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오래된 거리의 냄새를 다시 맡으려, 나는 서울에 왔다

  • 최영미│ ymchoi30@hotmail.com│

    입력2010-07-02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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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초, 춘천을 전전하다 15년 만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시인은 서울 구석구석을 다시 발견하느라 바쁘다. 좋아하는 야구를 틈나는 대로 볼 수 있는 건 서울의 매력이다. 그런데 서울은 왜 이렇게 분주한 걸까. 서울에서의 시간은 춘천보다 빠르고 비싸다.
    오래된 거리의 냄새를 다시 맡으려, 나는 서울에 왔다

    서울 도심 빌딩에 축구 국가대표팀 선전을 기원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도배지를 붙인 본드 냄새가 가시자 나방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벌레라면 딱 질색이다. 그런데 녀석들도 나처럼 가스에 중독됐는지, 잡으려고 책을 갖다 대면 비실비실 날개를 펄럭이다 곧 나의 날렵한 손에 잡혔다. 봄이었는데, 삼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의 봄이었는데, 나방들과 사투를 벌이느라 아까운 나의 봄날을 바쳤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낮과 밤을 학살의 피로 더럽혔으니. 북한산 바로 밑이라, 집 안에 벌레가 많은 건 당연했다. 전망 좋은 방이라고? 전망 좋아하다 망했다. 이제 그만 없어질 때도 되었는데, 다 죽인 것 같은데 또 벽에 붙어 있는 놈을 발견하면, 창밖의 경치가 아름답기는커녕 저주스러웠다. 이 고약한 집에서 과연 내가 얼마나 살지 알아야 투자를 할 텐데. 3년 약정의 위성방송 수신 여부를 저울질하며 나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서울이라 뭐든지 비싸구나

    내 컴퓨터에 인터넷을 연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인터넷만 깔까, 케이블 방송도 같이 묶인 상품을 신청할까. 춘천에서 내가 즐기던 영어방송을 나의 새 거처인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시청하려면 비용이 거의 두 배가 들었다. 서울이라 뭐든지 비싸구나. 한 달에 시청료가 5만원에 육박하다니.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다. 버락 오바마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던 지난 2년간 나는 글을 쓰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집에서, 월드뉴스를 듣거나 스포츠 경기를 시청했다. 날마다 내 귀를 채우던 CNN의 표준영어를 정릉에서 나는 듣지 못했다. 외국어가 들리지 않자 처음엔 미칠 것처럼 답답했는데, 하루 이틀 지나자 적응이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나는 영어를 가까이했다. 당신의 딸을 외교관으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학생 교복을 입고 주일마다 미국인 교회에 갔고, 예배가 끝난 뒤에 ‘bible class’에 참석했다. 3·1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장소이자 일제강점기 유명한 요리점이던 종로의 태화관 2층에서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내가 고교 1학년이던 1977년에 그곳에서는 일요일마다 주한 미국인을 상대로 예배가 열렸다. 오전 11시 주일예배에는 사람이 몰려 늦게 가면 자리가 없었는데 미국인만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지루한 종교의식이 끝나고 계단을 올라가 문고리에 bible class라고 적힌 문을 열면, 딴 세상이 펼쳐졌다. 창밖에 나무가 보이던 아름다운 방에 빙 둘러앉은 스물네댓 명의 내외국인 중에서 내가 가장 어렸고,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래. 어려서 나는 용감했었지.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수업이 끝난 뒤에 자장면도 먹고 탁구도 치던 지극히 쾌활하고 사교적인 아이였지. 언제부터 내가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가. 회색 플레어스커트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종로 거리를 활보하던 청춘.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종로서적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서울에 와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거기였다. 종각에서 종로 2가까지가 내 무대였다. 방과 후에 화신백화점 옆의 단과학원에서, 빈자리를 간신히 찾아 앉아 ‘성문핵심영어’를 펼치고 밑줄을 긋던 소녀. 세상 모르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소설 ‘흉터와 무늬’에서 짧게 기록했지만, 언젠가 낱낱이 문자로 복원하고 싶다.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약속장소는 종로서적과 고려당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 중의 누가 약속장소나 시간을 잊는 법은 거의 없었다. 빵집과 서점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처음 시화집 겸 일기장으로 쓸 예쁜 공책을 산 곳도 그곳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중학 동창인 S의 주선으로 남학생들과 처음 단체미팅을 한 곳도 종로서적 뒤의 찻집이었다.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준 지식창고에서, 사춘기의 내가 가장 즐겨가던 공공장소에 내 사진과 이름이 걸리고 처음 독자들과 만날 때의 감회를 나는 기억한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뒤에 나는 책의 소중함을 잊었고, 1990년대 중반에 서울에서 일산으로 이사하며 결정적으로 나의 단골책방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종로에 내렸는데, 서점이 보이지 않았다. 대형서점에 밀려 종로서적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다. 성인이 된 뒤로 나부터 거기서 책을 사보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다. 서점은 사라졌지만, 빵집인 고려당은 제자리에 있는 게 희한하다. 빵 냄새와 책 냄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냄새들. 잊고 지냈던 아주 오래된 거리의 냄새를 다시 맡으려, 나는 서울에 왔다.

