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소설은 글로 짓는 집… 같은 집 또 지을 수야 없죠”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8-02-11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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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원의 작품세계는 스펙트럼이 넓다. ‘19세’와 ‘은비령’ ‘마흔에게 바친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가 한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상상력이 탁월하다. 무엇보다 그는 야멸차고, 동정 없고, 까칠한 세상에서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이순원(50·李舜源) 형 집에서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여서 반가운 마음에 덜컥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느끼기 시작한 건데, 그동안 내가 바쁘게 살아서인지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내 앞에 떨어지는 ‘급한 일’들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나는 꺼져가는 모닥불 불씨처럼 겨우 눈을 뜨고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그런 나에게, 벌거벗은 마음에, 세상은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를 몰고 왔다. 정호승 시인의 ‘세상은 나에게 소주 한 잔 사주지 않았다’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이런 날에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그리운 법이다. 내가 그리하진 못했어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일 터.

    이순원과 통화를 하고 나자 가물거리며 남아 있던 마음의 불씨가 타오른다. 그 불쏘시개가 바로 저녁식사 약속이다. 아주 오랜만에 통화했는데, 어젯밤에 늦도록 술 마시고 아침에 안부인사하는 것 같다. 그렇게 이순원은 늘 편안하고 다정하다. 야멸차고, 동정 없고, 까칠한 세상에 그는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고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아늑한 환상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가니 몇 년 전에 본 풍경과 다른 게 하나 없다. 반갑게 맞아주는 이순원 역시 내 눈에는 별로 변한 게 없다. 부인에게 인사하고 서재에 마주 앉아 노트를 펼치니 금세 부인이 따뜻한 차를 내온다. 향기로운 국산 차다.



    오래된 나무 책상엔 구형 노트북이 올라가 있고, 책장엔 빈틈없이 책들이 일어나 있거나 누워 있다. 빡빡한 공간이지만, 나무 우거진 깊은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어디선가 다람쥐가 도토리를 물고 뽀르르 달려갈 것 같다. 그런 아늑한 환상에 젖다 차를 마시면서 현실로 돌아오자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했다.

    “이제 쉰을 넘겼어요. 새해 들어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그동안 내가 참 특별한 대접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고마운 일이지요.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의 책상 위에 올라 앉은 책들 중엔 최근에 나온 소설이 많았는데, 의외로 언론 리뷰가 거의 없었고 서점 판매 역시 부진해 내가 모르는 책들, 그냥 나왔다 지나쳐가는 작품이 많았다. 이순원은 “이분들의 소설도 좋은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는 ‘겸손’한 이야기다. 그래, 맞다. 그는 ‘겸(謙)’자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주역의 64괘 중에서 가장 좋은 괘가 ‘겸’괘라고 미술평론가 손철주 형이 가르쳐주었다. 새해에는 이 글자를 마음에 품고 살라는 덕담이었다. 나는 이순원을 겸손을 타고난 사람으로 본다. 그건 꾸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겸손으로 마음을 꾸민다면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다. 하지만 이순원은 안과 겉이 늘 연결돼 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속을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겸손해 보이는 건가 싶다.

    “이제는 죽어도 호상(好喪)인 나이잖아요. 물론 옛 시절 이야기이긴 하지만.”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옛 시절이긴 하지만 쉰을 넘기고 죽으면 잘 산 거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도 선위(禪位)를 준비하는 나이다. 그런데 요즘 세파는 잘 먹고 잘살아서인지 이런 말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필자도 쉰이 멀지 않았다. 그래, 이미 요절한 몇몇 친구에 비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다가도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어 심한 자괴감이 드는 그런 나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판단한다. 몸도 마음도 아직 사춘기다. 그래서 나도 쉰부터는 뭘 좀 하고 싶은 마음에 준비만 하고 있는 내 모양이 한심하긴 하지만, 그는 작품에서나 인간에서나 이미 한 고비를 넘긴 중견작가다. 그는 쉰이라는 나이가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와준 게 고맙다고 했다.

    ‘할아버지 나무’

    특별히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여기까지 온 세월에 대한 고마움, 마흔에 쓴 소설인 ‘은비령’을 넘어온 심경일까. 그는 쉰이 되던 해에 장편 소설 ‘나무’를 썼다. 그로부터 이미 몇 년 전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만나니 반가웠다.

    소설에서 그는 나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싹 빼버린 소설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나무의 결에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었다’고 번역한다. ‘나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쓴 것이다.

