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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②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거칠고 뜨거웠던 영화 천재, 스크린에 ‘한국 사내’를 남기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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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된 나는 TV 한국영화특선 시간에 술병에 맞아 머리가 깨지면서까지 연기에 욕심을 냈던 바로 그 영화 ‘카인의 후예’를 보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박노식을 철모르는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깡패 영화배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까치집같이 엉망인 백발의 머슴 박노식에게는 천하게 일생을 살아온 사람 특유의 회한의 응어리가 있었다. 그는 광복 직후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시작되자 ‘내 세상이 됐다’며 광기에 차서 날뛰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은 갑자기 변해 날뛰는 아버지에게서 돌아서버렸다. 딸이 변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박노식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옛 상전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무산자 계급의 적이라 증오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 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장사인 그는 어느 순간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 죄의식 때문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한순간에 소진해버린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장대하면서도 비극적 라스트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 영화로 나는 박노식의 연기에 감탄했다. 세월이 흘러 또 30대가 된 1990년대의 어느 날, 케이블 TV에서 ‘돌아온 팔도 사나이’(편거영 감독, 1969)를 보게 됐고, 나는 대한민국 남자 배우 중 절대적으로 누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박노식, 절대적으로!”라고 말하게 됐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질로 살았던 과거를 뉘우치고, 이제는 주먹으로 사는 깡패가 아니라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를 위해 날품팔이라도 땀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남을 위협해서 먹고살았던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패 조직은 그의 주먹을 이용하려 용팔이 주변을 맴돌며 유혹한다.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연탄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패 조직은 용납지 않는다. 용팔이를 다시 주먹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려 간악한 흉계를 꾸미는데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겁탈하고 그의 가정을 박살내는 것이다. 오늘도 용팔이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를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따라 번번이 손님을 놓친 용팔이.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그를 불러 사과 두 상자를 배달시킨다. 평소 받는 돈보다 두어 배의 웃돈을 쥐여주며. 사과 두 상자를 받을 사람은 동대문시장에서 저기 광화문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로타리의 서강대학교에 근무하는 여교수님이다.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진 용팔이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지금처럼 택배가 있는 것도 아니요, 퀵 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던 시대였다. 오로지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배달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솔찬이 힘든데 말이지…” 하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시간. 깡패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납치해 골방에 가두고 강간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서강대에 도착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사과 두 상자를 받아야 할 여교수님은 퇴근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여교수님 댁이 어디가요잉.” 수위 왈. “여교수님 집은 저기 아차산 너머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용팔이는 사과 두 상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과거의 주먹을 숨기고, 가정을 위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나는 영화 속 박노식의 모습에서 1960년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았다.

사내됨의 비애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폭행 사건에 연루돼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있는 젊은 날의 박노식.

멋진 배우는 걷는 연기가 훌륭하다. 주구장창 걷기만 하는 영화 ‘사무라이’에서 알랭 들롱은 고독한 늑대의 우수에 찬 걸음을 보여주었다. ‘황야의 7인’에서 율 브리너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그가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는 남자인지를 보여주었고, 같은 영화에서 제임스 코번은 목숨을 건 칼 던지기 내기에서 단호하고 냉혹한 걸음걸이로 허세에 가득 찬 상대방을 압도해버린다. ‘돌아온 팔도 사나이’에서 박노식은 아현동 고개를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걸으면서 그 시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힘겨운 노동을 했던 대한민국 사내들의 비애를 표현했다. 나는 이런 연기를 다시 해낸 한국 영화 속의 배우를 아직까지 보지 못 했다.



눈 내리는 남포동 밤거리에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선다. 사내는 회한에 찬 눈으로 거리를 바라본다. 얼마 만에 돌아온 거리인가? 한쪽 팔이 없어 바람에 휘날리는 소매가 사내의 어두운 과거를 말해준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감독,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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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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