 이주한 조선 농민 200여 명은 중국인 허융더로부터 미개간지를 임차했다. 하지만 허융더 역시 그 땅의 지주가 아니라 임차인일 뿐이었다. 허융더가 지주와 맺은 임대차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만일 지방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허융더는 지방정부의 허가가 나기도 전에 임차한 땅을 조선 농민에게 재임대했다. 법적으로 허융더와 조선농민이 맺은 계약은 무효였다.

    미개간지를 임차한 직후, 조선 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20여 리 떨어진 이퉁허(伊通河)의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수로는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했다. 수로가 지나가는 땅도 사유지였지만, 조선 농민은 지주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로 공사를 단행했다.

    중국 농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남의 땅을 제멋대로 파헤쳐 수로를 놓는 것도 문제였지만, 멀쩡한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댐을 쌓는 바람에 하천을 통한 뱃길이 막히고, 수로 부근 논밭이 상습 침수지역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방정부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로 공사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지만 조선 농민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창춘 주재 일본영사는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경찰 60여 명을 싼싱바오로 파견했다. 조선 농민의 수로 공사는 엉뚱하게도 중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가 완성되자, 격분한 중국농민 400여 명은 농기구를 들고 800m가량의 수로를 막았다. 일본 경찰은 수로를 파괴하는 중국농민에게 발포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7월1일의 충돌 이후 중국과 일본이 외교적으로 옥신각신할 뿐 완바오산 일대에서 더 이상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영사관의 허위 정보와 이를 받아쓴 오보 탓에 조선에 이주한 중국인만 억울하게 수난을 겪었다.

    폭동이 남긴 희비극

    폭동의 시간 동안, 조선반도 곳곳에서는 다양한 사건이 쏟아졌다. 당시 잡지와 신문은 후일담 삼아 갖가지 에피소드를 보도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인천 화교소학교에는 수백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피난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데 별안간 ‘쿵’ 소리가 났다. 조금 후 피난민 사이에서 “조선인이 습격한다!”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껴 우는 사람, 유리창을 깨뜨리고 도망가는 사람,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는 비장한 각오로 책상을 부숴 각목을 한 쪽씩 들고 현관을 나서는 사람…. 피난민 수용소 안은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서로 밀고 밀치며 건물을 빠져나오니 조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피난민을 보호하려고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이 피로가 쌓여 졸다가 앉아 있던 책상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쿵’ 소리가 난 것이었다. 소동이 일단락됐을 때, 교실 안의 책상과 걸상은 모조리 부서져 있었다.

    평양에서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난 직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마루텐 시계점은 ‘중국인 3인 해고’란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써붙여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인천의 중국음식점 일화루(日華樓)는 ‘이 집 주인은 일본인이오’ 하고 큼지막하게 써 붙였다. 일화루 주인이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중국집 이름이 중화루(中華樓)가 아닌 것만으로도 일화루는 피해를 보지 않았다.

    서울 서소문정에 사는 중국인들은 폭동 기간에 조선옷으로 변장을 하고 다녔는데, 조선옷을 사러 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일본 옷을 사다 입었다. 하지만 게다(일본 나막신)가 발에 맞지 않아 기우뚱거리며 걸어서 멀리서도 한눈에 가짜 일본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짜 일본인들이 폭도에게 발각되면 더 심하게 구타당했다.

    7월5일 오후 7시, 서울의 중국영사관에는 4000여 명의 중국인 피난민이 모여들어 입추의 여지없이 혼잡했다. 어수선한 영사관 한구석에서 별안간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8000개의 눈동자는 일제히 비명을 지른 여자에게 쏠렸다. 배가 남산만큼 부른 임신부가 산기를 느끼고 지르는 비명이었다.

    신당리에 사는 중국인 주수행의 아내는 몇 시간 동안의 진통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찜통 같은 영사관에서 의사는커녕 산파의 도움도 없이 쌍둥이를 출산했지만, 다행히 산모와 쌍둥이 남매 모두 건강했다. 피난민들은 아수라장에서 태어난 쌍둥이를 보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연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밖에도 7월12일 평양의 중국인 피난민 천막에서 진씨가 쌍둥이를 낳는 등 폭동 기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무려 다섯 쌍이나 됐다.

    7월5일, 서울 돈의동 열빈루에서 말끔한 신사복을 입은 조선인 네댓 명이 중국요리를 먹고 나왔다. 열빈루 주변을 배회하던 청년 몇 사람이 신사들을 에워싸고 을러대기 시작했다.

    “이놈들, 네놈들도 조선 사람이냐. 이와 같은 불경기에 뱃속 편하게 요리 먹으러 다니는 것도 괘씸한 일이거늘 조선 동포는 만주에서 되놈에게 박해를 당하는 판에 너희 놈들은 명색이 신사니 유지니 하면서도 되놈에게 돈을 주고 요리를 먹는단 말이냐. 너 같은 놈들은 봉변을 당해도 싸다!”

    청년들은 신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양복쟁이 신사들은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그저 “예,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더 큰 곤욕을 가까스로 피했다.

