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3-01-22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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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든은 108개의 교향곡, 84개의 현악4중주곡, 4개의 오라토리오, 34개의 오페라 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골상학자들은 그의 두개골 형태로 인간 능력의 특성을 연구하겠다며 무덤에서 그의 두개골을 파내기도 했다. 헤어진 연인에게도 끝까지 금전적 지원을 할 만큼 인간적이었던 그의 풍모는 음악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존재감’이 별로였던 동네 언니가 인기 프로그램 ‘장학퀴즈’에서 입상하고는 동네 인기스타로 등극했다. 그때부터 일요일 아침마다 ‘고등학생이 되면 장학퀴즈에 꼭 나가리라’는 야무진 포부로 장학퀴즈를 시청했다. 물론 이름처럼 ‘장학생’만 대상으로 한 것인지 고차원적인 퀴즈는 까다롭고 난해했다. 한 문제도 못 맞히고 떨어질 두려움에 시도조차 못했지만 ‘혹시 내가 나갈 수도?’라는 즐거운 몽상에 빠졌다.

    ‘장학퀴즈’는 시그널 음악으로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의 트럼펫협주곡(Trumpet Concerto in E flat major Hob. Vll e: 1) 3악장을 꽤 오랫동안 사용했다. 1796년 하이든이 64세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런던 연주 여행에서 돌아와 작곡한 이 곡은 그가 남긴 마지막 관현악 작품으로, 빈 궁정악단의 트럼펫 주자 안톤 바이딩거를 위한 것이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실험적인 음악이 넘쳐나던 빈과는 달리 당시 런던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같은 극음악과 반주용 관현악곡에 편중돼 있었다. 자연스럽고 풍부한 소리를 위해 오케스트라의 인원이 늘어났고, 음향은 극적이며 장중했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듯했고, 이전의 관습적인 작곡 방식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이에 따라 독주와 반주의 힘차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위해 고안됐다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트럼펫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국내에서도 ‘장학퀴즈’의 추억 때문인지 이 곡은 아직도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의 인기 레퍼토리다.

    고전주의 소나타 기틀 세워

    하이든이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면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알지만 교향곡의 아버지도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말하면 대개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만 떠올린다. 하이든의 다른 오라토리오 ‘사계’를 이야기하면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를 떠올린다. ‘놀람’ ‘종달새’ 등을 작곡했다고 하면 그 곡들을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악 음악은 하이든 덕분에 비로소 성악에 대적하는 하나의 음악 장르가 될 수 있었다.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에는 그의 악보가 멀리 영국에서도 출판될 정도였고, 오스트리아를 찾은 베네수엘라 혁명가 미란다 장군을 비롯한 세계의 저명인사들은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그가 거주하는 에스텔하지 가문의 성을 찾기도 했다.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 중 파리에서 초연된 ‘천지창조’에 파리 시민들은 폭발적인 찬사를 보냈으며, 특별히 금메달을 제작해 그에게 보내기도 했다. 하이든은 77세로 세상을 마감하기 전 108개의 교향곡, 84개의 현악4중주곡, 4개의 오라토리오, 34개의 오페라 등 방대한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나 에스텔하지 가문에서 작곡한 일부 악보는 1회성 연주를 위한 성격이 강했기에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하이든의 천재적 작곡 능력을 흠모한 골상학자들은 그의 두개골 형태로 인간 능력의 특성을 연구하겠다며 무덤에서 비밀리에 그의 두개골을 파내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이든이 죽었을 때 에스텔하지 가문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 중이라 장례의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를 아쉬워한 나머지 하이든의 묘를 자신들의 성내로 이장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 두개골이 온데간데없고 가발만 남은 것을 발견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망한 지 145년이 지나서야 그의 두개골은 다시 몸과 합장됐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하이든이 당대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 정도였다.

    지금은 하이든의 음악을 쉽고 단순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그는 고전주의 소나타라는 양식의 기틀을 세우며 일찍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진보적인 작곡 활동을 했다. 그의 음악은 기품 있는 우아함과 익살스러운 재치, 드라마틱한 정열이 함께 녹아들어 있으며 꾸밈이나 거짓이 없어 친근하게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과 함께 조화롭고 전형적인 고전주의의 구조를 확립한 ‘빈 고전악파’의 세 기둥 중 하나다.

    수레바퀴 匠人의 아들

    고전주의는 당시의 계몽주의 합리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이전의 장엄하고 화려하면서 인위적인 바로크 양식에 대항해 나온 사조다. 고전주의는 자연스럽게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간소한 스타일로 시작됐다. 고전주의를 추구한 하이든도 항상 겸손하고 소탈한 자세로 음악을 접했고, 새로운 음악의 추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통일성과 다양성, 새로움과 연속성의 공존으로 표현된다. 초기 작품은 그 무렵의 시대적 대세였던 바로크적 요소를 갖췄지만, 점차 감성적 표현력과 견고한 구성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를 정착시켰다. 말기의 종교음악에서는 다음 세대에 등장할 낭만주의적 면모까지 보여줬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전 유럽을 돌아다녔으며, 베토벤의 아버지는 부와 명예에 눈이 멀어 아들을 출세의 도구로 여기고 스파르타식 고강도 교육을 했다. 그러나 하이든의 아버지 마티아스는 직접 자식 교육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중부 작은 마을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가업인 수레바퀴 제작 장인이었다. 악보를 볼 줄은 몰랐지만 어깨너머로 외운 운지법으로 하프를 튕기며 아이들과 노래하기를 즐겼다. 그들이 살던 가난한 시골 마을에는 아마추어 음악 모임이 결성되는 등 음악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마티아스의 세 아들은 모두 대작곡가, 빈궁정작곡가, 합창단 테너 같은 직업을 갖게 됐다.

