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옛사람의 樓閣과 園林 찾는 고상한 여로

전남 담양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입력2012-10-19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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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건대,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나라 여행 문화의 패턴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다. 물론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여유가 많아지다보면 막무가내로 구경거리를 찾아가는 데서 벗어나 특정 관심사와 관련된 여행을 즐기는, 이른바 테마투어로 양상이 바뀌긴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살림 규모의 변화에 앞서 우리네 평균적 국민으로 하여금 문화여행, 역사여행으로 들게 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좋은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고 읽히리라곤 도무지 생각지를 못했다. 대체로 평이하게 서술된 글이라고 해도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일정의 소양이 전제돼 있지 않고는 읽어나가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까다로운 니체며 사르트르의 저술이 베스트셀러가 된 나라이니 내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 수준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엔 ‘거품’ 역시 상당히 많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쇄원의 번잡

    특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 1권에서 인상적인 문체로 소개한 담양 ‘소쇄원’ 이야기며, 강진 ‘다산초당’ 소개는 그동안 한적하기 짝이 없던 이들 문화 유적지를 경주 불국사처럼 번잡하게 만드는 데도 톡톡히 일조했다고 여긴다. 나는 ‘문화 향유의 대중화’란 말을 그렇게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수준을 골고루 높여서 함께 즐기는 것을 뜻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마는 고급한 문화일수록 문화 자체는 그런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화 향유에는 개개인의 골똘한 투자가 전제돼야 한다. 그 투자가 무시된 대중화는 저급화와 상통할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제법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제발 사람들이 소쇄원을 찾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쇄원, 그곳에 뭣이 있다고 그렇게 많이들 찾아가서 내심 크게 실망하고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양 억지 표정을 짓고 나온단 말인가.



    방법은 있다. 입장료를 엄청 높게 책정한다든지 창덕궁 비원처럼 예약제를 해서 일정 인원만 정해진 시간에 관람하도록 하는 것이다. 못된 궁리를 하고 있다고? 그렇다. 그 별난 정원에서 꽃구경 물구경은 못한 채 사람들의 어깨만 부딪치고 밀려다니다가 나와보라. 나보다 훨씬 독한 주장도 할 터이니.

    소쇄원은, 한 시간에 열 사람 정도만 하릴없이 거닐 수 있다면, 무수한 예찬론자가 말하듯이 전통미를 다 갖춘 우리나라 최상급의 정원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관광버스에서 쏟아진 유람단, 수학여행단과 뒤섞여 보노라면 담양 읍내에 있는 것보다 훨씬 볼품없는 대밭 하나와 어린애 오줌발처럼 시원찮은 석간수를 흘리는 바윗덩이 몇 개, 그리고 허름한 정자 몇 채가 비탈에 서 있는 풍경밖에 없다. 이 집을 지키는 안주인의 말에 따르면 시집오던 때만 해도 물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기 힘든 날이 많았다는데, 윗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농업용수, 생활용수를 개발한 탓에 이렇게 물줄기가 빈약해졌다고 한다. 결혼사진 촬영장으로, 10대들의 미팅 장소로, 회사원들의 야유회장으로까지 활용(?)되면서 수목과 담장이 망가지고 숲 속에 쓰레기까지 쌓이는 소쇄원은 더 이상 소쇄(瀟灑·맑고 시원하다는 뜻)하지 않다.

    계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던

    오후, 세상이 가파르게 기울던 오후

    제주 양씨가 살아서 공들인 해묵은 뜨락에 선다

    시내는 수백 년을 한 자리, 돌 사이로 흘러

    낡은 다리의 자리를 뜻 깊게 하는데

    사람들은 계단을 몰라 축담 근처를 서성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무들은

    도대체 죽지 않을 양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며

    새로 추워지는 날씨에 다만 안색을 꾸밀 뿐

    바로 곁에서 그들의 죽은 조상은

    도대체 썩지 않을 양, 첩첩한 기와 따위를 들고 있다

    신음 하나 없이 문명 또는 운명을 이고 있다

    들어설 때 보아서 이 뜨락은 산에 안긴 듯했는데

    들어오니 산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마당 끝 어디에 겨우 걸쳐 있다

    사람은 산을 사랑하나 산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법

    그래서 소쇄옹(瀟灑翁)은 세상 쪽으로만 담을 쌓고

    등성으로는 삼가하여 담을 쌓지 않았다

    뜨락이 내내 산으로 열려 있는 동안

    제주 양씨는 후손들이 지어준 작은 산 속에

    누워 있었을 텐데, 지금 쉽게 보이지 않는다

    - 이희중의 시 ‘소쇄원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투이지만 경상도 밀양 명문가 출신의 시인은 소쇄원에서 소쇄옹께 문후 여쭙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사람이 산을 사랑하나 산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을 아는 터라 굳이 이곳에다 뒷담 없는 정자를 짓고 살았던 이의 안쓰러운 외곬 사랑을 짐작해보는 시인은 이들 첩첩한 기와며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꾸며놓은 장치들이 이고 있는 문명 또는 운명의 신산스러움도 헤아릴 줄 안다.

    알려져 있듯이 원림은 조선 중종 때 인사인 소쇄 양산보가 조성을 시작했다. 15세에 상경, 조광조의 문하에 들었던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이 유배를 떠나고 최후를 맞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조정의 권력투쟁에 환멸을 느낀 그는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경영하며 독서를 즐겼다. 소쇄원 경영에는 당대의 문사인 송순과 김인후 등도 참가했는데 송순은 양산보와는 이종사촌 간이며, 김인후는 사돈 간이었다. 소쇄원의 조형 특징 등에 대해서는 하도 적어놓은 데가 많으니 굳이 또 옮겨 적을 일은 없다.

