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복음서인 ‘빌립복음서’를 보면 “구주의 반려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모든 제자보다 더 사랑하고 자주 그녀의 입에 입 맞추었다. 다른 제자들이 이런 일을 불쾌하게 여겨 그에게 말했다. ‘왜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시나이까?’ 구주께서 대답하셨다. 왜 내가 그대들을 그녀처럼 사랑하지 않는가? 장님과 눈이 밝은 사람이 어둠 속에 있으면 둘 다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빛이 이르면 눈이 밝은 사람은 빛을 볼 것이지만 장님은 그대로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63-63)라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였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또 다른 견해도 들어볼 만하다. 놀랍게도 예수가 분명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성마리아교회 교구장 몽피오르를 들 수 있다. 몽피오르는 1967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교역자들을 위한 연설을 하면서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결혼할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가갈 여자가 없는 것인데, 이 두 가지 다 예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의 경우 전도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그가 이런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은 나이 서른에 세례를 받으면서일 터인데, 그전에 결혼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몽피오르에 의하면 결론은 단 한 가지, 예수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드라는 신학자는 한술 더 떠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한다. 예수가 말하기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마태복음19:12)고 했는데, 이것이 성(性)에 대한 예수의 혐오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고 했다. 자기가 왜 이토록 성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됐는지 모르던 예수는 제자들이 생기고 그중 특히 ‘사랑하는 제자’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동성애적인 성향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제야 자기가 성 자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혐오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성 간의 성에 대해서만 그러함을 알게 됐다는 주장이다.
“예수는 동성애자다”
가드의 주장은 계속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동성애는 금기였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충동을 억제하고 부정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억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자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장의 돈줄에 해당되는 환전상의 상을 뒤집는 등 소란을 피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한 미국 청교도 젊은이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무섭고 혐오스러워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군대에 지원하고 가장 위험한 임무에 스스로를 내던지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예수가 결혼하지도 않았고,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껏 열거한 사실들을 논박하는 학자도 있다. 존 밀러라는 캐나다의 신학자 겸 심리학자는 ‘30세의 예수’라는 책에서 위의 주장을 모두 논박하고 종래까지 정통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가 동성애자가 아닌 가장 큰 이유는 동성애 남자의 경우 부성(父性)적인 요소를 싫어하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는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식으로 ‘아버지’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설 ‘다빈치 코드’`는 이 그림에 예수의 결혼 사실이 표현돼 있다고 주장한다.
보수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일찌감치 ‘신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인식하고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 그러기에 보통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가복음10:45) 하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한다.
‘빌립복음서’의 기록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의 결혼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는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구주의 반려자’라는 말로 쓰인 ‘koinonos’라는 단어가 영어로 ‘companion’ ‘partner’ 정도이지 ‘wife’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정말 예수의 아내였으면 예수가 그의 입에 키스를 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불쾌하게 여겼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그가 예수의 아내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다. 단 그녀가 다른 사람과 달리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제자였기에 그를 더욱 사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서 제자 요한에게 “엄마를 부탁해!”라고 한 것도 또 다른 증거로 제시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의 아내였으면 “내 아내도 부탁해!”라는 말을 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킹 교수 자신이 밝힌 것처럼 이번에 공개된 이 파편에 의해 예수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더욱이 댄 브라운의 소설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기원후 2세기에 벌어진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논쟁에서,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믿기로 한 주류의 흐름과 달리 예수가 결혼했다고 믿은 일부 그리스도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첫 자료라고 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