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10-23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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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감고 손짓과 표정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카라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암보(暗譜) 지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더욱 집중시키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표현하려는 철저한 계산에서 나왔다. 지휘자로서 상반신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요가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였다. 그에 대해 ‘나치 음악인’과 ‘경제적인 기적이 창조해낸 지휘자’ ‘불꽃 지휘자’라는 여러 평가가 있지만, 클래식 대중화의 대업적을 이룬 인물이라는 평가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1984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열린 베를린 필 내한공연. 카라얀이 브람스`교향곡 1번을 지휘하고 있다.

    검은색 터틀넥을 고집하며 특유의 시니컬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필자의 머릿속에는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떠올랐다.

    검은색 터틀넥에 주름을 빳빳하게 세운 정장바지를 리허설 복장으로 고수한 카라얀은 연습일지라도 까탈 부리는 연주자들을 손짓, 눈짓 하나로 통솔해가며 그 위엄을 유지했다. 물론 잡스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카라얀은 총 3500여 회의 어마어마한 공연을 했던 훌륭한 지휘자이기도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유명인사다. 그의 600여 종이나 되는 음반, 영상물 등의 콘텐츠 판매 때문에 음반회사에서 뿌린 홍보 사진만 해도 엄청나다. 우리나라 피아노 학원이나 중고교 음악실에서도 은발의 카라얀이 지휘봉을 들고 눈을 지긋하게 감은 모습이 담긴사진과 열정적으로 리허설을 준비하는 모습의 흑백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지휘자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단원들을 관리하는 리더십, 비즈니스적인 마인드, 이미지 관리 등의 사회적, 정치적, 인격적 요소를 지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라얀은 본능적인 시대감각으로 명성과 명예와 부를 누린 위대한 음악가라는 칭송과 더불어 ‘예술을 이용한 성공의 화신’이라는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31세 어린 모델 출신 3번째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유지했고, 개인 제트기, 페라리 스포츠카, 최고급 요트를 소유했다. 그의 부인은 피카소, 르누아르의 명화를 수집했다. 그가 남긴 재산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3000억 원 상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그의 어마어마한 재산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지휘자로 벌어들였다니 그가 얼마나 일중독자였고 세상 이치에 밝았는지 알려준다.

    본능적인 시대감각



    그는 1929년에 데뷔했는데 당시 그는 귀족 신분임을 표시하는 ‘폰(von)’을 넣은 이름을 고집했다. 그의 선조는 원래 유럽 남부 발칸반도 출신이었다. 1771년 터키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자 그의 5대조는 독일 켐니츠에 정착했다. 카라야니스(Karajannis)라는 원래 성도 독일식의 카라얀(Karajan)으로 바꿨다. 직물공장을 세워 크게 성공하자, 지역경제 활성화의 공로를 인정받아 작센 제후가 귀족 칭호(von)를 하사했다. 5대조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거주지를 옮겨 경제적·사회적 위치를 더욱 확고히 했고, 후손들의 교육 기반도 마련했다. 의사였던 할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오던 그리스정교를 버리고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역시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로 이주해 카라얀은 그곳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에는 카라얀 외에 직업 음악가는 없었지만, 모두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하는 취미를 즐겼다. 카라얀의 부모는 큰아들에게 동향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와 같은 ‘볼프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5세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자신보다 252년 전에 같은 도시에서 태어난 모차르트가 누이의 레슨을 지켜보며 천재성을 드러냈듯, 3세 카라얀은 형의 레슨을 보며 절대음감을 자랑했다. 4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으며 카라얀은 신동 소리를 듣는다. 어린 카라얀은 심하게 낯을 가리고 소심했다. 비즈니스 협상에는 귀재였지만, 사교에 서툴렀던 것은 아마도 그의 말 더듬는 버릇 때문으로 보인다.