    “어렵던 시절, 할아버지는 밤 다섯 말을 마을 산에 심었어요. 식구들 누구도 그 밤을 먹을 수 없었지요. 이웃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해였지요.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강원도 강릉의 한 촌락에서 할아버지는 묵묵히 밤나무를 심은 겁니다. 어린 우리들은 그 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라고 불렀어요.”

    100년 전의 이야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100년이면 나무가 변한다. 할아버지는 밤나무 외에도 평생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나무들에는 가을마다 수백 접의 밤이 열렸고, 집 안에 심은 자두나무와 앵두나무 석류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했다. 뽕나무가 밭둑마다 늘어섰고,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구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가 경술국치에 나무를 심은 심경을 나약한 글쟁이가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그의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어 세상의 슬픔을 내면으로부터 다스렸다면, 이순원은 세상에 소설을 심었다. 그는 할아버지 나무를 오랫동안 가슴에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열매가 달리듯,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동화 스타일로 이야기를 꾸몄다.

    100년이 흐르는 동안 밤나무들은 세상을 떠나, 그 자리를 다른 나무에게 내어주었다. 이제 할아버지 나무는 한 그루만 남았다. 밑동이 썩고 줄기에 구멍이 났다. 그리고 가지는 내리는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휘어지고 부러졌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할아버지의 오랜 세월이지요. 그 시간을 견딘 보상으로 지금도 가을이면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밤을 던져주십니다.”

    전통 유교마을 출신

    이순원을 알기 위해서는 강원도를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 나무가 자라는 그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 위촌리다. 행정지명인 위촌리 대신에 사람들은 ‘우추리’로 부른다고 한다. 우추리는 강원도 산골 촌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우추리 이장님의 연설’을 검색하면 독특한 강원도 사투리로 마을 주민들에게 연설하는 기가 막히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순원은 한번 들어보라면서 인터넷으로 우촌리 이장의 연설을 들려주었다.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동네 도사견이 헐거운 목줄을 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혀를 내밀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으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숨고, 혹시 변소에 숨었으면 냄새가 나더라도 동네 장정들이 도사견을 잡을 때까지 숨어 있고, 방송을 듣는 장정들은 어서 마을회관으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는 도사견은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이장님 연설을 듣는 동안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배꼽이 빠져 방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우추리’는 지금도 촌장이 있는 마을이다. 전통 유교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순원은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면 먼저 집안에 모신 사당인 ‘사우’에 절을 하고 마을 ‘영당’에 절을 한 다음에 부모님께 인사를 한다.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라고, 지금도 그 관습을 지키는 그이다. 유교의 오랜 전통이던 호주제가 올해부터 폐지됐다. 그래서 전통 유교마을 출신인 선비 이순원은 어떻게생각할까 싶었다.

    “저는 호주제 폐지를 찬성한 사람이에요. 저는 유교 원리주의자가 아닙니다. 남녀의 권리는 조선 중기까지 평등하게 이어졌어요.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과 같은 엄정한 성리학자들이 나오면서 여성의 위치가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남녀가 유별하긴 하지만 우위가 정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성으로서의, 남성으로서의 몫이 있는 거지요. 유교 역시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렇다. 때가 되면 갓 쓰고 도포 입고 마을 촌장에게 인사를 드리는 이순원이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는 설거지를 한다. 아내에 대한,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겸손한 행동이다.

    이순원의 부인은 아마도 이 시대의 마지막 조선 여인이 아닐까 싶다. 이순원은 어린 시절에 정씨 포은가의 여인과 정혼했다. 집안 어른끼리 어린 시절에 맺어준 정혼녀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시간을 저만치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그 형수가 차려주는 저녁식사를 기대하면서 오랜만에 작가의 작업실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몸과 마음이 살살 녹아내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냥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많은 작가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집 밖에 집필실을 둔 것과 달리 이순원은 집 안에 집필실이 있다. 그는 집 안에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집 안에서 아내를 도와 설거지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이들과 아내도 깨운다. 형수가 저녁 준비를 하는지 맛있는 냄새가 서재로 솔솔 기어들어온다.

