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키피아<br>아이작 뉴턴 지음, 이무현 옮김, 교우사, 320쪽, 1만6000원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와 아담의 사과는 원죄의식의 근원으로 작동하면서 기독교 문명을 탄생시켰다. 비너스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게 한 파리스의 황금사과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다. 궁사 빌헬름 텔이 벌칙으로 명중시킨 사과는 스위스 독립전쟁을 촉발한다. 폴 세잔이 그린 정물화 사과는 사물의 질서를 재창조해 현대미술의 출발을 알린 팡파르다.
동화 속 백설공주가 한 입 베어 먹은 독 사과는 전 세계 어린이를 울리고 웃긴 것은 물론 애플사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한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 로고 사과는 세계 최초의 PC 상징이면서 스마트 혁명의 선두에 서 있다. 뉴턴의 사과는 만유인력의 발견을 계기로 근대과학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고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뉴턴의 사과에 얽힌 전설은 진실 여부로 수많은 비본질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일자 뉴턴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사과나무 아래서 만유인력을 생각해낸 건 사실”이라고 적어도 네 번은 말했다는 설까지 전해진다. 뉴턴의 고향 울즈소프의 과수원에서 가지를 친 묘목으로 기른 사과나무는 한국 표준과학연구원 정원에서도 자라고 있다.
만유인력의 원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책이 ‘프린키피아’(원제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번역되는 이 책은 훗날 ‘원리’라는 뜻의 라틴어 약칭 ‘프린키피아’로 줄여 불리기 시작했다. ‘프린키피아’는 모두 3권으로 이뤄졌다. 1권은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같은 유명한 운동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2권은 데카르트식 우주관과 케플러 법칙이 모순됨을 수학적으로 증명한다. 유체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는 유체의 저항 때문에 타원 모양을 그리며 운동할 수 없다는 게 뼈대다. 뉴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만유인력’의 법칙은 3권에 등장한다.
갈릴레오+케플러+데카르트
과학자들은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힘=질량×가속도(F=ma)’라고 하는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역학체계를 다룬 내용인 반면, 가속도의 법칙은 뉴턴이 창안해낸 새로운 내용이다. 모든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가속도가 존재한다는 이 법칙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법칙은 비행기를 하늘로 띄운 날개 양력을 설명해낸 ‘베르누이 정리’의 기초가 됐다. 지진해일(쓰나미) 현상, 혈액의 흐름, 빅뱅을 설명할 때도 ‘F=ma’는 가장 유효한 법칙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태양과 달, 지구가 같은 물리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뉴턴의 주장은 인류의 우주관을 바꿔놓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뉴턴은 ‘보편중력’이라는 개념으로 태양과 달, 지구의 인력을 설명했고, 밀물과 썰물의 원리도 찾아냈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법칙은 땅에서만 가능할 뿐 하늘(우주)이나 바닷속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었다. ‘원형의 궤도를 돌고 있는 달은 결코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다.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젊은 뉴턴은 줄곧 이 문제에 골몰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달이 접선 방향으로 자꾸만 날아가려 하지만, 지구의 인력에 의해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원형궤도상을 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공위성 발사 원리도 만유인력을 이용한 것이다.
뉴턴의 위대함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미분과 적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프린키피아’의 높은 수학적 완성도는 미적분 덕분이었다. 뉴턴은 스승인 아이작 배로의 수학 연구를 본받아 여러 무한급수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연구해 미적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뉴턴은 만년에 “내가 완성한 연구는 모두 흑사병이 퍼지고 있던 1665년부터 1666년까지의 2년 동안에 이뤄진 것이다. 이때만큼 수학과 철학에 마음을 두고 중요한 발견을 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과 이야기도 이때의 일화다. 1665년 영국에는 페스트가 창궐했다.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대도 휴교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뉴턴은 이때부터 2년 동안 한꺼번에 22가지 연구에 몰두한다. ‘프린키피아’에 담긴 모든 이론은 이때 밝혀낸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네다섯 살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이때를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뉴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건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뉴턴의 사상적 거인은 세 사람이다.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다. 갈릴레오의 역학이론과 케플러의 세 가지 행성운동법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없었다면 ‘프린키피아’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이었다. 실제로 ‘프린키피아’는 케플러의 법칙이 수학적으로 성립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역학을 재해석하려던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의 사상적 스승을 뉴턴에게 연결해준 사람이 배로였다.
평생 독신으로 산 뉴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과학의 시작, 근대성의 시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데는 혜성을 발견한 에드먼드 핼리의 공이 컸다. 핼리는 1684년 8월, 뉴턴을 찾아가서 케플러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후크, 핼리, 이 세 사람은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역으로 비례한다는 가설로 케플러의 법칙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실제로 증명할 수 없었다. 핼리가 물었다. “만약 태양에 끌리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행성은 어떤 모양의 궤도를 그리면서 돌게 될까?” 뉴턴이 답했다. “그거야, 타원이지. 내가 계산해본 적이 있거든.”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한 종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깔끔하게 증명해 핼리에게 편지로 보냈다. 핼리는 뉴턴에게 그것을 발표하도록 간곡하게 권했다. 뉴턴은 이를 못 이겨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책으로 출판한 것도 핼리의 성화 때문이었다. 책 발행 비용까지 핼리가 부담했다.
1687년 7월 5일 ‘프린키피아’가 처음 출간됐을 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초판 1000권도 다 팔리지 않았다. 내용이 워낙 어려워 당대의 과학자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프린키피아’가 널리 알려진 것은 출간 1년을 훌쩍 넘긴 뒤부터였다.
‘프린키피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리학 책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물리학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세계 과학사 전체로도 이보다 영향력이 더 큰 책은 아직 없다고 한다.
유럽은 오랜 세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역학이 물리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천문학을 호령하고 있었다. 2000년간 절대적인 진리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서는 강제운동을 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오로지 접촉을 통해 전달된다고 보았다. 천체 역시 원운동을 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힘이 필요 없다고 여겼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인류는 마침내 10만 년의 몽매한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우주 전체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날에도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필요한 극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뉴턴의 이론이면 충분하다.
‘프린키피아’는 단지 세상의 원리와 우주관만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계몽사상은 뉴턴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철학자들은 뉴턴의 자연철학에 힘입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문화적 현상에서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뉴턴은 ‘과학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성의 시작’이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라플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우주를 설명할 때 신이라는 가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창세기의 구절을 빌려와 추모 시로 뉴턴을 칭송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는데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세상이 밝아졌다.” 볼테르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라고 일컬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천재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제프 라그랑제에게 물었다. “나와 뉴턴 중 누가 더 위대하오?” 라그랑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뉴턴 같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발견할 세계도 하나뿐입니다.”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는 여러 명 나왔지만 뉴턴 같은 과학자는 단 한 명밖에 출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