    카라얀의 부모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아들이 직업 음악가로 성장하는 것은 반대했다. 그래서 19세의 카라얀은 그의 형처럼 기계공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빈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애초 관심이 없던 전공이었다. 이내 공부를 포기하고 빈 음악 아카데미에 등록해 열성적으로 교습을 받았다. 하루에 8시간 이상 밤낮없이 피아노를 연습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통증과 부종을 일으키는 건초염을 앓으면서 훈련뿐만 아니라 연주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때 지도교수로부터 ‘지휘자로 전공을 바꿔라’는 제안을 받는다. 전부터 지휘자로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리라는 꿈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해야 했다. 카라얀은 결국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지휘자였던 클리멘스 크라우스가 있는 지휘과로 전과를 결심했다. 그런데 카라얀이 전과하자마자 크라우스는 빈 오페라극장 극장장으로 취임해 교수직을 내놓았다. 카라얀은 명성이나 실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빈필하모닉 오보에 주자에게 교습을 받았다. 거의 ‘자율학습’ 수준이었다.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카라얀 학습법

    그런데 이때 카라얀은 자신만의 학습법을 찾는다. 당시 국립 오페라극장의 모든 공연 레퍼토리 악보를 독학으로 외웠고, 오페라극장 기술책임자로 있던 삼촌의 도움을 받아 전 리허설을 방청하며 중요 부분을 체크했다. 공연을 관람하면서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놓은 음악과 대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를 통해 빈극장에서 수많은 거장의 지휘봉이 발산하는 관현악의 다채로운 기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공연 관람을 통해 카라얀은 지휘자는 단원들에게 오직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서만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최상의 음악 색깔과 흐름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몸짓과 표정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된다. 그래서 맞춤형 동작을 개발하고 때로는 과장된, 때로는 절제된 포즈를 연구했다. 이 모든 것이 머리에 있기 때문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게 가능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악기 주자에게 정확한 비트와 성격을 암시해주어야 한다. 그런 지휘자가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은 본분을 잊은 채 음악에 도취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음악을 암보로 지휘해 단원들을 더욱 집중시키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표현하려는 철저한 계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스포츠를 즐겼지만 지휘하는 상반신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요가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였다.

    1929년에 약관(弱冠)의 신출내기 지휘자 카라얀은 데뷔 무대에 선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울름 시립극장 악장으로 위촉받았다. 의욕적으로 시골 도시 울름에 도착하고 보니 울름 시립극장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돼 시설이 무척 낙후되었다. 무대는 협소했고 장치는 학예회 수준이었으며, 17명뿐인 오케스트라의 음향은 너무나 빈약했다. 성악가들의 기량도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도전을 즐기는 카라얀은 연습을 반복하면서 하루 18시간 이상 지휘했고, 무대와 조명, 연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6주도 안 되는 시간에 한층 업그레이드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을 때 울름 시민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격려했다.

    적은 보수에 만성피로를 달고 살았지만, 카라얀 자신을 인정하는 울름 시민을 위해 연습과 지휘를 이어갔다. 후일 카라얀은 울름에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지휘자의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만족했다. 그가 예술감독으로 연출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울름에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울름 시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계약연장을 하지 않아 사실상 그에게 해고를 통지했다. 낙담한 카라얀은 직업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오케스트라를 쉽게 찾지 못했다. 1934년 우여곡절 끝에 임시 수습 악장의 역할을 무난히 소화해내면서 그는 스물일곱 나이에 아헨 시립극장 음악총감독이 된다. 독일 최연소 음악총감독이었다.

    나치당 열성 간부인 아헨 시장은 음악총감독에 취임하기 4일 전에 카라얀에게 공식적으로 나치당 가입을 요구했고, 카라얀은 나치당에 가입한다. 나치당원 가입은 이후 카라얀의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됐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하지 않고 출세가도를 달린 것도, 자신의 명성을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알릴 수 있었던 것도 나치당 가입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는 당시 모든 독일 음악인이 자신의 예술 활동을 위해 피치 못하게 나치당원 가입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귄터 반트(1912~2002) 같은 독일 지휘자는 당원증 없이 소신을 끝까지 지키며 지휘자로서 직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27세에 쾰른 시립극장 악장까지 지냈다. 카라얀이 나치당원이 되지 않았다면 독일 최연소 음악총감독 자리에는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1933년에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나치당원으로 가입하고 1개월 당비를 납부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무심코 가입했다고 변명했지만, 그에게 찍힌 나치의 주홍글씨를 지울 수 없었다.