    물레와 솟대

    이순원의 방에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물건이 있다. 하나는 물레고 하나는 솟대다. 물레는 할아버지가 만들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쓰던 물건이라고 했다. 집필실에 들어서면 그 물레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여인들의 물건인 물레를 선비의 방에 들여온 연유는 무엇일까.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가 베를 짜려고 돌리던 물레래요. 비록 할머니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뵙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은 중학교 때까지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만들어준 물레를 어머니가 물려받았고, 순서대로라면 아내가 물려받아야 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여인들이 물레를 돌리지 않기에 제가 물려받은 겁니다.”

    이순원의 모친은 아들의 글이 물레에서 실이 나오듯, 술술 풀려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준 것이다. 이제는 멈추어버린 물레, 하지만 이순원은 가끔 글이 막힐 때면 막막하게 그 물레를 돌리곤 했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어머니의 무언의 격려고 응원일 것이다.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그렇게 20년을 곁에 두고 있었으니 물레는 이순원의 모든 글을 다 지켜본 어머니의 영혼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물레를 선비가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신독(愼獨)’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감히 몸가짐을 함부로 할 아들은 흔치 않다.

    그 뒤로 모형으로 만든 작은 솟대가 보인다. 이것 역시 20년지기다. 이것을 작가의 고향에서는 ‘진또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친구가 고향을 떠나 살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과 함께 준 선물이었다.

    서재의 책장 아랫줄에 나란히 놓인 ‘한국대표 문학전집’이 보인다. 필자는 그간 잦은 이사 덕에 다 잃어버리고 한 권만 전리품처럼 남겨놓고 있다. 한국문학의 층위가 그리 두껍지 않던 시절, 이 책 한 질이면 한국문학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책읽기를 좋아했다. 문학을 향한 열정이라기보다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딱히 읽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문지방에 남포를 올려놓고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물거리는 남폿불 밑에서 개미 같은 글씨를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읽고 이해했다기보다는 보고 느낀 시절이었을 겁니다.”

    대관령 배추농사

    이순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국문학, 시와 소설을 비롯해 차범석의 ‘산불’ 같은 희곡을 읽었다고 한다. 중학교에 가서는 문학평론가 조연현의 ‘한국문학의 이해’를 보았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넘어가는 기간에 학교를 벗어난 몇 년의 공백이 있다.

    그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다 가출해 대관령에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이런 그의 행보는 갑갑한 시골 마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사춘기의 방황이었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세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눈을 뜨기 시작하던 시절, 그의 소원은 고향 벗어나기였다. 고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경제’가 필요했고, 그 돈을 벌기 위해 대관령에서 배추농사를 지은 것이었다.

    “상고에 진학한 것도, 상고에 다니면 3학년부터 취직해서 대처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저의 대관령 생활은 나중에 ‘19세’라는 작품으로 결실을 볼 수 있었지요. 소설가에게 그냥 지나가 손해 본 시간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작가가 작품만 쓴다면 삶을 낭비하는 시간은 없다. 예를 들어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경우, 5년 만에 합격한 사람과 2년 만에 합격한 사람을 비교하면 앞의 사람이 3년의 시간을 낭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고시에서는 3년 늦은 사람은 3년이 아쉽고 출세에도 승진에도 지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는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시간이 다 작품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 자리에서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이다.

    그는, 작가에겐 지난 어떤 시절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했다. 심지어 부끄러운 시절의 기억도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작가를 잡놈이라고 거칠게 말한다. 뛰어난 작가 중에 도둑놈도 있고, 엽색한도, 살인자도 있다. 이때 작가라는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이 된다.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피를 흘리는 고통도 작품이라는 보석이 탄생하기 위한 과정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여 한 몸 바치는 작가들도 있다.

    작가는 천상에서 추방당한 저주받은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의 삶을 살기도 한다. ‘천사’ ‘악마’라는 구분을 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삶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한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별빛과 불빛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그는 작품도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는다는 비유를 했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 산소의 화강암 상석도 40년이 지나니까 탈색되고 부서지더군요. 단단한 돌도 100년 200년이 지나면 부스러집니다. 그러나 작품은 어떻습니까. 심지어 문자가 기록되기 시작한 때 만들어진 시가 아직까지 사람들의 가슴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죠. 작품은 당대보다 이후에 오래 남기도 하지요. 작가는 그의 이름으로 어떤 작품이 남아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화영 선생은 지인에게 작가의 죽음은 그가 죽은 지 10년 후에 알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즉, 작가가 죽은 지 10년 뒤에도 작품이 살아남아 있으면 그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때 작품 이 잊힌다면 작가는 그 순간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은 하늘의 별처럼 남는다. 그것을 사람들이 별자리 보듯이 읽어내는 것이다. ‘은비령’에는 별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지금도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성도를 그려낼 수준이다. 일부러 배워서가 아니다. 어린 시절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한 고향에서 저절로 익힌 것이다.

