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유라시안 필하모닉 이끄는 예술 CEO 금난새

“우린 자급자족하는 ‘비정규직’… 이게 경쟁력 원천이죠”

  •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kch@cfe.org

    입력2008-05-07 1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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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네’의 작곡가 금수현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금난새씨는 일찍부터 지휘자의 세계에 눈떴다. 지휘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음악인의 삶을 위해 고민한다.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수원시향 지휘를 맡은 것이나, 순수 민간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을 만들어 음악감독이자 CEO가 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인기 만점인 ‘해설이 있는 음악회’ 등 연간 100여 차례의 연주회를 통해 성공적인 ‘오케스트라 기업’을 일궈가고 있는 그는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 찬 진정한 자유인이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이끄는 예술 CEO 금난새

    ▼ 1947년 부산 출생<br>▼ 서울대 작곡과 졸업, 독일 베를린예술대 지휘과 수료, 카라얀 국제콩쿠르 입상<br>▼ 국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수원시향·독일 체임버오케스트라 지휘자<br>▼ 現 경희대 음대 교수, 유라시안 필하모닉 지휘자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 이젠 집에 가게 해주세요.”

    제1 바이올린들이 힘든 목소리를 냈다.

    “맞아 맞아.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여섯 달 동안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해요.”

    제2 바이올린들이 맞장구를 쳤다. 첼로는 웅얼거리고, 호른은 점잖게 동조했다.

    230년 전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 제45번 ‘고별’. 귀로 들려오는 그 선율이 내게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졌다.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에서 내게 일어난 일이다. 공연이라 해봐야 뮤지컬 몇 편 본 것이 전부인 내가 클래식 음악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금난새의 해설 덕분이었다. 폭소를 자아내는 그의 해설에 나 같은 사람도 뒤따라 나오는 악기 소리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재미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호들갑이려니 했다. 그러나 내 눈과 귀에 들어오는 연주회는 그 이상이었다. 해설은 톡톡 튀게 재미와 위트가 넘쳤고, 그 때문에 연주는 동화책장을 넘기듯이 스토리와 의미를 갖고 살아났다.

    2부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무슨 단조 어쩌고 하는 곡이었다. 지금은 작품명조차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감동은 더 크고 깊었다. 1부의 하이든이 동화라면 2부의 브람스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역사소설 같았다. 10여 대의 현이 뽑아내는 섬세하면서도 굵직한 소리들, 관악기와 타악기의 강렬한 두드림.

    이런 것들이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압도했다.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진동은 객석에 앉은 내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으로 모자라, 피부를 뚫고 들어와 뼛속을 울릴 정도였다. 온몸의 근육들이 움찔거리는 느낌. 다른 청중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장소였다면 아마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금난새를 따라 팔과 다리를 흔들어댔을 것이다. ‘아~이래서 금난새구나’, 싶었다. 그 음악회에서 나는 금난새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클래식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다.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둘째아들

    사실 금난새씨를 대화에 초청한 것은 그의 생활태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자유인의 철학에 맞다. 그는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수원시향을 택했다. 수원시향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후 그는 더 큰 도전에 나선다.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순수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든 것이다. 스스로 음악감독이자 CEO가 됐다. 그가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정부 돈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고상한 음악가가 다른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고객을 감동시켜야만 생존이 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연간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하고 있으니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런 사실들에 마음이 끌려 금난새씨를 ‘자유인과의 대화’에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회에 가본 후 나는 그의 철학과 생활사보다는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과 음악 이야기에 더 매료되고 말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스케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밤 시간의 짬을 얻어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건너편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던 날이었다.

    김정호 한때 ‘내 탓이오’ 운동이 있었는데요. 금 선생께선 그런 원칙에 충실한 분이어서 모셨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음악의 낙후를 청중의 무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청중에게 기쁨을 줘서 예술을 사랑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태도 말입니다. 안정된 지원금을 마다하고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독립적인 음악기업을 만들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시킨 것도 남다르고요. 어떤 계기로 그런 자세를 갖게 됐습니까.

    금난새 성장환경 때문일 겁니다. 제가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대개 첫째에게 모범생 기질이 있다면 둘째는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기질을 타고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학교 가서 좋은 친구 만나라”고 하시잖아요. 그럼 그래야지라고 수긍하기보다는 ‘내가 좋은 친구가 돼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죠.