    나치당원으로 출세가도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1984년 내한한 지휘자 카라얀이 부인 엘리에트 여사와 함께 김포공항 귀빈실로 가고 있다.

    당시 히틀러는 새로운 국가 창설을 위해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바로 이 이상에 부합하는 ‘맞춤형 인물’인 카라얀은 초고속 승진하며 자신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독일의 유명 인사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는 나치 정부에 협조했지만, 유대인 음악가 구명에 나서자 히틀러의 오른팔이던 파울 괴벨스가 즉각 푸르트벵글러를 견제하고 나서 그를 자극할 수단으로 ‘아들뻘’ 되는 카라얀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즉흥적으로 주관적인 영감을 자유로이 해석했다. 반면 당시 그와 ‘양대 산맥’이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는 작곡가가 창조한 음악의 단순 전달자’라는 생각에 악보에 충실한 음악을 선사했다.

    카라얀은 이들의 중간 접점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간다. 토스카니니처럼 작곡자의 의도는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음악적 느낌을 위해 특정 부분에서는 푸르트벵글러처럼 직관적인 해석을 가미해 과장했다. 그러다보니 카라얀의 작품은 매우 일관적이었다. 인간의 귀에 가장 아름답게 들리도록 깔끔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인위적 음색’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제적인 흐름에 중점을 두다보니 섬세하고 세밀한 부분이 지니는 미학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피아노의 강약 대립은 의도적으로 두드러진다. 카라얀의 음악은 세련된 음색을 정갈하고 심오하게 유지하다가 절정으로 상승하면서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이때에 박자가 더욱 빨라져 대부분 카라얀의 공연은 다른 지휘자 공연보다 일찍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학창 시절 음악사는 B학점이었으며 다른 음악학 과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그의 커리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사에서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미학적 관점에 대한 의견을 한 번도 피력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당 협조 이력을 의식해 정치·이념적인 집필과 발언에 더욱 무관심했다.

    한때 히틀러는 카라얀이 연주하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보고 독일적이지 못하다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카라얀은 괴벨스와 헤르만 괴링의 비호를 받아 징집도 피하고 안정된 음악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시 상황으로 그의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45년 2월에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베를린이 잿더미가 되자 불타는 수도를 뒤로하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아내와 함께 피신했다. 밀라노에서 빈털터리로 종전(終戰)을 맞은 카라얀은 가축수송 기차에 겨우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합군사령부는 나치당원과 나치 선전무대 활동경력을 이유로 그에게 활동금지령을 내리지만 이번에도 카라얀에게 행운이 날아든다.

    카라얀은 1938년 아헨 음악총감독으로 재직할 때 연상의 성악가 엘미 홀거뢰프와 결혼했고, 1942년 이혼하자마자 9세 연하의 베를린 갑부집안 출신 아니타와 결혼한다. 아니타의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 재혼 전에 카라얀은 외부 연주에 집중하고 아헨극장 일에는 소홀했다는 이유로 이미 해고를 당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종전 후에는 마치 카라얀이 가엾은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을 감행해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카라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결국 1947년 10월 활동금지라는 족쇄를 풀 수 있었다.

    사실, 카라얀의 성공에는 녹음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나치 전력으로 활동금지된 2년간 카라얀은 스튜디오 녹음 음반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전승국에서는 나치 동조 예술가들의 모든 외부활동을 규제했지만 협소한 스튜디오에서 관객 없이 녹음하는 것은 외부활동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카라얀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고, 음반이 만들어내는 음향의 마술에 푹 빠지면서 녹음활동에 몰두했다.

