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왜 그녀의 후손은 범죄자가 되었나

우생학·골상학의 시대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입력2013-01-21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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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크 一 家 69%가 범법자…“범죄는 유전된다!”
    • ‘열성인자’ 소유자 강제 불임 요구 거세져
    • 최근 연구 “범죄자 키우는 건 유전보다 환경”
    1874년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덕데일은 뉴욕 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를 조사하다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한다. 뉴욕의 한 구치소에 유달리 특정 성(姓)을 가진 재소자가 많았던 것이다. 한국, 중국과 같은 유교 문화권에선 김(金), 이(李), 박(朴), 장(張)처럼 비슷한 성을 가진 이가 많다. 그래서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십중팔구 김, 이, 박 세 성씨 중 한 명이 맞을 공산이 크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래서 주로 이름(名)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반면 미국, 영국 등 서구에서는 비슷한 이름이 많다. 존, 로버트, 제임스를 비롯해 제인, 헬렌 등 이름(first name)이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성(last name)이 비슷한 예는 흔치 않다. 그런 서구에서,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한 구치소에 몰려 있으니 사연이 궁금할 만도 하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덕데일은 이들의 가까운 친척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재소자들과 직접적 혈연관계가 있는 29명 가운데 무려 17명이 범죄 전과를 갖고 있었다.

    ‘범죄자의 어머니’ 애더 주크

    덕데일은 한발 나아가 이들의 조상을 캐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모두 애더 주크라는 한 여자의 후손이었다. 주크는 18세기 미국의 유명한 범죄자였다. 원래 이름은 마거릿이었는데 프라이버시 문제를 우려한 덕데일이 ‘애더’라는 가명을 붙였다. 그는 ‘범죄자의 어머니’로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주크의 후손은 100여 년에 걸쳐 뿔뿔이 흩어졌는데, 결국 만난 곳이 감옥이었다. 덕데일이 주크의 5대손까지 샅샅이 조사한 결과 모두 709명을 찾아냈다. 이들 중 걸인이 280명(당시 구걸행위는 범죄였고, 한국도 올해부터 경범죄로 처벌된다), 절도범이 60명, 살인범이 7명, 잡범이 140명이었다. 무려 69%가 범죄자였다. 덕데일은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범죄의 원인을 밝혀냈다고 확신했다. “범죄는 유전된다!” 만약 사실이라면 엄청난 발견을 한 셈이었다. 덕데일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범죄자 부모 아래서 태어나면 범죄자가 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전이 범죄 원인의 전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가난과 질병을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 제시했다.



    덕데일은 1875년 조사 보고서를 미국교도소협회에 제출하고 1877년엔 같은 내용을 책으로 출간했다. 보고서에서 덕데일이 특히 강조한 부분이 있다. 이들 주크가(家)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비용이 130만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범인 검거와 구금에 들어간 비용에 빈민구제와 치료 등에 쓰인 돈을 덧붙인 결과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00만 달러(약 210억 원)가 넘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덕데일의 연구 결과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대한 현장조사 등 실증적 연구방법을 적용했기에 설득력도 갖췄다. 그러나 덕데일의 연구가 관심을 크게 끈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범죄자를 관리하는 데 성실한 납세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생각보다 많이 쓰인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주목한 것. 사람들은 일단 놀랐고 다음엔 화가 났다. 특히 세금으로 등이 휜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의 불만이 컸다. 범죄자에게 쓸 돈을 중산층 교육이나 의료 환경 개선 등에 사용하자는 주장이 호응을 얻었다.

    덕데일의 조사결과를 보완한 아서 이스터브룩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됐다. 이스터브룩은 1915년 덕데일이 조사한 709명보다 훨씬 많은 2111명의 자료를 추가로 확보해 모두 2820명의 주크가 후손의 행적과 관련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는 1915년 현재 1258명의 후손이 살아 있으며 계속 아이를 낳고 있어 이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200만 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3500만 달러쯤 되는 돈이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불임 강요

    범죄학자 C. R. 헨더슨은 주크 일가(一家)야말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가족의 대표적인 경우라면서 이들을 무조건 보살피는 게 상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어영부영 살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을 사회복지 차원에서 보살펴주다보면 자손 숫자만 늘려 사회가 더 큰 부담을 떠안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것. 헨더슨은 아주 센 해결책을 제시했다. 범죄자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강제로 불임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헨더슨은 1909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출산을 막아 자손을 못 갖게 하는 것은 정부의 권리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불임 정책이 필요하다.”