    시골의 여름은 길다. 부모님들이 늦게까지 논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다. 낮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선선한 저녁나절에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날이 저물도록 일하다가 늦게 돌아온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고, 식구들은 어두운 저녁에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밥을 먹는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그 멍석에 그대로 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멍석에 누워 별자리도 보고, 땅 위에 그 어떤 물길보다 맑은 하늘 물길인 은하수를 봅니다. 그때 형제들이 인공위성을 찾아내기도 하고, 별들의 이름을 배웠어요. 우리들이 지어내는 별자리도 있었지요. ‘은비령’ 역시 저의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별자리를 보면서 꿈꾸던 것들이 그렇게 그려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강릉 시내의 불빛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강릉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걸어서 등하교하던 시절, 강릉의 성남동 번화가에 네온사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건 네온사인이 아니라 그저 번쩍이는 전구들이었다. 전깃불이 뭔지 모르고 사는 촌아이였기에 밤이 되도록 기다려 그 불빛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조미료 ‘미원’ 두 글자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가 사라지면 미원 냄비와 미원 깡통이 나타나는데, 정말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심경이었다고 한다.

    그 불빛이 미치도록 좋아서 선 자리에서 두어 시간 넋놓고 바라보다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으니 밤 10시였고, 그때야 20리를 걸어 집으로 갔다고 한다. 이순원은 속으로 다짐했다. 아버지는 나를 촌에서 낳았지만 나는 결코 촌에서 안 살리라, 절대로 안 살 것이라고 되뇌면서 멀고도 험한 밤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가 부러워하던 전기 시설은 고3이 되던 해 그의 고향 마을에도 들어왔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가까이 있는 ‘우추리’가 문명의 혜택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깃불이 앗아간 풍경도 있으리라. 그는 전깃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그 다음해에 대학에 진학한다.

    마음의 풍경

    이순원은 고교시절에 2년 동안 농사를 지어 다른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에도 고등학생이었다. 늦게 진학한 대학이어서 전공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문과나 문창과를 가고 싶었지만, 전통 유교 집안의 하늘 같은 부친의 반대로 결국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졸업하고 나서도 금융계통 직장에서 일했다.

    나는 작가란, 특히 이순원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외딴 집인 ‘독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환한 네온사인 아래서도 간혹 작가들은 자신만의 ‘독가’에 갇혀 짐승처럼 신음한다. 그 과정이 있어야 고마운 나무의 신세를 져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우선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재창조되어 등장한 것이라 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만화 캐릭터를 창조할 때 반경 5km 안에 있는 인물들에서 다 찾아낸다고 했다. 이것은 거의 원칙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의 하찮은 버릇 하나가 만화 캐릭터에게 생명감을 불어넣어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 있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밥 먹을 때, 손가락을 옆으로 들어 올리는 친구 부인을 관찰해 여주인공이 식사를 할 때 그 손버릇을 그리는 식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작 필름을 봤는데, 용이 입을 벌리는 장면을 그리려고 용과 비슷한 개가 입을 벌리는 과정을 섬세하게 촬영하고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가상의 존재들은 현실의 모양을 닮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쓰고 그리는 모든 것은 항상 우리가 가까이에서 본 것들이다. 미녀의 얼굴이나 추녀의 얼굴이나 같은 얼굴이다.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나오고 그림이 된다.

    이순원의 소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당숙 이야기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등 다양한 인물이 그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났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쓰는 것이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을까.

    글로 짓는 집

    두 번째로,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야기할 수 있다. 강원도를 소재로 한 작품이 큰 줄기를 이루면서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를 비롯한 연애소설과 사회풍자 소설을 썼다. 그래서 간혹 독자는 이순원의 소설을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제 작품세계가 다양한 것은 내가 통과해온 시간들이 물리적으로는 50여 년이지만, 내 의식을 통과해온 시간은 조선 중기의 시간까지를 포함하지 않나 싶어요. 젊은 시절에 6·25에 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두 귀로 전쟁의 포성은 듣지 못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산의 아픔, 아버지가 끌려가고 없는 집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마을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같은 작품과 광주 문제를 다룬 ‘얼굴’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 사회과학을 공부한 연유입니다. 그래서 저의 작품세계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조금 더 다양한 것이 아닌가 싶은 거지요.”

