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도심 빌딩에 축구 국가대표팀 선전을 기원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서울이라 뭐든지 비싸구나
내 컴퓨터에 인터넷을 연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인터넷만 깔까, 케이블 방송도 같이 묶인 상품을 신청할까. 춘천에서 내가 즐기던 영어방송을 나의 새 거처인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시청하려면 비용이 거의 두 배가 들었다. 서울이라 뭐든지 비싸구나. 한 달에 시청료가 5만원에 육박하다니.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다. 버락 오바마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던 지난 2년간 나는 글을 쓰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집에서, 월드뉴스를 듣거나 스포츠 경기를 시청했다. 날마다 내 귀를 채우던 CNN의 표준영어를 정릉에서 나는 듣지 못했다. 외국어가 들리지 않자 처음엔 미칠 것처럼 답답했는데, 하루 이틀 지나자 적응이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나는 영어를 가까이했다. 당신의 딸을 외교관으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학생 교복을 입고 주일마다 미국인 교회에 갔고, 예배가 끝난 뒤에 ‘bible class’에 참석했다. 3·1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장소이자 일제강점기 유명한 요리점이던 종로의 태화관 2층에서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내가 고교 1학년이던 1977년에 그곳에서는 일요일마다 주한 미국인을 상대로 예배가 열렸다. 오전 11시 주일예배에는 사람이 몰려 늦게 가면 자리가 없었는데 미국인만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지루한 종교의식이 끝나고 계단을 올라가 문고리에 bible class라고 적힌 문을 열면, 딴 세상이 펼쳐졌다. 창밖에 나무가 보이던 아름다운 방에 빙 둘러앉은 스물네댓 명의 내외국인 중에서 내가 가장 어렸고,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래. 어려서 나는 용감했었지.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수업이 끝난 뒤에 자장면도 먹고 탁구도 치던 지극히 쾌활하고 사교적인 아이였지. 언제부터 내가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가. 회색 플레어스커트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종로 거리를 활보하던 청춘.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종로서적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서울에 와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거기였다. 종각에서 종로 2가까지가 내 무대였다. 방과 후에 화신백화점 옆의 단과학원에서, 빈자리를 간신히 찾아 앉아 ‘성문핵심영어’를 펼치고 밑줄을 긋던 소녀. 세상 모르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소설 ‘흉터와 무늬’에서 짧게 기록했지만, 언젠가 낱낱이 문자로 복원하고 싶다.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약속장소는 종로서적과 고려당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 중의 누가 약속장소나 시간을 잊는 법은 거의 없었다. 빵집과 서점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처음 시화집 겸 일기장으로 쓸 예쁜 공책을 산 곳도 그곳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중학 동창인 S의 주선으로 남학생들과 처음 단체미팅을 한 곳도 종로서적 뒤의 찻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