    국제도시에 왔으니 국제적으로 놀아보자

    국제도시에 왔는데, 국제적으로 놀아야지. 세계시민답게 당장 21세기의 첨단통신 서비스를 신청하려다가도 새로 무얼 설치하려 사람을 부르고 절차를 밟는 일이 귀찮았다. CNN도 인터넷도 없어 갑갑하지만, 내 집에 낯선 남자를 들이기가 싫어 하루 이틀 설치를 미루며 한 달을 버티었다. 통신비도 아끼고, 이사를 즈음해 혹사당한 손목을 이참에 쉬게 하고 싶었다. 집에서 걸어가는 거리에 동사무소가 있는데 매달 비싼 요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까. 평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든 사용 가능한 고속 인터넷이 깔린 컴퓨터, 뿐만 아니라 팩스를 비롯해 여러 가지 기능을 겸비한 복합인쇄기도 비치되어 있으니, 동사무소에서 ‘주민센터’로 이름이 격상될 만하다. 이래서 서울이 좋은 거구나. e메일을 확인하려 하루건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우체국과 주민센터를 드나들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모니터는 큼지막하고, 이용자가 적어 글자판도 닳지 않았다. 여러 손이 닿는 물건이니 위생을 고려해 흰 면장갑을 끼고 키보드를 치는 게 귀찮아질 무렵, 갑자기 원고청탁이 몰렸다. 결국 3년 약정의 계약서에, 무슨 노비문서처럼 내 번호와 이름을 같은 종이에 여러 번 반복해 적으며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회의도 들었다. 인터넷을 설치하면서 내 손과 발이 바빠졌다. 일주일에 두 번에서 하루에 두 번으로, e메일을 확인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주기가 빨라지면서 생활의 속도가 배가되었다. 따지고 보면 일주일에 한 번 접속하든, 하루에 두 번 접속하든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의 양은 똑같다! 그런데 예의에 어긋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때그때 답장하느라 시간만 뺏긴다. 경우에 따라 조금 기다리면 저절로 없어질 일도 약속 잡고 다시 취소하느라 부산을 떠니. 서울에서의 시간은 춘천보다 빠르고 비싸다. 어쩌다 내게 배달된 편지를 천천히 열어보던 옛날의 여유가 어느새 그립다.

    메일주소가 하나라면 훨씬 한가할 텐데. 나는 e메일 주소가 두 개다. 내가 인터넷을 배우던 초기에 사용하던 계정 외에 새로 메일주소를 만들며,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 두 개의 주소를 확실하게 구분할 작정이었다. 하나는 주로 비즈니스용으로, 다른 하나는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라고 후배는 내게 충고했다. 그러나 새 메일주소를 사용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나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나도 모르게 내가 새 주소와 헌 주소를 혼동하여, 일로 접촉하는 사람에게도 사적인 주소를 알려주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여튼 나는 야무지지 못하다니까. 비즈니스 감각이 없다니까. 내 한계를 인식하고, 다음부터는 편하게 두 메일주소를 섞어 쓴다.