    당시까지 녹음 음반은 단순한 공연기록이었을 뿐이었지만, 공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불필요한 소리를 배제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지휘자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3번이나 발매하는 기염을 토했고, 유럽인들 사이에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켰다. 카라얀은 일생 동안 통산 2억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제2의 도약, 음반 녹음

    푸르트벵글러 사후 34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 예술감독을 지냈고, 빈오페라극장 예술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 유럽 음악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대중적 인지도가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특히 1957~1960년에는 이 세가지 직함을 모두 유지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58년에는 아니타와 이혼하고 크리스티앙 디오르 모델 출신의 19세 엘리에트와 3번째 결혼을 한다. 52세의 나이에 아빠가 됐고, 4년 뒤에는 둘째 딸을 봤다. 1984년 첫 아내 엘미가 사망했을 때는 조화만 보내고, 세 번째 아내와 두 딸과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언론을 통해 과시하기도 했다.

    독일의 음악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카라얀을 ‘경제적인 기적이 창조해낸 지휘자’라고 평가한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지만 ‘라인강의 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자 독일 국민은 자신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문화소비를 갈구했는데, 이때 카라얀이 제격이었다는 것이다.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기 위한 고차원적인 사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즐기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눈부시게 다채롭고 극적으로 전개되는 카라얀의 음악은 그들을 열광시켰다는 분석이다.

    독일인은 과거 나치가 강조했던 게르만 민족공동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음악에서도 틀에 짜인 정형화된 연주보다는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개척하는 음악가를 찾고 있었다. 이런 경향에 부합한 카라얀은 독일인이 가장 원하는 지휘자가 되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세계로 확장되었다.

    1984년 10월에는 동아일보 초청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펼쳤다. 당시 150명 단원을 전부 이끌고 온 카라얀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운명’과 ‘전원’ 등을 공연했다.

    동아일보 초청 첫 내한 공연

    카라얀은 기술의 발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10년 늦게 태어나 더욱 많은 혜택을 누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80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디지털 방식으로 가장 먼저 녹음해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자신의 언론 노출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등장하는 사진은 사진사가 찍어 그의 승인을 받아야만 언론에 공개될 수 있었고, 항상 촬영 각도까지 일일이 지정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진 촬영 각도가 거의 일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공개한 모든 사적인 사진도 의도적인 설정에 의해 연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헤어스타일을 매우 중시해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머리빗을 찾았다고 전해졌다.

    카라얀과 소프라노 조수미의 일화도 흥미롭다. 카라얀은 생전에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소니(SONY)와 마지막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는데, 젊은 성악가 3명을 오디션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큐멘터리 속의 카라얀은 3명 중 작은 소프라노에게만 ‘믿을 수 없다’는 찬사를 연발하는데, 바로 그가 조수미였다. 카라얀의 영상물에 잠깐 출연했던 조수미는 유럽 음악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했고, 동시에 가장 강력한 추천서를 거머쥘 수 있었다.

    1989년 여름, 두 달 전 베를린 필을 물러난 카라얀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세계 최고의 음악축제로 부상한 것 역시 카라얀의 비즈니스 감각이 발휘된 결과다. 7월 16일, 카라얀은 직접 차를 몰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개막 작품인 ‘가면무도회’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 공연에는 플라시도 도밍고, 레오 누치 등과 함께 한국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오스카 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리허설을 무사히 끝낸 카라얀은 다시 자신의 별장으로 되돌아왔다.

    다음 날, 가슴 통증이 있었지만 침실에서 사업 미팅을 하던 카라얀은 물을 한 잔 마시고 갑자기 사망했다. 1989년 7월 16일에 어이없을 정도로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었다. 키 작고 고집 센 카라얀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에 대해선 칭송과 비난이 공존하지만, 클래식 대중화라는 대업적을 이룬 대표적 인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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