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끌려간 강 사장은 다음날 오전 부산으로 압송돼 보안사 부산지부 지하실에 감금됐다. 옆방에서 먼저 연행된 동명목재 임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문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임원들의 비명도 들렸다. 부친이 이곳에 감금돼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됐다. 부친은 얼마 뒤 쇼크로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실려간 뒤 그곳에 감금됐다.
이때부터 두 달 동안의 지하 독방생활이 시작됐다. 외부와의 연결은 철저히 차단됐다. 수사관들로부터 이틀간 회사와 관련된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3주 뒤 수사관이 각서 한 장을 그에게 내던졌다. ‘동명목재와 사주의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재산포기 위임 각서였다. 서슬 퍼런 그때 분위기에선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설사 재산을 뺏기더라도 지하 독방에서만 풀려나면 회사를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두 달 뒤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의 판단은 오류로 드러났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명목재는 이미 공중분해된 뒤였다. 동명목재와 가족의 전 재산은 국가로 넘어갔다. 동명산업, 동명식품, 동명해운, 동명중공업 등 나머지 계열사도 마찬가지. 보안사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부친과 그는 ‘악덕기업주’로 낙인찍혀 이후에도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은 이듬해 1월20일 비상계엄 해제 때까지 계속됐다. 출국금지조치는 4년 가까이 이어졌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입니다. 수천억원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악덕기업인으로 몰렸으니까요. 돌아가신 부친이나 저나 악덕기업주라는 누명을 반드시 벗고 싶어요. 동명목재도 절대 악덕기업이 아니었음을 국민께 알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 이 같이 유언하셨어요.”
지난해 12월31일 부산시 남구 용당동 동명대학교 내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사무실에서 강정남 이사장을 만났다. 동명목재상사 창업주이자 ‘목재왕’으로 불리던 고(故) 강석진 회장의 장남인 그는 강 회장이 198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10년 넘게 생활했다. 10여 년 전 귀국한 그는 부친이 설립한 동명문화학원의 업무를 돕다 2004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80년 신군부는 동명목재상사를 강제 해산하고 회사와 사주 강석진 회장 일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 사건은 부산지역에선 ‘동명목재상사 해체 몰수 사건’이라 불리며 널리 알려졌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