    ‘정감록’의 참언

    서대문 밖 관동실업전수학교 앞길에는 평소 중국인 야채장수가 자주 오갔다. 7월5일, 조선인 야채장수 김달윤이 광동실업전수학교 앞길을 지날 때였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옷에 모자를 쓴 행색이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야채 짐까지 중국인 것과 흡사했다. 부근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김달윤을 중국인으로 잘못 알고 일제히 덤벼들어 마구 때렸다.

    “아이고, 왜들 그러십니까.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김달윤이 자신은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거듭 항변했지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라 이놈 보게, 이런 흉측한 되놈 보게. 네가 아무리 조선말을 잘하기로 우리가 모를 줄 아냐?”

    힐난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결국에는 김달윤이 조선 사람인 것을 알고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한번 껄껄 웃고 기분 좋게 화해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폭행, 기물파손, 방화 등의 혐의로 한꺼번에 300~400명이 검거돼 수감됐다. 평상시 30~40명이 사용하기도 부족한 화장실을 열 배가 넘는 수감자가 사용하다 보니 화장실에 가려면 번호표를 받아 기다려야 했다. 대변 한번 보려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니 고등관 얻어 하기보다 힘든 지경이었다.

    7월7일 오후 7시, 순찰을 다니던 동대문경찰서 경무주임이 유치장 문 앞에 수십명의 장정이 인상을 찡그리고 발꿈치로 엉덩이를 괴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앉아 있는 모양이 하도 이상해 혹시 간수가 해괴한 벌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간수에게 물었다.

    “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문 앞에 몰려 앉아 있는가. 또 안색은 왜 저렇게 이상한가?”

    간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저 사람들은 모두 ‘출분(出糞) 신청’을 한 자들로 번호대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7월4일 밤, 서울 서소문정에서 조선인 군중 5000여 명이 중국인거리를 습격하려고 모여들었다. 중국인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전등까지 꺼버리고 숨어 있었다. 장정들은 곤봉과 철봉을 들고 만약을 대비했다. 서대문대로를 지나가던 한 중국인이 형세가 급박한 것을 깨닫고 골목 안에 있는 중국인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중국인 집 문들은 죄다 굳게 잠겨 있었다.

    쫓기던 중국인은 얼떨결에 발길로 어느 집 대문을 걷어찼다. 공포에 떨고 있던 집주인은 조선인이 자기 집을 습격하는 줄 알고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전 가족이 일제히 곤봉을 들고 어두운 밤에 문을 열고 나와서 대문 밖에 서 있는 사내를 마구 구타했다. 대문 밖의 중국인도 영문을 알지 못해 주인 가족과 어울려 싸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인들끼리 서로 때린 것이었다. 경황없는 중에도 크게 한번 웃고 화해했다. 주인은 사과의 뜻으로 중국인 사내를 집안으로 들여 식사를 한턱 냈다.

    7월5일, 평양에서는 ‘정감록’에 중국인 손에 조선인은 죄다 죽는다는 참언(讖言)이 들어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정감록에 ‘어양망어고월(魚羊亡於古月) 고월망어어양(古月亡於魚羊)’이라는 글귀가 전한다. 어양(魚羊)이란 선(鮮)자요, 고월(古月)은 호(胡)자니 그것은 이번에 만주에서 오랑캐(胡人)에게 조선인이 몰살당하고, 조선에서 또 오랑캐가 몰살당한다는 말이다.”

    폭동 당시 떠돈 유언비어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정감록’의 참언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

    1931년 7월, 완바오산 사건 직후 조선 전역에서 발생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우리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인 배척 폭동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 일본 경찰은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중국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창춘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이삼 특파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했으며, 평양에서 최악의 폭동이 발생한 날 밤 경찰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곧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려는 일본의 교묘한 음모 때문에 발생한 불상사였다고 설명하지만, 설령 그러한 음모가 작용했다 하더라도 조선인이 100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은 즉각 중국에도 알려졌다. 박해받던 조선 농민들의 신변은 더 위태로워졌고, 조선에서 중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의 조선인들도 창춘의 일본영사관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중국에서 조선 농민들에 대한 보복 폭행은 발생하지 않았다.

    김이삼 특파원은 중국인과 조선인 앞으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한용운, 안재홍,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은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 전체의 의사가 아님을 천명하고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완바오산 사건은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모두 조금씩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 중국인은 먹고살 것이 없어 이주한 조선인들을 매정하게 박대했고, 조선인은 일본 경찰의 그늘에 숨어 중국의 공권력과 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일본은 조선인을 앞세워 대륙 진출을 위한 야욕을 드러냈다. 세 민족이 조금씩 잘못을 저질렀지만,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 탓으로 조선인만 가해자로 몰렸다.

    일본 제국주의자가 음모를 꾸몄더라도, 만약 조선인과 중국인 두 민족이 서로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완바오산 사건이나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인 배척 폭동은 개인과 개인 사이와 마찬가지로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이해와 배려가 최선의 선택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때로는 부끄러운 역사가 영광스러운 역사보다 더 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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