    하이든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매우 아름다운 음성을 갖고 있었다.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챈 마티아스는 음악교육을 위해 어린 하이든을 하인부르크에서 교사로 재직하는 먼 친척 집으로 보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아버지처럼 장남인 아들을 대작곡가로 키우기 위한 게 아니었다. 아들이 가업인 수레바퀴를 만지는 일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성직자가 되게 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하이든은 빈소년합창단의 전신인 슈테판성당 부속합창단 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성실하고 인간적인

    하이든은 소프라노의 고음역을 노래하며 흡사 천사의 음성 같은 음색을 오랫동안 유지하도록 카스트라토(거세한 남성 고음역 가수)가 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가수가 아니라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며 반대했다. 하마터면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도 달라질 뻔했다. 하이든은 18세까지 소프라노 음역의 독창자였지만 변성기를 맞으면서 합창단 학교를 본의 아니게 졸업하게 된다. 그는 소문난 장난꾸러기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말썽의 주범이었지만, 10년 동안 슈테판성당합창단 학교에서 받은 철저하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은 하이든 음악세계의 밑거름이 됐다.

    하이든은 부모가 원하는 성직자의 안정된 삶보다는 음악가라는 이상적인 삶을 택했다. 처음 1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말쑥하고 정갈한 합창단 시절과는 딴판으로 굶주리고 피폐한 삶이 이어졌다. 그를 구원한 것은 성실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였다.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 특히 잘나가는 예술가일수록 우쭐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비사교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자신을 낮추며 융합하는 친화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하이든은 한결같은 성격이라 그의 주변에는 늘 예술가들이 북적이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 덕분에 하이든은 지인들의 소개로 궁정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였던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또 영화 ‘파리넬리’에서 파리넬리인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2)의 악독한 스승으로 나오는 성악교사이자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1686~1768)의 음악 교습 반주자로 일하며 고정 수입을 얻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포르포라로부터 작곡을 위한 음악적 화성과 대위의 기본 개념을 배우고 작곡 감각을 익힌 덕분에 작품성이 일취월장했다.

    1758년 하이든은 귀족인 모르친 가문의 음악감독이 됐으며 1761년에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헝가리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최고 유력 가문인 에스텔하지의 수장 파울 안톤 공작의 보조예술감독으로 고용됐다. ‘보조’라 해도 실질적인 예술감독(카펠마이스터)의 업무와 권한을 가졌다.

    살리에리와의 우정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하이든의 오페라 ‘사랑의 승리’.

    요즘은 클래식 음악가가 주인공인 영화 중에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영화 때문에 대중에게 잘못 각인된 비운의 캐릭터들도 생겨났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돈만 아는 표독스러운 성악교사로 나오는 포르포라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재능을 질투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야비한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의 포르포라는 행실이 너무나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괴팍하고 안하무인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그리 유난스럽지는 않았다. 또한 하이든에게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즉 예술적 역량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해준 소중한 스승이었다.

    살리에리는 더 억울한 사람이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이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야비한 인물로 설정한 허구가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사실 당시 살리에리가 시기했을 만한 사람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곤궁했던 모차르트가 아니라 어쩌면 고상하게 인정받던 하이든이었을지도 모른다. 36년간 궁정작곡가로 합스부르크왕가에서 봉직한 살리에리는 자신처럼 30년 넘게 한 집안에 고용됐음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마음껏 창작하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하이든이 훨씬 더 부럽지 않았을까. 물론 하이든과 살리에리는 서로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고, 자신들이 창작한 곡들의 연주를 지휘하며 빈 음악계를 융성하게 했다.

    살리에리를 비롯한 당시의 작곡가들은 권력자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암투와 음모에서 살아남아 고용주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 작곡해야 했다. 제약이 심해 다른 외부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작곡가가 대중적인 기반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 자신의 음악적 자존감만 생각해 안정된 자리를 섣불리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상당한 대중성을 가진 ‘음악의 어머니’ 헨델조차 음악적 기반이 비교적 탄탄한 영국으로 진출했으나 직접 제작에 손을 대다가 빚에 쪼들리며 비참한 말로를 보냈다. 음악인 고용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에 입각한 공공적 예술 후원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사상을 외부에 전파하려고 음악을 지원했다.