    그래도 ‘19세’와 ‘은비령’ ‘마흔에게 바친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같은 작품이 한 작가의 둥지에서 나왔다는 게 마치 독수리와 참새, 까마귀와 까치가 한 알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의 얄미운 질문에 이순원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소설을 같은 둥지에서 한 어미의 품에서 태어나는 새가 아니라, 글로 짓는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를 짓느냐, 초가를 짓느냐, 아니면 목조주택을 짓느냐에 따라서 건축 공법이 달라지지요. 나무로 짓는 집과 돌로 짓는 집을 어떻게 같은 색깔로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도 합니다. 작품마다 이것은 ‘이순원표’라고 딱딱 나와야 할까요? 이런 집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집장수들이 비슷비슷하게 지은 싸구려 집 아닌가요?”

    가만히 있는 작가를 괜히 건드렸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건 누구 거라는 기성품이 주는 지긋지긋함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명성을 따라가는 부나비 속성이 있다. 꼭 정치인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정치적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 나온 김에 계속합시다. 그렇게 비슷한 집을 짓는 소설이라면 굳이 20년 30년 소설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매번 문체와 분위기가 비슷한 소설을 써 독자가 첫 몇 줄만 봐도 이것이 누구 작품인지 표가 나는 소설을 쓸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대관령으로 농사지으러 갈 겁니다.”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번역해서 듣는다. ‘나는 대관령으로 가서 농사를 짓더라도 대관령이 아닌 은비령을 쓸 것이다.’ 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그의 정신은 젊고 푸르다.

    그는 직접 가서 답사하고 쓴 소설이 거의 없다고 했다. 은비령 역시 작품을 쓰고 나서야 찾아간 곳이다. ‘말을 찾아서’도 작품의 무대가 되는 봉평을 나중에 독자들과 함께 가봤고, ‘그대, 정동진에 가면’의 정동진도 마찬가지다. 이 외에도 여러 편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작품의 배경 장소를 그는 왜 가보지 않고 쓴 것일까.

    “글쎄요. 작가마다 다를 텐데, 제 경우에는 막상 그 장소를 가서 보면 내가 본 것에만 사로잡혀 거기에 있는 것 이상을 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막상 글을 쓰면 제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못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 장소를 찾아가지 않으면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그에게는 탁월한 상상력이 있다. 그리고 그전에 충분한 사전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의 관계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원작보다 깊이가 덜한 이유가 영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의 상상력이 제한된다. 물론 영상이 훌륭하면 상상력이 배가되기도 하지만 그런 걸작은 흔치 않다. 그는 소설의 창작성을 최대한 살려내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조세희는 이순원의 은비령?

    이순원은 자선(自選)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집 ‘은비령’에서 자세하고 독특하게 긴 작가연보를 만들어놓았다. 그 연보의 앞부분을 잠시 살펴본다.

    1957년 음력 3월14일,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마을 촌장제와 400년 된 대동계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유교 가정에서 아버지 이석린과 어머니 김남숙의 4남1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1963년 후일 ‘첫사랑’의 모티브가 되는 송양초등학교 입학, 1965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가의 전통인 유월이장(踰月而葬) 격식대로 19일장을 치른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이야기들이 정리되어 있다가, 1978년 대학교 2학년 때 당구장에서 읽게 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고 참으로 큰 감동과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는 조세희 선생, 아니 ‘난쏘공’을 만나 문학을 향한 뜻을 굳힌다.

    “조세희 선생의 소설을 보고 나서야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조세희 선생으로부터 단문의 힘을 느끼고 나서 나중에 이런 글을 쓴다.

    “그리고 그해 늦은 가을부터 이제까지 읽는 ‘난장이’ 연작을 마치 내 작품인 것처럼 원고지 위에 옮겨 써보는 필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했다. 그때 내가 옮겨 적은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겐 너무나 멀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스승이었다. 그해 가을 당구장에서 주운 문예지에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2학년 내내 나는 열심히 경영학 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바로 조세희를 만났고, 이제까지 했던 독서를 바탕으로 소설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내 문학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더 해주었다. 조세희 선생을 통해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수사(修辭)의 과잉’에 빠져들지 않게 되었다고. 같은 걸 쓰더라도 좀 멋지게 쓰려는 수사의 과잉은 삼류를 구분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수사의 과잉에 빠지면 나중엔 자신이 뭔 말을 하는지 모르고 쓰게 된다. 그리고 간혹 그런 작품을 어려운 작품이라고 꼴값을 떨기도 한다.

