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루 동부지방의 초원과 안데스 산맥.
페루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엘콘도르파사(El Condor Pasa)의 땅이자,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황금 야욕을 부추겼던 엘도라도의 땅으로 알려진 잉카문명의 발원지다. 잉카제국은 16세기 200명도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온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앞에 무너져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칠레를 해방시킨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이 리마에 들어와 페루 독립을 선포하고, 산 마르틴의 동맹 요청을 받은 콜롬비아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가 리마에 입성해 아야쿠초 전투(1824)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페루는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페루의 운명을 바꾼 태평양전쟁
페루와 칠레는 태평양 연안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해 있으면서 같은 언어, 비슷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는데도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많다. 왜 이렇게 됐는가. 19세기 독립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두 나라는 잉카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지만 두 나라의 인종 구성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페루는 원주민 54%, 원주민과 백인 혼혈인 메스티소가 34%인 ‘인디오의 나라’다. 반면 칠레는 스페인계 메스티소와 백인이 95%이고, 인디오는 3%에 불과하다. 인디오가 많아 잉카제국의 직계를 자처하는 페루 국민의 눈에는 정복자인 백인의 후손이 주를 이룬 칠레가 근본적으로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1879년 발생했다. 바로 ‘태평양전쟁(1879~1883)’이다. 이 전쟁은 영어로 ‘War of the Pacific’으로 명명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촉발한 태평양전쟁(the Pacific War)과 구별하고 있다.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3국이 아타카마 사막 일대의 자원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볼리비아는 칠레와 페루를 완벽히 가르며 태평양에 접해 있었다(지도 1 참조). 그런데 태평양에 면한 페루 남부에서 볼리비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비료로 사용될 수 있는 구아노(guano)와 화약에 쓰이는 질산칼륨(초석·硝石)이 대량 매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구아노는 바닷새의 배변물이 퇴적·경화돼 생겨난 천연비료로 ‘조분석(鳥糞石)’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타카마 사막의 대부분은 볼리비아의 영토인데, 볼리비아의 중심부인 내륙에서는 높디높은 안데스 산맥이 있어 이 사막으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 사막에는 은도 많이 매장돼 있어 18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자본이 칠레 노동자를 동원해 채굴작업에 나섰다. 이곳에서 초석과 구아노까지 발견되자 칠레는 노골적으로 이 사막을 욕심냈다. 칠레는 협상을 통해 볼리비아로부터 개발권을 양도받았다. 동시에 세제상의 혜택도 누렸다.
잠깐의 승리, 긴 패배

피스코
그런데 1873년부터 칠레 경제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밀이나 구리 등 전통적 수출품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고 은 채굴량도 감소했다. 칠레 대통령 핀토가 1878년 “새로운 광물을 발견하거나 사업을 하지 못하면 칠레 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경제 역시 나빠졌다. 마침내 1878년 볼리비아 의회가 칠레 초석 회사에 대해 세금을 올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회사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칠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양쪽의 신경전이 거듭되던 1879년 2월 14일 볼리비아 정부는 칠레 회사를 압류해 경매에 넘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바로 그날 칠레는 대부분의 주민이 칠레인인 볼리비아의 안토파가스타에 군함을 접안시키고 500여 명의 군인을 내려놓았다. 칠레가 기습적으로 볼리비아를 침공한 것이다. 안토파가스타에는 볼리비아인이 적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실질적인 전투는 3월 23일에 벌어졌다.
토파테르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500여 명의 칠레군은 135명의 볼리비아군을 완파했다.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싸움에서 페루는 양국을 중재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칠레는 볼리비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페루를 친(親)볼리비아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볼리비아는 페루에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출병을 요구했으나 페루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러다 칠레는 4월 5일 페루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3국은 모두 전쟁 대비가 부족했다.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 국가들이었으니 모두 병력이 적었다. 병력 수로는 페루가 5241명으로 제일 많았다. 볼리비아는 2175명, 칠레는 2694명이었다. 그러나 칠레군의 무기 성능이 월등했다. 칠레는 치밀한 준비를 했기에 페루에 선전포고를 할 때는 병력을 7906명으로 증강시켰다.
아타카마 사막에는 도로나 철도가 연결돼 있지 않았고 물도 귀해 전쟁은 주로 바다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볼리비아는 애초부터 해군이 없었다. 페루는 숫자로는 칠레와 비슷한 규모의 함정을 갖고 있었으나 페루 함정의 화력은 칠레 함정에 크게 뒤졌다. 칠레 해군은 페루 남부의 이키케 항구를 바로 봉쇄했다. 이에 5월 21일 페루 함대가 대응하면서 ‘이키케 해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으로 페루는 칠레 함대의 항구 봉쇄를 뚫었지만 주력함인 인데펜덴시아함을 잃는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이 해전에서 페루의 우아스카르함 함장인 그라우는 칠레 함정인 에스메랄다함을 격침시킨 후 부하들에게 적군 생존자를 모두 구해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사한 에스메랄다함 함장인 프라트의 부인에게 진심 어린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그라우는 이후의 해전에서도 인도주의적 태도를 보였기에 페루와 칠레 양국에서 ‘바다의 신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라우 함장의 활약 덕분에 페루는 6개월 동안 칠레 함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그러자 칠레는 함대의 지휘관을 월리암스 레보예도 제독에서 갈바리노 리베로스 제독으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