    식영정과 환벽당

    옛 선비들이 가졌던 한유(閒遊)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누각과 정자, 정원들은 대개 지금의 광주호 주변에 흩어져 있다. 그러니까 명옥헌,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취가정 등이 이쪽이며 나중에 언급하는 면앙정, 송강정은 고속도로 너머 담양 읍내 쪽에 있다. 따라서 면앙정, 송강정을 먼저 둘러보고 광주호 쪽으로 들든지 아니면 광주호 주변을 먼저 구경한 뒤에 담양 쪽으로 나가든지 개인의 사정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호남고속도로 창평나들목을 빠져나오면 887번 국도를 만난다. 이 도로를 타고 오른편으로 달리면 광주호로 갈 수 있다. 도중에 이정표를 따라 옆 도로로 들면 명옥헌으로 가는 길이다. 광주호 호안도로를 따라 직진하면 식영정, 가사문학관, 소쇄원을 차례로 만난다. 멀리 무등산을 바라보고 가까이는 푸른 호수를 대할 수 있는 이 호안도로 주변의 풍광은 아름답다. 곳곳에 소문난 음식점들도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남도의 별미를 맛보는 일도 어렵지 않다.

    번듯한 현대식 건물과 넓은 주차장이 있는 데가 가사문학관이고, 그 너머 산 언덕에 날렵하게 선 정자가 식영정이다. 고등학교 시절, 별 재미도 없지만 시험 때문에 외고 해석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던 그 성산별곡, 사미인곡, 면앙정가…. 그 기억과 연분만으로도 이곳은 사람에 따라 지극히 감회 깊은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가 송강 정철이다. 학창 시절, 송강의 정치적 행적은 거의 알지 못한 채 그가 지은 작품부터 먼저 중뿔나게 공부해야 하는 우리네 처지에서는 자칫 그 이름이 ‘만고에 빛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뒤늦은 각성에 의해 턱없이 급전직하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교사들은 고전시간에도 문학 외적인 가르침을 풍부히 하여 학생들에게 이해의 균형감을 줘야 마땅하다.

    실은 나도 오랜 기간 그와 씨름을 했으며 아직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조선 중기의 동서당쟁을 공부하다보면 정철만큼 빈번히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사도 드물다. ‘정여립 사건’으로 발발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뒤처리에서 보이는 그의 행적도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서인의 시각에서 보면 송강은 과격 우직할 정도로 정의로우며 평생의 지기로 아깝지 않을 만큼 다정다감하고 파당(派黨)을 위해 헌신적이다. 그러나 반대당의 입장에서 보면 그처럼 간사 음험할 수 없다. 끝없는 권력욕의 화신이며 비정할 정도로 잔인 참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식영정, ‘그림자가 쉬는 정자’란 뜻을 가진 이곳도 송강이 노닐던 곳이다. 그래서 환벽당, 송강정과 더불어 ‘정송강 유적’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이 인근이 ‘성산별곡’의 그 ‘성산’이다. 원래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김성원은 송강의 먼 친척인 동시에 이곳 성산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학이기도 하다. 김성원이 살던 서하당과 부용정은 식영정 맞은편에 따로 복원돼 서 있다. 정자로 오르는 초입에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큼직한 표석까지 있는 터라 이제 이곳의 주객도 바뀐 셈이다.

    한쪽 귀퉁이에 작은 방을 붙이고 있는 정자의 쪽마루에 걸터앉아 광주호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자미탄(紫薇灘)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울이 흘렀던 그 예전에는 물론 더 좋은 경치였으리라. 돈 있고 힘 있는 양반 가문에 태어난 덕에 평생 괭이 호미 손에 안 쥐어보고 어린 날부터 이런 경치 좋은 데서 책이나 읽다가 서울에 가서 권세를 휘두르고, 또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훌쩍 고향 땅에 내려와 종자들이 가져다 차려주는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려 시나 읊고 바둑이나 두면서 세월을 즐길 수 있었던 옛사람들이 부럽지 않은 바도 아니다.

    그림자마저 쉬고 있는

    정자에 앉아

    일찍이 송강이라는 호를 가진 사대부여

    갓이 떨어졌어도

    여자의 속살보다 더 부드러운

    권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유장한 문장으로 바위 같은 님을 향해

    사미인곡을 부르고

    속미인곡도 애절히 노래하는구나

    그 철쭉 같은 마음으로

    무더운 날 거머리 물리면서

    논을 메는 상놈의 지리함을 달래줄

    타령 한 가락 만들었다면

    오늘 이 후학도 그대 정신 안고 갔으련만

    - 전홍준의 시 ‘식영정에서’ 부분

    시인도 나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 이제나저제나 조정에서 올라오라는 기별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날마다 문밖을 내다보고, 임 그립다는 글이나 쓰고 있어야 하는 이들 사대부의 고뇌도 고뇌가 아니랴. 쯧쯧.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환벽당에 가려면 가사문학관 앞 삼거리에서 무등산 방향으로 가야 한다. 조그만 다리를 건넌 뒤 왼편 길로 10여 분 걸어가면 된다. 이곳은 담양 땅이 아니고 광주시 북구 충효동이다.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지은 건물인데 김성원과 정철이 다 그의 제자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그의 전폭적인 뒷바라지를 받으며 이곳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방 둘을 가진 이 정자는 정갈하면서도 조촐한 분위기를 지닌 덕에 찾아오는 이의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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