    “음악으로 세상 바꾸고 싶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이끄는 예술 CEO 금난새

    유라시안 필하모닉은 하나의 ‘오케스트라 기업’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는데,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과 연설입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그 말이 중학생이던 제게 깊게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사회에 기대기보다는 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김정호 지휘자라는 직업도 그렇게 선택한 건가요.

    금난새 예,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4년엔 지휘과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음악이 발전하려면 음악과 관련된 모든 분야가 고루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독학으로 지휘를 공부하면서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서울예고 출신 동기, 선후배들이 모인 ‘서울 영 뮤지션 앙상블’이란 이름의 오케스트라였습니다. 동아리를 만들기는 했는데 연습장소가 문제였습니다. 25~35명이 모여 연습할 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그때 광화문의 미국문화원이 생각나더군요. 도서관을 이용하느라 그곳에 자주 갔었는데, 2층 100여 평(330여m2)의 강당이 늘 비어 있더라고요. 무턱대고 원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고는 ‘패기 있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좋은 오케스트라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 연습장소로 2층 강당을 제공해달라, 그러면 그 대가로 연주회 때마다 미국 음악가인 거슈인, 바버 등의 작품을 꼭 한 곡씩 연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껏 미국문화원은 문화 전파의 도구로 도서관, 영어 회화 등만을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원장은 제 제안을 듣더니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문화원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고, 광주, 대구 등 지방 미국문화원에서도 연주회를 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나중에는 미국 음악협회로부터 공로상까지 받고요. 저는 그런 기회를 통해 지휘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단원들은 오케스트라와 현장감을 익히는 공부를 하게 된 겁니다.

    김정호 일반적으로 리더라면 터프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금 선생께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줘서 따르게 만드는 스타일인 듯하군요. 어릴 적부터 윈-윈(win-win)의 해법을 찾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금난새 그런 거창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내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문화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만큼 그들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김정호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긍정적 에너지를 조화시켜 목적을 달성한다는 사고방식이 요즘 CEO들의 사고방식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 선생을 ‘예술 CEO’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예술 CEO’ 금난새와 일반적인 지휘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금난새 저는 지휘만 하는 지휘자가 아닙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음악가입니다. 그런 결심을 독일 유학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에서 했습니다. 그때 연주되던 곡은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었는데, 태풍이 몰아치는 3, 4악장을 지나 햇볕이 따스한 5악장이 울려 퍼졌습니다. 작곡자인 베토벤이 살아서 들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이 단순히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공연장을 꽉 메우고 열심히 듣는 청중,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그 분위기를 느끼는 순간 저도 음악으로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휘라는 나무를 보러 독일에 갔지만 음악이라는 숲을 보게 된 거죠. 저는 청중과 대화를 나누는 지휘자가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나만 잘났다고 으스대는 지휘자가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고 내 지휘에 감동하는 청중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김정호 그런 생각과 철학들이 오케스트라 연주에 반영됩니까.

    금난새 물론입니다. 지휘자는 작곡가와의 교감을 통해 작곡가의 의도를 창조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연주에 제 철학이 반영되게 마련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지휘자는 연주자를 격려하고 좋은 연주를 할 의욕을 북돋워야 합니다. 저는 지휘만 하기보다는 단원들과 공감하면서 함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예산을 보장받는 악단과 그렇지 않은 악단 사이에는 자세에 차이가 생깁니다. 사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제도권 예술단체들은 정부나 지자체 등으로부터 예산을 배정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력을 덜하는 것 같아요.

    유라시안 필하모닉 이끄는 예술 CEO 금난새
    김정호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의 태도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요.

    금난새 그렇습니다. 정부 돈은 결국 국민이 낸 세금입니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그 돈을 쓸 때는 늘 납세자에게 보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도권 안에 있는 단체라는 이유로 예산을 주는 것은 후진국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랏돈을 받고도 열심히 하지 않는 문화단체도 옳지 않습니다. 모두들 세금을 낸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답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도 경쟁시켜야”

    김정호 좋은 대안이 있을까요.

    금난새 지금은 큰 단체에 예산을 몰아주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향이나 KBS 교향악단은 각각 연간 100억원 안팎의 큰 금액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저라면 그 돈을 한 군데에 몰아주는 대신 20억원씩 쪼개서 여러 군데를 지원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겠습니다. 나머지 예산은 스스로 조달하게 하는 거지요. 생각만 바꾸면 나머지 예산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습니다. 저희 유라시안 필하모닉은 정부 지원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지만 매년 100회가 넘는 연주를 해오지 않았습니까.

