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쾌락, 소설, 그리고 ‘옛날’에 대하여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4-21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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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 소설, 그리고 ‘옛날’에 대하여

    옛날에 대하여 <br>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382쪽, 1만3000원

    마침내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지막 왕국이라 불리는 소설적인 곳, 철학과 문학의 경계, 시와 산문의 경계, 자아와 일상의 경계, 광대무변한 ‘옛날’의 우주로. 아니다, 첫 문장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마침내 우리는 20세기를 거쳐 21세기 파스칼 키냐르에 도착했다. 유례없는 문학 수집가의, 쾌락에 관한, 영원에 관한 거대한 글-부스러기 제국으로! 영원이라고?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명시하는 대로 순간을, 순간의 쾌락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보다는 과거로, 또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과거와 옛날은, 사실, 같은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인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jadis)에 비해 과거(passe)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과거’와 ‘옛날’에 대한 키냐르의 사유는 소설적인가? 나는 며칠째, 키냐르의 소설 ‘옛날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뭐랄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매우 익숙한 느낌으로 산책하며 주위를 확인하는, 세속적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기분 좋게 풀어헤쳐진 걸음걸이의 느낌, 수축과 이완의 리드미컬한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감정의 흐름은 보통 소설을 읽으며 얻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키냐르는 도대체 무엇을 쓴 것일까. 이것은 소설인가? 아니 이것은 소설이 아닌가?

    프랑스는 유령이 출몰하는 나라다. 그곳에서 과거가 새어나온다. 그곳의 하늘은 오래된 섬광(閃光)이다. 아주 미미한 발광(發光)이 조그만 이 나라의 종탑과 지붕들로 퍼지는 투명하고 거침없는 빛에 추가된다. 녹색 평원의 외딴 마을들에게는 숨어 있는 흔적들이 산재한다.(중략) 프랑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것은 제6장 ‘프랑스’에 대한 내용이자 묘사다. 내용(contents)이되, 스토리(story)는 아니다. 스토리란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서술을 가리킨다. 작가들은 이 순차적인 이야기의 단위(사건, action)를 가지고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재구성(reconstruction)하며 노는(play) 자들이다. 여기에는 작가마다 재구성의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전통적인 서사 기법과는 달리 현대소설에서는 이 배분과 배치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법칙에 대입해서 키냐르의 ‘문학 작업’의 정체를 가늠해보자면, 그는 가능한 한 ‘인류의 거대한 삶’, 달리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잘게 부수는 작업을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거대한 일상의 탐구자들인, 역사학에서 아날학파의 방법론(광대하고도 매혹적인 ‘사생활의 역사’ 를 보라!)과 동궤이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 시에 심취한 나머지 19세기 예술의 수도(capital)를 파리로 삼아, 그때까지 형성된 자본주의를 해체한 뒤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한 발터 벤야민의 작업(방대하고도 황홀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보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원에 어둠이 내린다.

    새들이 침묵한다.

    저녁의 침묵은 닳고 닳은 주제이다.

    저녁의 침묵, 동물의 속성이며 새들의 속성인 그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닳고 닳은 주제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설가라기보다 ‘문학수집가’라고 불린다. 위의 ‘저녁의 침묵’은 시집의 한 페이지처럼, 그러니까 시 한 편으로 하나의 장(제82장)이 제시되고 끝난다. 그 뒤는? 제83장으로 제시된 뤽상부르 공원에서 과거에는 매일 벌어졌으나 이제는 구경할 수 없는 체스 놀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짧은 산문이다. 그 앞, 그러니까 제81장은? 로마 황제의 연설로 시작되어 ‘아기라는 나이 많은 짐승’에 대한 정의로 끝나는데, 4쪽에 걸쳐 9조각으로 구성된 산문이다.

    가장 최근의 것이 가장 낡은 것이다. 아기는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여자들, 남자들 가운데서 살려고 버둥대는 아기들을 보라. 그들은 혼자 내버려두면 사흘도 생존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돌보는 매우 나이 많은 짐승이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여행의 시간 순서를 도치해서,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졌다가, 태아가 되어 사라지는 스콧 피츠 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연상시키는 이 대목에 이르러, 아니 순서를 깨고 여기저기 뒤적뒤적 읽다보면, 이것은 소설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 파스칼 키냐르라는 작가에 대한 의문이 갈수록 증폭된다. 도무지 이 작가의 혼과 육체를 형성해준 뿌리, 그러니까 선천적이고도 후천적인 태생이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총 95개의 장을 다 섭렵한 끝에 결정적인 한 조각을 추출해냈는데, 이 작품의 전반부에 수록된 한 편의 글, ‘르 아브르(Le Havre)’에 대한 유년의 추억담이다.

