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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⑪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복합강으로 칼 만드는 단조장 주용부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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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오늘날 칼은 모두 조리용이므로 주 명장은 온갖 식칼에 관심이 많다. 중국 채소요리용 식칼을 들고.

비록 디딤대가 필요한 꼬마 대장장이였지만 남들은 3년 걸려야 배운다는 대장간 일을 그는 석 달 만에 배우는 재능을 발휘했다. 그 덕택에 ‘천재 났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가 천재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은, 남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주 능률적으로 일했기 때문인 듯하다. 평생 발명에 몰두해 특허도 여럿 갖고 있는 그는 처음 대장간 일을 시작할 때부터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내는 데 천재였던 것이다. 주인 대장장이보다 일을 더 빨리, 많이 해내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청주 대장간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 대장간에서 일할 결심을 하게 된다.

“청주 까치네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았는데, 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이 서대문구청 부근 대장간 옆에 살다 왔다면서 그곳 대장간의 칼이 잘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죠.”

휴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소개받은 서대문 대장간을 찾아갔다. 이미 대장간 기술은 웬만큼 익혀 자신이 있었지만 여기서도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청주로 되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써보아도 그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 이 대장간에서는 그에게 와서 일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 대장간의 대장장이 홍순명 씨는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씨와 함께 소리를 배우다 외삼촌에게 대장간을 물려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였어요. 칼은 본래 만들 줄 알았지만 그분에게 칼 만드는 기술을 많이 배웠습니다. 전쟁 직후라 그런지 칼이 정말 잘 팔렸습니다. 당시 서대문구청이 아현동 부근에 있었는데, 구청 건너편에 어시장인 중앙시장이 있었으니 더욱 칼이 잘 나갔지요.”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그는 서대문 대장간에서 칼을 많이 만들었지만 힘은 들고 보수는 적은 대장간 일 외에도 공사판에서 리어카를 끌기도 하고, 원효로의 기계공장에 선반 일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는 공장에서 수도관과 수도꼭지, 발동기, 등대 반사경이 들어가는 몸체까지 쇠로 된 것은 안 만들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큰 원형 등대 반사경은 한번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만들어요. 이것을 조립해서 유리까지 끼웠다가 분해한 다음 등대까지 갖고 가서 다시 조립합니다. 워낙 무거워 보통 사람은 들지도 못했는데, 그때 제가 힘이 좋아서 도맡아 했지요.”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자동차 타이어를 못 만들던 우리나라는 헌 타이어를 찢거나 생고무를 녹여 재생타이어를 만들었는데, 그가 그 금형을 만들어주니 타이어공장에서 와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또 당시 유명 와이셔츠 공장에서는 직조한 천을 찌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습기와 바람을 내는 바람통 쉰 개에서 바람이 골고루 나오지 않는 결함으로 고민했는데, 그가 이를 해결하자 공장장으로 특채하려고도 했었다. 적성에도 맞고 보수도 좋은 안정된 직장이었을 텐데 거절했단다.

“제가 기술을 배우고 익힌 작은 기계공장에 대한 의리라고 할까요….”

의리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한 장소, 한 가지 일에 정착하기보다 여러 가지 기계와 기구를 섭렵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발명하고 만들어보고자 하는 숨은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대 직전에는 염천교의 국수기계 공장에서 일했는데, 같은 건물에 세든 자전거포를 드나들며 바퀴살을 개선해주는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장간에서 부르면 또 대장간에 나가 일을 보았다. 주인 대장장이보다 두 배 이상 일을 해내는 그인지라 대장간에서도 그를 절실히 원했다.

“그때만 해도 고된 대장장이 일보다는 제 아이디어를 살려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설비, 발명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쇠를 다루는 일이지만, 훨씬 다양한 자극을 받게 되니 재미도 났고요.”

장남으로서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을 한 번도 외면한 적 없이, 가족과 주변사람들(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봉사하는 삶을 추구해왔다)에게 헌신한 그였지만, 그의 영혼은 끝없는 호기심과 실험정신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안정된 자리를 외면하면서 이렇게 고생스레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오늘날 명장이 되기 위한 ‘주용부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였던 셈이다. 이 시기 그는 쇠와 기계를 점점 더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었으며, 훗날 그가 생각해낸 복합강 기법 역시 이때의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만든 회칼 사준 메리야스 공장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그의 대장간에서는 회칼 말고도 일반 식칼 등 여러 가지 칼을 만들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을 아들 영식씨와 함께.



스물두 살에 입대한 그는 뛰어난 기술로 수송부에서 정비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부대의 자동차란 자동차는 죄다 범퍼가 찌그러지고 정비도 제대로 안 돼 있었지요. 고장 난 것은 고치고 찌그러진 것은 수리해서 반짝거리게 닦아놓으면 새것 같아서 상관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1962년 봄, 제대한 젊은 기술자 주용부는 기계공장 아니면 자동차 정비센터를 열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젊은 기술자는 기술만 있었지 돈이 없었다. 기계공장을 차리려면 설비하는 데 돈이 많이 드니 엄두도 못 내고 자동차 정비를 해야겠는데 이것도 터가 필요하고 시설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했다.

“노량진에서 외사촌 친구와 동업을 했어요. 저는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따로 칼을 만들어 납품했는데, 그만 물건 값을 떼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빚만 안고 동업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매제가 하는 칼 공장 한편에 작은 작업실을 짓고 칼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처음 만든 자신의 대장간이다. 설비를 많이 갖춰야 하는 기계공장이나 자동차 수리점과 달리 대장간은 도가니와 망치 하나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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