    너무 큰 것만 좋아합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음악계를 상징할 만한 큰 오케스트라가 있을 필요는 있지요.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많이 딴다고 해서 그 나라의 체육이 발전했다고 할 수 없듯이 음악도 그렇습니다. 큰 오케스트라가 한두 개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수요에 다양하게 맞출 수 있는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김정호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오케스트라와 스스로 재정을 확보해야 하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사이에는 어떤 음악적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금난새 하하! 매우 예민한 부분이라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재정이 보장된 악단은 사람이 오든 말든 정기 연주회를 꼬박꼬박 합니다. 그러나 유라시안은 청중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다시 오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연주자들이 늘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삽니다. 우리 유라시안에는 청중의 반응이 매우 소중하고, 그래서 청중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더 고민한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김정호 유라시안 필하모닉의 연주 횟수가 매년 늘어난 것을 보면 매번 고객 감동에 성공한 듯합니다.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금난새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군요. 김 원장께서 직접 연주회장에 와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하. 김 원장께선 사회주의가 망한 이유를 어디서 찾으십니까? 저는 그들이 고객을 생각하지 않은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고 그냥 기계적으로 공장만 돌렸어요. 저는 그렇게 의무적으로 일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처음 청소년음악회를 맡게 됐을 때도 정부의 사업이니까 의무적으로 시간만 때우자는 식으로 했으면 지금과 같은 ‘해설이 있는 음악회’는 나올 수 없었겠죠. 저는 청소년음악회가 미래 청중을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고, 해설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췄습니다. 제목도 더 친근하게 ‘금난새와 함께하는 세계음악여행’으로 짓고요. 제가 해설을 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비웃고 말렸지만 첫날부터 모두 매진됐습니다. 저는 지금껏 청중과 호흡해왔고, 앞으로도 청중이 원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기업 돈은 공짜가 아니다”

    김정호 청중의 취향에 맞추다 보면 대중성이 너무 짙다느니, 예술성이 훼손된다느니 하는 비난도 있을 것 같은데요.

    금난새 아니지요. 유라시안 필하모닉은 청중에게 다가가기를 원하지만 크로스오버나 대중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사찰에서 도 닦는 스님이 아닙니다. 저는 관객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사람들은 쉬운 것을 우습고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선입관은 좋지 않아요. 유치원 아이에게는 유치원 아이에게 맞는, 고급 관객에게는 고급스러운 음악과 해설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앞에서 연주회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했는데, 연주에 앞서 제가 이런 질문을 했지요. “저는 청소년을 위한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자주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제 해설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부시 대통령이 수준에 안 맞는다고 화를 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감동을 받고 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나중에 사인까지 해서 보내줄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청중이 원하는 것에 맞춰 음악을 서비스하는 것을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김정호 금 선생의 그런 생각에 맞춰 유라시안 필하모닉을 운영하는 유라시안 코퍼레이션도 점점 사업이 다양해지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는 음식을 제공하는 케이터링처럼 음악을 서비스하기도 하고요.

    금난새 처음에는 유라시안에 대해 부정적이던 사람들이 요즘 유라시안을 벤치마킹하는 바람에 사업 내용을 공개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주시죠. 그러나 ‘신동아’ 독자께 한 가지만은 말씀드리죠. 비행기가 계속 떠 있으려면 프로펠러가 계속 돌아가야 되듯, 유라시안도 계속 새로운 사업을 찾아 확대해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나갈 겁니다.

    김정호 우리 유라시안을 경영하면서 기업들의 후원을 받기도 하지요? 기업의 메세나 활동과 예술단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금난새 유라시안은 단 한 번도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을 공짜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받은 돈만큼의 반대급부를 기업에 돌려주려 노력했습니다. 훌륭한 연주는 기본이고, 후원기업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서도 늘 고민했습니다.

