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라파카 전투는 1879년 11월 2일 시작되었다. 칠레군은 먼저 타라파카 지역의 거점 도시인 이키케를 건너뛰어 그 북쪽에 있는 피사구아 해변부터 공격해 점령한 뒤 남쪽으로 이키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칠레군이 타라파카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타라파카 지역의 인구는 20만으로 페루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육박했다. 페루 수출량의 전부라고 할 정도인 2800만 파운드의 초석을 생산했다. 타라파카를 빼앗긴 것은 페루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 패배로 페루의 민심은 급격히 와해돼 수도 리마에서는 약탈 행위가 횡행했다. 페루 대통령 마리아노 프라도는 추가 군자금을 확보하고 무기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집무를 부통령에게 넘기고 유럽으로 간다고 발표했다. 국민은 이를 비겁한 도피 행동으로 간주했다. 유럽으로 간 프라도는 결국 페루에 돌아오지 않고 190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칠레에 국보 약탈당한 페루
프라도의 출국 후 민중과 군부의 불만은 고조돼 12월 23일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볼리비아에서도 군부 반란이 일어나 나르시소 캄페로 장군이 새 대통령이 되었다. 타라파카 전투에서 승리한 칠레군은 북진을 계속해 아리카와 타크나 지역을 공격해 승리하고, 3월 21일에는 난공불락의 로스 앙헬레스도 점령했다. 이것이 분수령이 되어 1880년 6월 페루와 볼리비아의 정규군은 완전 와해됐다. 살아남은 볼리비아군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 달아났다. 볼리비아는 전쟁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사태는 미국이 적극 개입해 중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미국은 1880년 10월 22일 아리카에 정박한 미국 함정 래카나와함에 칠레, 페루, 볼리비아의 대표를 불러 5일간 정전(停戰)회담을 갖게 했다. 칠레는 정전 조건으로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지역과 페루의 타카파나 지역을 양도하고, 2000만 페소의 금화를 전쟁배상금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페루가 칠레인으로부터 약탈해간 재산을 돌려주고, 페루와 볼리비아가 맺은 비밀동맹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칠레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리카와 타크나 등을 계속 점령하겠다고 주장했다.

다급해진 페루는 리마 근처에 비정규군 약 1만 명을 포진시키며 방어했지만 칠레군을 막지 못했다. 1881년 1월 17일 칠레군은 리마에 입성하고, 페루의 지도자 피에롤라는 간신히 리마를 탈출했다. 리마를 점령한 칠레군은 페루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장서들을 칠레의 산티아고로 옮기는 등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페루에서는 소수의 사람만 안데스 산맥에 은거해 칠레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1881년 칠레는 도밍고 산타 마리아를 새 대통령으로 뽑았다. 새로운 정부는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수도를 뺏긴 페루는 피에롤라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미구엘 이그레시아스 주도 아래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페루라는 국가가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882년 정전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페루 내의 무장 저항군은 정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칠레군은 이들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그리하여 1883년 10월 20일 칠레와 페루는 공식적인 종전 협정을 타결지었다. 이른바 안콘조약이다. 저항군의 마지막 지도자인 몬테로는 볼리비아로 망명했고 1883년 10월 29일 칠레군은 완전히 리마에서 철수했다.
이 전쟁으로 칠레는 자원이 풍부한 페루 남부 지역과 볼리비아 해안 지역을 확보해 엄청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덕분에 1902년의 칠레의 재정은 1879년에 배해 900% 늘어났다. 이 전쟁으로 바다로 통하는 길을 뺏기고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는 지금도 매년 한 차례씩 ‘바다의 날(Dia del Mar)’을 기념하며 실지(失地) 회복에 대한 염원을 달래고 있다.
이 전쟁에서 3국 가운데 페루가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영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국민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잉카제국의 적손(嫡孫)을 자처하며 지역 맹주 위상을 확보하려 한 노력이 칠레군의 수도 입성으로 유린됐으니 그 내상(內傷)을 견디기 어려웠다. 2007년 칠레는 리마를 점령했을 때 약탈한 국보급 장서 4000여 권을 돌려주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하루아침에 씻을 수 있는 앙금이 아니었다.
피스코 싸움에서도 先攻한 칠레
전쟁 이후 페루와 칠레는 양국 간의 모든 현안에 대해서 사사건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페루 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칠레에 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양국은 한 술의 원산지를 놓고 총만 들지 않은 전쟁에 들어갔다. 남미의 브랜디라 할 만한 ‘피스코(Pisco)’를 둘러싼 논쟁이다. 상표권을 둘러싼 이 싸움은 ‘피스코 전쟁(Pisco War)’으로 불리고 있다.
피스코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인 브랜디의 일종이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은 고향의 브랜디 맛을 느끼기 위해 현지에서 키운 포도를 고향에서 익힌 증류기술로 증류해 브랜디를 만들었다. 그 무렵 남미에서 재배된 포도가 스페인으로 수출돼 값싸게 팔려나가자, 스페인의 포도 재배업자들은 왕에게 남미산 포도의 수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라고 탄원해 관철시켰다. 그로 인해 남미에서는 포도가 남아돌아 술 제조가 활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