    왜 그녀의 후손은 범죄자가 되었나

    독일 나치 정부의 탁아소.나치는 아이들에게 “우성·열성인자를 가진 민족이 따로 있다”고 가르쳤다.

    헨더슨 같은 우생학적 주장을 내놓은 이들의 시각에선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크다고 판단되는 누범자를 그대로 놔두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비용을 부담시키는 일종의 재앙이었다. 쉽게 말해 애더 주크 한 명만 불임시켰으면 범죄자 후손들로 인해 발생한 수백만 달러의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며 정부가 그 예산을 다른 필요한 곳에 썼다면 훨씬 큰 효용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범죄가 유전된다는 주장은 우생학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어로 ‘잘 태어난’이란 어원을 가진 우생학(eugenics)이란 용어는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처음 고안해냈다. 우생학은 더 우수한 인류를 만들고자 유전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열악한 유전인자를 가진, 즉 결함을 가진 사람을 결정하는 인자가 무엇인지를 집중 연구한다. 이 같은 우생학적 관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정신질환자 등 열성인자를 가졌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단종법(斷種法)을 은밀하게 실시한 바 있다. 싱가포르 같은 국가는 지금도 공공연하게 우생학적 관점에서 불임을 강요한다.

    우생학은 19세기 후반 유럽 정서를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이즈음부터 유럽에서 진화론이 득세했다. 진화론은 당시의 자유방임적 시대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기에 단지 생물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현상 등 여러 곳에 적용됐다. 허버트 스펜서로 대표되는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도 그중 하나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적자생존 법칙에 위배된다는 사회다윈주의의 주장은 진화론에 편승해 꽤 먹혀들었다. 좋은 종자만 골라 키우자는 우생학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설 만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던 것. “인간은 스스로의 진화에 책임이 있다”고 한 골턴의 말대로 우생학자들은 육종가가 원하는 형질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것처럼 인간도 인위적으로 개량할 수 있다고 봤다. 마치 정원의 잡초를 뽑아내야 꽃이나 나무가 잘 자라듯 열등한 인간의 번식을 막아 인류의 퇴화를 방지해야 한다는 게 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위험했지만 호응 또한 대단했다.

    환경 영향 간과한 결론

    미국에서 헨더슨 등이 우생학적 주장을 강하게 편 데는 19세기 말부터 미국에 몰아닥친 이민 열풍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남유럽과 동유럽 등지에서 밀물처럼 건너온 이민자는 거의 대부분 구교도였고 음주 문화에 관대했다. 그렇다보니 도시에서 술주정을 하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주류 기득권 계층보다 교육 수준이나 경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자리가 변변치 않고 생계가 고단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아온 프로테스탄트 처지에서 볼 때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대놓고 우생학적 주장을 지지한 데는 이런 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다.

    물론 헨더슨은 “이민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생활을 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의 이민을 허용하지 말자는 것일 뿐이며 불임 정책이 실현되면 더 많은 사람이 훨씬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비롯해 당시 우생학적 관점에서 범죄의 유전성을 강조하고 불임 정책 등을 밀어붙인 학자들 사이에는 미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폭넓게 퍼져 있었다.

    또 다른 우생학적 범죄이론가 헨리 고다드 역시 강제 불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누범자는 물론 지적 장애인이나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후손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다드 역시 헨더슨처럼 실증적 근거를 제시했다. 덕데일이 주크의 후손을 조사한 것처럼 고다드는 마틴 칼리캑의 후손을 중점 조사했다. 칼리캑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명망가인데, 첩을 두고 있었다.