    하이든은 에스텔하지 가문이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빈의 남동쪽 85km지점에 세운 호화로운 여름별장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이 별장에는 방이 126칸에 공연극장도 2개나 있었다. 그런 공간에서 하이든은 최고의 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풍족한 재원으로 레퍼토리를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24세 연하 모차르트와 교유

    여름 시즌뿐 아니라 가문과 관련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작의 개인적인 여가 선용까지 신경 써야 했기에 하이든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가 섬긴 에스텔하지 공작 4명은 인색하지 않았으며 그의 외부활동에 대해 ‘자애로운 동의’를 해줬다. 아무리 사치스러웠다 해도 외딴곳에 자리한 시골 궁전이었기에 하이든은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은 온 유럽에 퍼졌고 그 결과 두 차례의 영국 연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극진한 환대 속에 자신이 20년 동안 번 액수 이상을 몇 년 안에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스텔하지 가문의 4번째 수장이 그와 다시 일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자 하이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은혜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성격 때문인지 그의 음악은 모차르트처럼 완벽하거나 베토벤처럼 지적이지 않았지만 친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는 모차르트보다 24세나 많았지만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눴다. 49세의 하이든이 25세의 모차르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진솔하게 다가갔다. 모차르트도 이에 화답해 1782~85년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6곡의 ‘하이든 4중주’를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이 곡의 일부는 하이든이 비밀결사조직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축하 자리에서 먼저 가입한 모차르트에 의해 연주됐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Free’(자유)와 ‘Mason’(석공)이라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원래는 석공조합조직으로 출발했다. 기하학과 자연법칙을 중시하던 석공들의 모임은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점차 사교모임으로 확장됐고, 자유 평등 박애의 3대 이념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적을 품었다. 이후 유럽은 물론 미국으로도 전파돼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가입하면서 이목이 집중됐다.

    에스텔하지 가문의 니콜라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은 그간 예술에 쏟아 부은 막대한 지출을 줄이려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소속 예술단체의 규모도 크게 줄였다. 그럼에도 하이든은 작고한 공작의 유언에 따라 연금과 연봉은 그대로인 채 과중한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불행한 결혼생활

    1790년 12월 하이든은 초청을 받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 모차르트와 만찬을 함께했다. 그때 모차르트는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향하는 하이든의 건강을 우려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노인 하이든의 건강 때문이 아니라 1년 뒤에 병사한 모차르트 때문에 마지막 만찬이 되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하숙집 딸 알로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졌다가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츠와 결혼했다. 하이든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이든은 가발 제조업자 켈러의 딸들에게 음악교습을 하면서 막내딸인 테레사를 깊이 사랑했으나 수녀가 된 테레사 대신 언니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와 극심한 불화를 겪었다. 두 사람은 자식도 없이 끔찍한 결혼생활을 했고, 서로 늘 새로운 연인을 만들곤 했다.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하이든하우스

    헤어진 연인이 가난해지면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던 하이든이지만 베토벤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스물이 갓 넘은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하이든이 영국을 오가고 에스텔하지 가문의 연주로 동분서주하면서 교습 시간이 줄어들었다. 베토벤은 이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부정적으로 회고했다. 하이든도 베토벤의 ‘오만방자하고 배은망덕한’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교습 시간이 줄자 하이든은 베토벤을 다른 작곡가에게 보내려고 했는데, 성격 급한 베토벤은 그때 이미 비밀리에 다른 개인교습을 받고 있었다.

    1800년 하이든은 스코틀랜드 출신 시인 제임스 톰슨의 전원시 ‘사계’를 각색해 영어 대본의 오라토리오를 만들었다. 톰슨의 시는 5541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하이든은 이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부 39곡으로 편집해 풍광, 온도, 색채 등 각각의 계절적 특징에 적합한 화성과 박자, 멜로디로 생생하고 조화롭게 표현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3명의 농민이 목가적으로 계절의 차이를 노래하지만 일관성 부족이라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천지창조’엔 여러 명의 천사가 등장해 신에 대해 서술하지만 ‘사계’는 인물이 다채롭지 못하다는 것을 하이든도 안타까워했다.

    헤어진 연인도 살갑게

    하이든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가장 상업적이고 예술적인 작곡가였으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빈의 관객은 베토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제자 베토벤은 이미 스승 하이든의 가르침보다 높고 멀리 나가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스승의 음악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베토벤이 아무리 자신을 험담하고 스승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해도 하이든은 워낙 관용적인 사람이라 베토벤의 음악을 폄훼하거나 격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년의 하이든은 ‘사계’ 등 대작을 만들면서 기력이 노쇠해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변함이 없었다. 하이든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는 아내 마리아 안나가 사망한 후였기에 그는 모든 옛 연인에게 섭섭해하지 않을 정도의 돈을 남겼으며 친척과 지인들에게도 골고루 분배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공한 1809년 어느 날, 병상의 하이든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빈에 주둔한 프랑스 장교들과 빈의 귀족, 지식인, 평민 등 생각과 사상, 이해관계가 다른 각계각층의 추모객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기렸다. 소탈하며 친근하고 유쾌한 그의 음악은 비록 열렬한 추종자는 많지 않을지라도 입에 거품을 물고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그럴싸한 논리로 반대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고 늘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여기고 만족하게 살았다. 하이든의 음악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천재들과 함께 사랑받으면서 굳건히 살아남은 것도 이런 인생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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