    어디 딴 데 가서 날씬한 완전평면으로 경기를 볼까

    오래된 거리의 냄새를 다시 맡으려, 나는 서울에 왔다

    나는 두산베어스 홈경기 때 시구를 했다.

    서울특별시 시민이 되어, 마음대로 활개치고 돌아다니고 싶은데 날씨가 원수였다.

    무슨 4월 날씨가 이리 고약하담. 하얀 눈을 맞으며 매연이 심한 거리를 다니다 나의 지병인 기관지염이 도졌다. 강의 중에 목이 잠겨 말을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외출을 자제했다. 2010년 1학기에 명지대에서 ‘서양미술사 입문’ 시간강의를 맡아 매주 화요일 오후에 나는 강단에 섰다. 대학에서 미술 강의는 처음이라 적잖이 긴장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가 생겨 야구경기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강의를 끝내는 요령도 몸에 익혔다. 목이 아프기 전인 4월6일. 강의를 마치고 약속한 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잠실야구장에 행차했으니. 정말 간만에 부지런히 보낸 봄이었다. 물론 그날은 두산베어스가 이겼다. 참고로 말하자면, 여태까지 내가 직접 관전한 경기에서 두산이 패한 적은 딱 두 번밖에 없다. 그러니 힘들어도 1달에 1번은 경기장에 나타나려 노력해야지.

    2010년 한국 프로야구 경기의 정확한 일정을 알려고 연초부터 여러 차례 전화해 직원들을 괴롭혔다.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포스트 시즌 일정을 묻는 내게 싫은 내색 없이 친절히 응대했던 한국야구위원회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두산베어스의 첫 경기는 3월27일. 올해가 시작된 1월부터 내 수첩에 선명하게 각인된, 내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이었다. 두산의 팬인 내가 그날을 모르고 지나가면 무지 무지 서운할 터. 3월 말부터 9월까지 정규시즌의 홈경기가 있는 날, 그리고 포스트 시즌으로 넘어가는 10월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서 뿌듯한 포만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니까, 2010년 봄부터 가을까지 최영미가 지루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주말에만 경기가 있는 축구와 달리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에 시합이 있으니, 야구야 정말 고마워. 축구야, 너도 고마워.

    남아공월드컵이 바로 내일 시작된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원고를 마감해야지.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작가가 된 이후 요즘처럼 원고청탁과 강연요청이 몰린 적이 없다. 이번 주에 보낼 원고가 세 건. 오늘 밤 안에 숙제를 끝내고 경기를 즐기고자 나는 지금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네이버에 접속해 두산과 기아의 광주경기를 틀어놓고, 귀로는 중계방송을 흘려들으며 손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두산이 공격할 때는 물론 재빨리 관전모드로 돌아간다. 4회가 끝난 현재, 두산이 1 대 0으로 아슬아슬 이기고 있다. 우승하려면 오늘은 연패를 끊어야 하는데….

    오래된 거리의 냄새를 다시 맡으려, 나는 서울에 왔다
    崔 泳 美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저서 : ‘서른 잔치는 끝났다’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 ‘흉터와 무늬’`외 다수


    버락 오바마가 개막식에 참석한다는데, 스포츠팬인 그는 아마도 6월12일 영국과 미국의 C조 첫 경기를 관전하겠지. 카메라가 그를 비출 때, 나의 사랑스러운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여줄 CNN이 내 옆에 없는 게 아쉽다. 게다가 내 구식 뚱보 브라운관은 잦은 이사로 화면 상태가 엉망이니, 어디 딴 데 가서 날씬한 완전평면으로 경기를 볼까? 누구네 집에 갈까. 그나저나 두산은 오늘 기아를 누를 수 있을까. 귀여운 임태훈이 승리를 챙겨 날 안심시킬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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