    고다드는 퀘이커교 신자인 본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하녀 출신 첩이 낳은 자식들을 비교했다. 본처가 낳은 자식들의 후손은 대부분 유복한 생활을 이어갔고 범죄와의 관련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반면 첩이 낳은 자식들의 후손 중엔 범죄자나 사회 부적응자가 많았다. 고다드는 아버지가 같더라도 어머니의 유전인자가 범죄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고다드는 얼굴 생김새만으로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다드의 조사에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칼리캑이란 사람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칼리캑은 고다드가 사용한 가명인데, 실존 인물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실존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본처와 첩의 자손이 훗날 다르게 성장하는 것은 유전적 문제라기보다는 환경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는 주크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후손 중 상당수가 범죄자가 된 것은 주크의 범죄 성향이 그대로 전해져서가 아니라 자식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자식을 제대로 돌볼 수 있겠는가. 방치된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른이 된 이들이 그럴듯한 직업과 생활수준을 가질 리 만무하다. 그래도 결혼은 할 테고 또 자식을 낳게 된다. 생계 수단이 막연하다보면 결국 범죄의 길로 접어들기 쉽고 대를 이어 범죄자가 될 소지가 크다. 빈곤과 함께 범죄가 되풀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가 대를 이어 유전된다고 단순하게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범죄의 유전 효과를 정확하게 입증하려면 환경 등 다른 개입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오로지 유전적 요인의 효과만을 보여줘야 한다. 더욱이 최근 뉴욕주립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당시 기록에 따르면 덕데일이 범죄자로 분류한 사람 중 상당수는 범죄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 일부는 당시 꽤나 명망 있는 인사들이기도 했다.

    범죄형 얼굴이 따로 있다?

    이렇듯 미흡한 점이 많았는데도 덕데일의 연구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뭘까.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과학의 시대였다. 합리적 이성이 인류가 숙원하는 과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시대였다. 정치적, 이념적 주장도 과학적 근거가 필요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유전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1866년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하고 1900년 무렵 더프리스, 코렌스 등 유럽의 과학자가 잇달아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유전의 과학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범죄가 대를 이어 유전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뜨겁게 진행됐다. 19세기 중반 유럽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세상이 뒤집혔다. 유럽을 1000년 넘게 지배해온 기독교적 창조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점에 비춰보면 당시 사람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범죄 원인을 진화론 관점에서 풀어보려는 시도도 생겨났다.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 출신의 외과의사 체사레 롬브로소는 사형집행을 받고 숨진 사형수들을 부검하는 과정에서 색다른 점을 발견했다. 사형수들의 두개골 구조가 일반인과 달랐던 것이다. 뭐가 다르고 왜 다른지를 꼼꼼히 찾아보던 롬브로소는 나름대로 놀라운 이유를 밝혀냈다. 사형수들의 두개골은 대부분 진화가 덜 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범죄자는 진화가 덜 돼 있다!” 충격적 발견이었다. 정부가 계속 형량을 높이고 처벌을 강화하는데도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범죄자는 죄를 저지르면서 처벌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 진화가 덜 됐으니까. 짐승이 사람을 물 때 이유를 캐묻지 않는 것처럼 진화가 덜 된 사람은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앞서기 때문에 범죄 충동이 억제되지 않는 것이라고 롬브로소는 생각했다.

