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완장 찬 좌익, 분노한 우익 서로를 죽이다

여섯 번째 르포 : 민통선 이북 분단의 섬 교동을 가다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07-01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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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죽었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월남했다. 대상포진을 앓다가 지난해 3월28일 죽었다.

    눈 뜨고 죽은 할아버지

    완장 찬 좌익, 분노한 우익 서로를 죽이다
    할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먹었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할머니는 홀로 산다. 자녀 넷이 출가했다. 아들은 현대자동차에서 밥을 먹고, 외손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의사로 일한다고 할머니가 자랑한다.

    청국장 냄새가 소박하다. 밥은 식고, 찬은 단출하다. 열무김치 멸치볶음 나물무침. 앉은뱅이책상엔 할아버지 사진을 넣은 액자가 놓여 있다. 할머니가 액자 속 사진을 가리킨다.

    “이 할아버지가 평생 북녘만 바라보다 눈 뜨고 죽은 그 할아버지야. 국유지 개간해서 금만 그으면 내 땅 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쉬운 일도 귀찮대. 남들은 악착같이 사는데 고향 돌아갈 생각만 했으니. 면서기 월급으로 살림 꾸리기가 얼마나 고단하던지. 그래도 6·25전쟁 때 유엔경찰로 일할 땐 멋쟁이였다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을서 금슬 좋기로 소문났다. 할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 가족사진을 내온다. 의사 손자는 배우 뺨치게 잘생겼다. 할아버지 얼굴은 사진에 없다. 액자 속 시(詩) 한 수가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격강천리라더니 / 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가련만

    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위해 지은 헌시(獻詩)의 앞부분이다. 틈나는 대로 시를 짓는다면서 할머니가 웃는다. 할머니가 내준 매실차가 달다.

    북한강, 남한강 물은 양수리에서 만나 한강(漢江)이라는 이름을 얻은 뒤 서진한다. 한강은 경기도 파주에서 임진강(臨津江)을 끌어안는다. 한강, 임진강이 몸을 섞은 조강(祖江)은 강화만에서 나뉘어 섬을 휘돌아나간다. 조강은 강이면서 바다, 바다면서 강이다. 짠물, 뭍물이 섞이고, 다투는 경계의 강, 바다다.

    조강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이름을 잃었다. 정전협정에 조강을 ‘한강하구 중립지역’으로 표기하면서다. 사람들은 제가끔 한강하구, 한강입구, 강, 바다라고 칭한다. 할머니는 강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고향은 강 건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는 한자말이 익숙지 않아 할머니에게 뜻을 물었다.

    격강천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교류하지 않아 천리나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란다. 할머니가 사는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 바다의 섬이면서 조강의 하중도(河中島). 교동도 북쪽의 강엔 어선 한 척 뜨지 못한다. 황복, 숭어는 뭍물로 거슬러 오르건만.

    완장 찬 좌익, 분노한 우익 서로를 죽이다
    강화에서 교동으로 가는 배가 뜨는 창후리 선착장은 고즈넉하다. 해병대 장갑차가 서 있으나 경계는 삼엄하지 않다. 군복을 입고 조랑말 꼬리모양으로 머리를 묶은 군인이 장갑차 앞에 서 있다. 어깨에 K1소총을 둘러멘 해병들은 친절하고, 느긋하다. 머리 묶은 여군이 앳되다면서 일행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침 7시 반 배가 교동 가는 첫 배, 저녁 7시 배가 강화 오는 막배다. 막배는 붐벼서 다 못 타니 서둘러 나오는 게 좋다고 적은 경고문이 붙어 있다. 뱃삯은 1500원. 자동차를 싣느라 1만4000원을 냈다. 시간표는 따로 없다. 15분 거리인데, 물때가 어긋나면 50분 걸린다. 간조 때는 수위가 낮아서 배가 돌아간다.