    창문은 르아브르 항구를 향해 있었다. 항구는 폐허, 꿀벌 떼, 방파제, 쥐들과 다름없었다. 세이렌들(뱃사람들을 홀려 난파시키는 요정들)이기도 했다. 나는 여섯 살이었다. 동화와 전설을 읽었는데, 두 발을 창문 앞의 노란색 소형 목제 작업대에 올려놓고서였다. 창문은 바다, 아니 우중충한 만년 돌풍을 향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도 기억나는데, 누구나 바다를 그렇게 불렀다.

    르 아브르란 어떤 곳인가. 철도의 역사가 시작된 19세기 중반부터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화구(畵具)를 들고 야외의 빛을 찾아 기차를 타고 자주 찾던 바다의 중심도시. 여섯 살의 키냐르가 ‘두 발을 창문 앞의 노란색 소형 목제 작업대에 올려놓고’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우중충한 만년 돌풍’의 ‘바다’는 인상파의 유래가 되기도 한 화가 모네가 그린 ‘해돋이 인상’의 현장. 그 바닷가 산책로에는 행동파 실존주의 작가이자 샤를 드골 정권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의 박물관이 우뚝 솟아 있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해 재직한 곳이 르 아브르다. 청년 철학자 사르트르의 출세작이자 작가의 반열에 들게 한 문제작 ‘구토(La nause)’의 무대. (존재의) 구토하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현대인 로캉탱의 실존적 인식 과정이 이 바닷가에 널려 있는 하찮은 조약돌로부터 비롯된 것.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최북단, 그러니까 영국과 마주 보고 있는 도버해협 연안의 항구 도시로, 북대서양 특유의 우중충한 하늘과 바다와 습기 아니면 돌풍 요란한 자연 환경일지언정,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루어진 이러한 빛나는 대목들은 르 아브르라는 공간을 당시의 그 어느 곳보다 의미심장하게 만들어주었던 셈.

    키냐르는 르 아브르 인근의 베르뇌유쇠르아브르에서 명성이 높은 음악가 출신의 아버지와 언어학자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유년 시절 키냐르 가(家)의 식탁에서는 모국어와 여러 외국어가 오고 가고, 오르간을 비롯해 여러 악기의 소리들이 울려 퍼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모국어를 습득하기도 전에 무방비로 노출된 다중 언어와 소리에 대한 스트레스로 18개월부터 자폐증에 걸렸고, 급기야는 언어 거부증과 거식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키냐르는 르 아브르로 옮겨와 지내면서 두 번의 자폐증과 거식증에서 벗어났고, 놀랍게도 자신의 평생의 반려로 오르간과 문학(언어)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키냐르는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자신을 질식시켰던 바로 그 두 세계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정면 대결에 나선 것이다. 17세기 숲 속에 은둔한 비올라의 거장의 음악과 삶을 다루어 1990년대 초 전 세계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키냐르의 소설이자,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한 작품으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창조적으로 승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또는 선배 유산의 깊이가 깊을수록 후배는 헤아릴 수 없는 부담감으로 입이 닫히고, 숨이 막힌다. 이 책 ‘옛날에 대하여’는 두 번의 자폐증에 맞서서 작가로 분출한 키냐르식 사유의 결정체로 그의 저작 전체를 아우르는 문학의 정의(定義)이자 왕국이다. 인상적인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것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작가는 ‘쾌락’을 놓고 있는데, 그 쾌락을 잘게 부수어 궁극적으로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점이다. 아니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써야겠다. 작가가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계속되는 한, 저절로 되살아나고야 마는 것으로!

    옛날에 한 사람이. (중략) 이렇게 일본의 옛날이야기는 시작된다. 옛날 옛적에 한 사람이…

    축자적으로 옮기면, Jadis homme(옛날에 한 남자가)…

    Jadis tis(옛날에 어떤 사람이)…



    (본문의 몇몇 인용문의 행은 지면 관계상 필자가 임의로 붙여서 진행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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