    롬브로소는 나아가 범죄형 얼굴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진화가 덜 된 인간의 얼굴형이 바로 범죄형 얼굴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수천 명의 재소자 얼굴을 분석한 결과 공통된 특징이 있었는데 이것이 진화가 덜 된 인간의 얼굴형이라는 것이다. 큰 턱, 강한 턱선, 튀어나온 이마, 긴 팔, 날카로운 눈빛, 크고 앞쪽으로 기운 귀 등이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런데 롬브로소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범죄자들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이탈리아 남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는 지금도 지리적 풍토와 문화, 사람들 생김새가 다르다. 북부 사람은 주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반면에 남부 사람들은 북아프리카인과 닮았다. 롬브로소는 남부와 북부 사람들의 생김새나 두개골 구조 차이를 진화의 차이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과학은 만능의 무기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남부 출신 범죄자가 많았던 데는 남북 간 경제력 차이가 크게 작용했다. 로마 시대 때만 해도 남부 이탈리아가 로마제국의 중심이었으나 중세 도시국가 시대 이후 북부 이탈리아가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떠오른다. 이탈리아가 오랜 분단을 딛고 통일을 이룬 해가 1861년이다. 1000년 넘게 다른 나라로 살아오다 통일이 됐으니 이질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북부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북부 이탈리아가 제공하는데 복지 서비스의 혜택을 남부가 똑같이 챙겨가니까 화가 치민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탈리아가 통일될 무렵 경제·사회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북부 지역과 다르게 남부 지역은 먹고살기 어려울 만큼 궁핍했다. 동·서독 통일 때 나타난 것처럼 많은 남부 이탈리아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북부로 몰려들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면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커진다. 남부 출신이 북부 출신에 비해 성격이 격정적이라는 점도 살인과 같은 충동적인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요인이 됐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남부 출신 범죄자가 득실거린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롬브로소가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펴낸 게 1876년이다. 통일된 지 불과 15년이 지났을 때다. 독일의 경우 분단된 지 50년도 되지 않아 다시 통일됐지만 통일 후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국민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1000년 넘게 따로 살아오다 갑자기 통일돼 10년 남짓 지난 시기의 대립과 갈등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던 롬브로소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범죄 원인이 진화 탓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덕데일이나 롬브로소의 연구는 결과의 타당성, 신뢰성 여부를 떠나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범죄와 같은 사회현상을 과학이라는 시대의 무기를 갖고 해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는 과학으로 인류의 모든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이 세계를 흥분시킨 시대였다. 하지만 범죄자에 대한 강제 불임을 주장하는 등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과학에 기반을 둔 어설픈 이론이 인류 문명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우생학적 주장은 때로는 선민(選民)주의를 부추겨 다른 인종이나 민족을 혐오하거나 박해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드레퓌스 사건 또한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혐오가 빚어낸 일이었다. 이 사건은 1894년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 혐의로 기소되면서 시작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드레퓌스가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군사기밀을 넘겨줬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비공개 군법회의가 열려 드레퓌스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낸 서류에 나타난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 말고는 증거가 없었는데도.

    2년 뒤인 1896년 헝가리 태생의 페르디낭 에스테르하지 소령이 실제 범인이라는 증거가 나왔으나 군 고위층은 새로운 증거를 묵살했고 군사재판부는 형식적 심문과 재판을 한 뒤 에스테르하지를 석방했다. 드레퓌스는 풀려날 수 없었다. 문제는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편견이 다른 객관적 증거를 묵살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진범이 밝혀진 뒤에도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1897년 프랑스 상원 부의장인 슈레르 케스트너가 의회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면서 관심을 끌게 됐다. 급기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사건이 재조명받게 됐다. 프랑스 정치권은 진보적인 드레퓌스파와 수구적인 반(反)드레퓌스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결국 정권이 무너지고 드레퓌스파에 우호적인 발데크 루소 내각이 들어서면서 재심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1899년 9월 재심을 위해 열린 군법회의에서 드레퓌스는 다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무죄를 확인받고자 법정 투쟁을 계속한 드레퓌스는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로부터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고 군에 복직했다.

    드레퓌스는 오랜 법적 투쟁 끝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으나 당시의 우생학과 유전이론은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고달프게 했다. 인종주의와 선민의식 등이 우생학과 연결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화했고 일부는 극단적 행태로 치달았다. 히틀러의 범게르만주의가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인종청소, 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의 바탕에는 과학처럼 포장한 비과학 이론이 깔려 있었다.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동양인도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은 이민 초기에 갖가지 차별에 시달렸다.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캘리포니아 철도 부설 노역에 동원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金門橋)를 건설하느라 숱한 이가 희생됐다. 공사 중 너무 많은 사람이 숨지자 극락으로 가는 금문을 통과하라는 의미에서 다리 이름을 금문교로 지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코레마츠 사건은 미국의 인종적 편견과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은 즉각 선전포고를 하고 반격에 나섰다. 미국 정부는 일본군이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 연안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불안 탓에 당시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을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1942년 5월 12만 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이 집과 재산 처분도 제대로 못한 채 네바다 사막 등지의 수용소에 감금됐다.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미국은 또 다른 교전 당사국인 독일이나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키지 않았다. 독일계 미국인 중 1만1000명가량을 수용소에 가뒀을 뿐이다. 당시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70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 1881명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수용된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194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국 정부의 강제이주와 수용소 감금 결정을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1983년이 돼서야 비로소 미국 항소법원 판결에 의해 번복된다.

    얄팍하고 그릇된 지식과 편견이 인류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은 사건은 이밖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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