    해병대 2사단 창후검문소는 주차장에서 포구로 나가는 길에 있다. 방문 신청서에 연고자 이름을 적어야 했다. ‘이범옥’이라고 썼다. 해병이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할머니라고 답했다. 쇠창살 모양의 문을 지나니 표지판이 서 있다. 민통선 지역이므로 민간인 출입을 금함이라고 적혀 있다. 갈매기 한 마리가 표지판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는, 아니 강은 맑다. 햇볕이 아침부터 짱짱하고, 숲은 진녹색으로 울창하다. 강안에 안개가 짙은데 6월엔 걷힌다고 뒷자리에 앉은 이은창(67) 할머니가 말했다. 1·4후퇴 때 월남한 할머니는 B29가 굉음을 내면서 날던 것 외엔 전쟁 때 일이 기억나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나는, B29라는 단어를 들으면 미군 폭격기가 아니라 농심에서 만든 같은 이름의 과자를 떠올리는 세대다. ‘맛있는 카레의 세계로 Let′s go’라는 카피를 적은 과자봉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내가 아는 6·25는 책으로 읽거나 들은 게 전부다. 책으로 읽은 것도 헛갈린다. 저자 성향에 따라 해방 전후사, 6·25전쟁사를 보는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다.

    6·25를 모르는 건 나의 아버지 세대도 똑같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전쟁 났을 때 다섯 살이었는데, 당신이 기억하는 6·25는 “정치인이던 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인민군이 끌고 가는 걸 목격했다”는 게 전부다. 추측건대, 어릴 적 어른한테 들은 얘기가 기억으로 둔갑한 것일 게다.

    폭격기 B29, 카레맛 비29

    이은창 할머니는 좋은 의미로 수다쟁이다. 사고 나면 미안할까봐 가족 아닌 사람을 차에 태우는 걸 꺼리는데, “잘생긴 총각, 장동건 닮았다”는 너스레에 넘어갔다. 올해로 결혼 10년 차인데, 총각 오빠라는 호칭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태워달라고 말할 때는 혼자였는데, 할머니 셋이 차에 오른다. 싫은 내색할 겨를도 주지 않고 말을 건다.

    “총각은 고향이….”

    “아, 서울. 정말로 장동건 닮았네.”

    할머니 셋이 목을 빼고 나를 본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지고, 사람 다루는 법이 느나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교동엔 왜 왔어. 처음이야? 놀러? 여인숙 좋은 곳 많아.”

    “황해도 연백서 온 어르신 뵈려고요.”

    완장 찬 좌익, 분노한 우익 서로를 죽이다
    다른 할머니(61)가 “우리 남편이 연백 출신이야”라고 답하면서 “왜?”라고 되묻는다. “전쟁 때 얘기를 들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남편은 전쟁 때 기억 못해. 부모님 고생한 건 말해줄 수 있겠다. 다들 돌아가시고 몇 분 안 남았어. 황해도 사람이 다 잘살아. 연백 사람이 교동서 제일로 잘살아. 고향을 잃어서 외로울 텐데도 독하고, 열심히 살거든. 이 할머니가 연백 출신이잖아.”

    할머니가 이은창 할머니를 가리킨다. 할머니한테 “전쟁 때 기억해요”라고 묻자 돌아온 말이 B29다.

    수첩을 꺼내 수소문해 알아둔 실향민 예닐곱 명 이름을 읽었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이 많았다. 사는 마을 위치를 꿰고 있었다. 개중엔 죽은 사람도 있었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것도 없을 게다. 할머니를 태우길 잘했다 싶었다.

    “섬에 도착해 논을 보면 깜짝 놀랄 거야. 경지 정리가 얼마나 잘됐는지 꼭 살펴봐. 교동 쌀이 전국서 제일 맛있어. 공기가 맑고, 물이 좋아서 그래. 갈 때 쌀 꼭 사가.”

    할머니 말대로 농지가 바둑판을 닮았다. 교동은 쌀농사로 먹고산다. 기술은 할머니 고향인 연백에서 들여온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강 건너 연백평야가 보인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와 함께 대룡2리 구멍가게 앞에서 내렸다. “아까 말한 어르신을 소개해주겠다”면서 할머니가 주인장을 부른다. 키 큰 노인이 머리를 긁으면서 나온다. 178㎝인 나보다 키가 크다.

