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광화문 복원공사 가림막 설치그림 ‘광화에 뜬 달’.
▼ 예술적 재능은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가계의 영향도 있겠지만, 특히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는 틈틈이 세 아들의 옷을 지어, 우리 형제를 동네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들로 만드셨죠. 외가 쪽에도 재능을 발휘하는 친구가 있어요.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만든 이윤정 PD가 제 육촌 조카예요. 이종사촌형의 딸이죠.”
▼ 피는 못 속이는군요. 어린 시절 얘기를 더 들려주시죠.
“초등학교 때 미술대회에 나갔다가 한 번도 상을 못 탔어요. 어른이 그려준 것으로 오해받아서요.(웃음) 중학생 땐 샘솟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해 자다가도 깨어나 그림을 그렸어요.”
▼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그림을 ‘업’으로 삼는 건,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았나요?
“부모님은 저를 자유롭게 키우셨어요. 반대는 없었어요. 오히려 집안 어른들의 칭찬이 제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쳤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증조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똑같이 그렸는데, 큰아버지께서 만나는 사람마다 제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하셨죠. 제가 화가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는 서울 이태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이(異)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한동네에 사는 미국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했다. 짝꿍의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가정부 일을 한 덕분에, 미국 친구 집에 놀러갈 기회도 많았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며 두려움은 없었어요. 낯선 문화를 경험하고 즐기는 데 이미 익숙했으니까요.”
장충고 재학 시절에는 국전을 준비하며 프로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입시 준비는 뒷전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그림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당시 미술반을 이끌던 조용각 선생님(현 숙명여대 교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시죠.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10년 뒤를 봐라. 그것이 너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신 거죠.”
1980년 그는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낭만과 자유를 즐기기엔 엄혹한 시절이었다. 끓어오르던 창작 욕구는 사라지고 슬럼프가 닥쳤다. 수업에 빠지고 아웃사이더가 됐다.
“당시 분위기가…. 제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대학이란 곳이 싫었어요. 그래도 재밌는 건, 홍대 80학번 중 현재 우리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가 많다는 거예요. 최정화, 문봉선, 이주헌, 고낙범, 박불똥, 권용식…. 당시 우수한 친구들이 한꺼번에 모인 걸 보며 ‘내가 최고가 아니구나’ 실망했던 것도 같아요.”
그는 1984년 1월 뉴욕으로 갔다. 한국에서 미대 출신에게 딱 맞는 일자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 예술가들과 겨뤄보고픈 욕망도 있었다. 그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에 캠퍼스를 둔 프랫(Pratt) 인스티튜트에 입학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고단한 삶. 하지만 대학원은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