    우리 프로젝트 중 육사, 공사, 해사를 찾아가는 연주회가 있습니다. 해사 교장께서 제게 강의를 부탁하면서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저는 강의 잘 안 합니다. 전 음악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갔습니다. 깜짝 연주회를 하면서 그 돈의 출처가 CJ그룹임을 밝혔어요. 교장도, 생도들도 모두 CJ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엘리트 군인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자부심과 그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으니 최선의 윈-윈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유라시안을 주목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점에 대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 후 CJ그룹은 사법연수원과도 연주회를 연결해줬는데 거기서는 반응이 더 뜨거웠습니다. 앙코르 연주를 끝내고 단원들이 모두 주차장으로 갈 때까지 기립박수가 멈추지 않았지요. 할 수 없이 다시 강당으로 들어가 계획에 없던 또 한 번의 앙코르 연주를 했습니다. CJ그룹의 지원이 끝난 뒤엔 사법연수원 측에서 자체적으로 스폰서를 구해 우리에게 연주회를 요청했습니다.

    ‘문화적 퍼스트클래스’

    김정호 주차장까지 갔다가 돌아와 두 번째 앙코르 연주를 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유라시안 단원들은 어떤 시스템으로 보수가 정해집니까.

    금난새 2007년 1월부터 단원들과 계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랄까요. 보수도 콘서트마다 지급하고요. 외형적으로만 보면 예전에 비해 단원들의 지위는 더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단원들의 애정과 열정은 변함이 없으니 이거야말로 영화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늘 단원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김정호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시죠? 현재 우리 음악교육의 수준과 문제점, 그리고 그 해결책을 들려주신다면.

    금난새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문제는 대학 들어가기만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음악시장이나 음악계는 생각 안 하고 다들 개인적으로 학교 들어갈 생각만 합니다. 저는 어린 학생들이 이 금난새를 주목했으면 합니다. 내가 왜 솔리스트가 아닌 대중과 호흡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서요. 전에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지만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이다보니 요즘은 교육도 제가 할 일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김정호 마지막으로 ‘신동아’ 독자를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금난새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을 돈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퍼스트클래스에 어울리는 높은 교양과 성숙한 정신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여행할 때 자주 이코노미석을 타지만 그것 때문에 저와 제 음악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의 가치는 남에 의해 정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가 되려면 문화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금난새와 유라시안의 음악회에 ‘신동아’ 독자분을 초대합니다.

    김정호 저도 꼭 가보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확신과 열정

    그는 멋을 알고 즐기는 사람이다. 집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멋이 느껴졌다. 99.1m2(30평) 정도 돼 보이는 꽤 넓은 홀에 작은 소파와 피아노 한 대가 전부인 트인 공간이었다. 연주를 위한 공간 같기도 했지만 시각적인 여유로움을 위해 공간을 비워놓은 것 같았다.

    악수하려고 손을 내민 그의 모습도 집무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밤 8시였는데도 그는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젤을 발라서 가지런히 뒤로 넘긴 머리카락. 한 올도 허투루 날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넥타이는 젊은 사람들만 소화해낼 것 같은 좁은 것이었지만 그에게 잘 어울렸다. 바지는 한국의 직장인들이 입는 것보다 길이가 약간 짧았다. 아마도 국제적 취향 때문인 것 같았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이끄는 예술 CEO 금난새
    김정호

    1956년 서울 출생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미국 일리노이대 석·박사 (경제학), 숭실대 박사(법학)

    한국산업경제연구원, 한국지방 행정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근무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겸임교수

    現 자유기업원 원장

    저서 : ‘땅은 사유재산이다’ ‘7천만의 시장경제 이야기’(편역) ‘갈등하는 본능’ 등


    직접 날라온 투명한 유리 주전자도 멋지고, 뜨거운 김을 내는 홍차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차를 직접 따라준 후,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작은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서야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열정. 그와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었다.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끊기가 어려울 정도로 확신과 열정이 가득한 문장들을 쏟아냈다. 그런 태도가 그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금난새가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이뤄내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 면모가 수십명의 개성 강한 음악가를 움직여 청중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만들어내겠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유인으로 살아가려면 저 정도의 자신감과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8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원래 약속한 10시를 30분이나 넘겼는데도, 그는 말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준비된 질문은 더 남았지만 사진촬영도 해야 했다. 거기서 대담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몸은 힘이 드는데도 기분은 좋아졌다. 멋진 사람, 힘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 기(氣)를 받았기 때문일까. 나 자신이 왠지 조금은 더 고급스러워졌다는 느낌을 지닌 채 예술의전당이 가까운 밤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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