    황해도 평산군 보산면 남천리가 한은규(73) 할아버지가 난 곳이다. 고향에 가려면 유엔사 관할 중립지역(비무장지대)을 배로 건넌 뒤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열네 살 때 그 길을 거꾸로 걸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1968년부터 구멍가게를 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가게는 전쟁 때 모습 그대로란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시장통은 1950년대를 구현한 영화 세트장 같다. 손으로 눌러 쓴 간판을 내건, 교동이발관에 걸린 꽃무늬 커튼이 앙증맞다. 개발이 늦은 건 할아버지 말대로 “그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월남한 것도 1·4후퇴 때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교동과 마주한 불당포에서 밤을 틈 타 탈출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20명이 풍선(風船)에 올라타 강을 건넜다.

    “숨죽이면서 건너왔습니다. 목숨 건 탈출이었죠. 고향엔 고모 삼촌 사촌형제가 남았는데, 살아는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교동은 황무지였다. 먹을 게 없었다. 송진, 풀을 뜯어 먹었다. 어머니는 잡초를 뜯어 피죽을 쒔다. 열네 살 소년도 남의 집 일하면서 품삯으로 쌀을 받아왔다.

    “1주일만 버티면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풍선을 탔는데 6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온 다음 교동 땅이 비옥해졌어요. 북한 식량난이 심각하다면서요. 농사라면 자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뱃길을 열어야 하는데….”

    황해도 사람은 70명가량이 생존해 있다.

    “며칠만 피해 있다 돌아가겠다고 온 사람들이에요. 지난해엔 망향 행사도 못 치렀어요. 동료가 하나둘 죽고, 돈도 잘 안 모이고요. 몸으로 겪은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안 남았어요.”

    뱃길을 열어라

    목숨을 걸고 탈출한 이들의 소망과 다르게 국군은 이제껏 연백을 수복하지 못했다.

    6·25전쟁 때 사람들은 서로를 죽였다고 황해도 사람들은 말했다. 좌익은 우익을, 우익은 좌익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태가 묻힌 땅을 피로 물들였다.

    연백은 전쟁 나기 전 우익의 영토였다. 우익의 땅을 점령한 완장 찬 좌익은 맘에 안 드는 이들을 죽였다. 국군이 황해도를 수복하면서도 비극이 일어났다. 1951년 1월4일을 기점으로 가해자가 또다시 바뀌었다.

    고태근(78) 할아버지는 천주교 교동공소에서 인민군으로 불린다. 인민군에 입대했다가 탈출해서다. 고향은 연백군 송봉면 옹계리. 출신성분이 나쁘거나 입대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죽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나는 잔인함이 본성이 아닌 환경의 산물이라고 믿는 쪽이다. 잔인함을 발현하는 유전자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 유전자를 부추기는 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려면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게 전쟁이다. 연백 사람들은 살고자,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고자 배에 올랐다.

    이정수, 박지성이 골을 넣은 날, “서울 불바다까지 내다본 전면 군사타격에 진입하겠다”는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 논평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미친놈이라고 주절거렸다. 며칠 전, 국군은 교동에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설치했다. 북한은 심리전을 재개하면 확성기를 조준 격파하겠단다. 교동에서 총소리가 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범옥(79) 할머니는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옳지 않다”고 말했다. 도강할 때 연고자란에 이름을 적어 넣은 분이 이 할머니다. 할머니 고향은 파주 비무장지대. 부군은 눈 뜨고 죽은 김시완 할아버지(1922~2009).

    할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연백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김일성, 공산당이라는 명사를 죽을 때까지 증오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니 도망 와야지. 공산당 아니면 다 죽였대. 며칠만 있으면 되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대. 다른 사람은 인천, 서울로 살 자리를 찾아갔는데, 할아버지는 고향 근처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피웠어.”

    할머니의 헌시는 이렇게 끝난다.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 속에 목숨을 부지하려

    허둥지둥 나왔는데 / 부모형제 갈라져 반백년이 웬 말인가

    함께 나온 고향친구 뿔뿔이 흩어지고

    백발이 되어 저 세상 간 사람 많은데 / 남은 사람 고향 발 디딜 날 그 언젠가

    할아버지 소망은 죽기 전에 조강의 뱃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바람을 이루지 못한 게 한스러워 눈을 뜨고 죽은 것 같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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