    그런데 이순원은 조세희 선생을 아직까지 한 번도 뵌 적이 없다고 한다. 조세희 선생은 어쩌면 이순원이 영원히 가지 않을 미지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어떤 장소에 가고 나면 작품을 잘 쓰지 못하는 그의 버릇일 수도 있으리라. 조세희 선생은 어떤 의미에서 이순원에게 은비령 같은 곳이리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바로 행복이 아니던가.

    전업작가의 길

    대학 복학 중에 결혼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첫아이 낳고, 어떤 국책금융기관에 편집·홍보전문 직원으로 취직한다. 그런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1988년 필자가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할 때 이순원은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낮달’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니 이순원 형과 나는 문단 등단 동기다. 그전까지 10년가량 신춘문예에 응모해 무수히 낙선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미 여행 가방 하나 가득한 작품을 준비한 ‘준비된 신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등단 이듬해인 1989년 첫 창작집 ‘그 여름의 꽃게’를 펴내고 둘째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해에도 전작 장편소설 ‘우리들의 석기시대’를 펴낸다. 그리고 구효서, 박상우 등과 더불어 문단에 무섭고도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우리 후배들은 이순원, 구효서, 박상우가 전 세대의 선배 작가들인 최인호, 한수산, 박범신의 계보를 잇는 한덩어리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러한 분류방식은 동식물을 분류할 때나 쓰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이는 선후배들이 작가들에게 거는 기대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작가에게는 더 고유의 영역이 있다.

    오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전업작가가 된 해가 1995년이다. 전업작가는 말처럼 쉬운 길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한 방편으로 가족을 거느린 자가 걸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길이기도 한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누추해진다. 다 생활 때문이고, 경제 때문이다.

    그때의 심경을 그는 “이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는 말로 정리했다. 그래서인지 이듬해인 1996년에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을, 이듬해 현대문학상을 비롯한 문단의 상을 수상했다. 마치 전업작가가 됐으니 더 열심히 하라는 문단의 격려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 권의 베스트셀러도 냈다. 그렇게 2008년을 맞았다.

    이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라는 어리석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지금 쓰고 있으니 말할 수 있겠군요. 이젠 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길동무와 스승을 만나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때 글을 가르쳐주신 스승도 계시고요. 지금도 그 은사님들과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나이가 쉰이 넘으니 그 나이가 가르쳐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이 정도만 하지요.”

    작가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이 바로 미래이고 현재이고, 사후이고 전생이다.

    인터넷 문학교실

    집 안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 때문에 더는 배고파서 못 참겠다, 어서 밥 먹자고 하니 이순원이 무거운 책을 좀 들어달라고 한다. 내가 쓸데없이 건장하게 보여 선후배들이 무거운 것은 다 내가 들어야 한다는 조약이라도 맺은 모양이다. 아니 집에서 밥 먹는데 웬 책이냐고 하자, 사실은 식당에 예약해놓았다고 한다. 이런.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는 자신이 인터넷으로 운영하는 문학교실 제자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렇지 싶었다. 그는 문학선생으로서도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신춘문예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작가를 배출했다. 언젠가 그의 문학교실을 살짝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대학에서 강의한 경험이 있는 필자가 보기에도 꽤 심도 있고 효과적인 강의 방법이었다. 말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글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이 진지했고, 나중에 다 갈무리해서 돌려보면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우추리 출신의 선비가 인터넷으로 문학 강의를 하고 뛰어난 작가를 배출했다. 세월이 흘렀다. 그래 그는 이제 선생이다.

    ‘별 헤는 문학선비’ 이순원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식당에는 시인 한효정, 소설가 김규나·서진연, 영화감독 정기훈이 나와 있었다. 옆에는 오랜 지기인 소설가 권태현이 있었다. 참 따뜻하고 정겨운 자리였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밀린 원고 때문에 한 시간만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필실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한 시간 만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모두 취했고, 행복했다.

    따뜻한 저녁식사는 나중에 서로의 가족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때가 언제일까. 우리는 서로 몹시 바쁘게 산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 저녁식사는 나의 꿈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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