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대선 뒤흔든 대한민국 50대의 자화상

  • 고승철│소설가 koyou33@empas.com

    입력2013-01-18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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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렸다. 데모하다 끌려간 친구의 재판정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도 사고 아파트도 장만하며 열심히 달렸지만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은퇴 후 등산 가서 야생화 사진 찍어 보내는 친구들, 그리고 암으로 세상 떠난 친구들의 부고(訃告)….
    • 박근혜를 새 대통령으로 만든 한국의 50대. 그들은 누구인가.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1969년 여름, ‘3선 개헌’을 반대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와 시위하고 있다.

    “뭣하러 태어났나,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나?”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몹시 당혹해지리라. 적절한 답변을 하려면 잠시 실존적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50대 남녀라면 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존재 이유를 국가가 규정해줬기 때문이다. 1968년 12월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코흘리개들을 빼곤 국민 모두가 이 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야 했다. 초·중학생들은 뜻도 모르면서 암송했고, 암기력 떨어진 40대, 50대 공무원들은 부하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돌대가리’ 학생들은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 몽둥이찜질을 당해가며 읊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누군가가 멜로디를 붙였다. 노래를 부르면 그 긴 가사가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으로 50대는 1954~1963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베이비 부머(1955~1963년생) 세대에 속한다. 같은 50대라도 50대 초반과 후반의 의식구조는 꽤 다르다. 격변, 격동의 한국이기에 고작 몇 살 차이인데도 사회적 경험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입시제도만 해도 죽 끓듯 변덕을 부렸다. 1954년생인 필자의 삶을 뼈대로 삼아 오늘날 50대 세대의 초상(肖像)을 그려본다.



    부산에서 태어난 필자는 경남 통영으로 전근한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통영으로 이사했다. 부산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여섯 살인 1960년 어느 봄날, 고교생인 이종사촌형이 팔에 붕대를 친친 감고 통영 우리집으로 피신한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데모’에 참가했다가 팔을 다쳤다는 것이다. 형이 독립투사처럼 보였다. 형이 참여한 시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의 ‘3·15의거’였다.

    입시지옥의 몽둥이찜질

    1961년 3월 통영(당시엔 ‘충무’였음)의 축구 명문인 충렬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였음)에 입학했다. 한글을 모른 채 들어갔는데 그땐 그게 당연했다. 여러 대회에서 우리 학교 축구팀이 우승을 휩쓸었다. 김호, 김호곤, 고재욱 등 훗날 국가대표로 활약한 이들이 그 무렵의 선수였다.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세상이 바뀐 듯했다. 집에 배달된 여러 신문에서 검은 색안경을 쓴 군인 사진을 봤다.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였다.

    1학기를 마치고 마산(지금은 ‘창원’으로 바뀜)으로 전학했다. 아버지 근무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2학년 때까지는 남녀 공학반이었지만 3학년 때 남자반, 여자반으로 나뉘었다. 남자반 교실 앞을 지나갈 때 여자 애들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떤 담임은 시험점수가 나쁜 사내아이들이 문제지를 들고 여자반 교실을 찾아가도록 해서 망신을 줬다.

    5학년 때는 파월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게 주요 숙제였다. 답장이 오는 경우도 많았다. 으레 “누나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 아이가 전학 오면 스타가 되었는데, 부드러운 서울말씨가 신기했다. 양동욱 군(한국은행 간부)이 그런 친구였다. 양 군은 공무원인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 마산에 잠시 왔다가 곧 서울로 돌아갔다. 필자의 아버지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수산업을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부모가 사는 섬으로 가서 지냈다.

    초등학교 6학년은 중학입시 공부를 ‘죽기 살기’로 하는 시기였다. 신문엔 ‘입시지옥’이란 제목이 자주 실렸다. 경기중, 경기여중은 전국의 수재가 모이는 명문학교로 소문났다. 지역별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참고서로는 ‘동아전과’가, 문제집으로는 ‘동아수련장’이 가장 유명했다.

    어린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매를 맞아가며 공부했다. 거의 매일 시험을 쳤는데, 한 문제 틀리면 몽둥이 한 대를 맞는 일이 허다했다. 학교는 입시를 준비하는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체육 실기 점수가 입시에서 10%를 차지해 비중이 높았다. 턱걸이, 달리기, 공 던지기, 멀리뛰기 등 4종목을 단련하느라 매일 운동장에서 뒹굴었다. ‘체력은 국력’이란 말이 유행하면서 공부를 잘해도 운동을 못하면 명문학교에 합격하기 어려웠다. 친한 친구 L군은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못 가고 이발소에 취직했다.

    필자는 마산중에 들어갔다. 머리를 박박 깎아야 했고 검은색 교복, 모자를 착용해야 했다. 등교할 때부터 규율부 선배들이 완장을 차고 복장 위반 학생들을 잡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제 잔재가 조성한 ‘병영’ 분위기였다. 근육질의 체육교사는 툭하면 학생들을 ‘개 패듯’ 팼고 교장의 훈화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에 개통했다. 대전~대구 구간 개통식에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왼쪽). 외환위기 한파로 매출이 급락한 서울 상계동의 한 실내화 상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건을 바라보고 있다.



    전교 1등 휴머니스트 박재완 군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50대들은 “우리 세대의 불안감과 억울함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선택하게 했다”고 말한다.

    미술교사는 실기준비물을 갖고 오지 않은 학생에게는 점수를 낮게 줬다. 빈곤한 학생은 학교 매점에서만 파는 그 준비물을 사기 어려웠다. 미술교사가 커미션을 먹고 그런 잡다한 준비물을 강요한다는 것쯤은 어린 학생들도 잘 알았다. 해마다 6·25 때면 반공 웅변대회가 열리는데 참가자들은 두 팔을 벌려 부르르 떨며 “김일성 도당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고 이 어린 연사, 온몸 바쳐 맹세합니다!”라고 절규했다.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해 온 미국 평화봉사단 소속 영어교사가 기억에 떠오른다. 금발 백인인 그는 가끔 영어 수업에 들어와 발음을 교정해줬다. 사과를 보여주며 뭐냐고 묻기에 학생들이 경상도식 영어로 “애펄”이라고 대답하자 “애뽀우”라고 바로잡았다. 중2 수학여행을 서울로 갔다. 청진동의 여관방에서 한 방에 30여 명이 함께 잤다. 이불과 베개가 모자라 잠을 설쳤다. 광화문 앞 정부종합청사 등 고층빌딩을 보고 ‘촌놈’들은 놀랐다. 조악하게 인쇄된 음란소설인 ‘꿀단지’와 ‘동굴초’가 남학생 사이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업시간에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키면 뺨을 얻어맞고 뺏겼다.

    중3이 되자 고입 ‘공부 전쟁’이 시작됐다. 필자 세대는 중입, 고입, 대입 시험을 치러야 했다. 지방 중소도시인 마산에서 우등생들은 부산, 서울, 대구 등의 명문고교로 진학했다. ‘대도시 유학’을 하려면 경제력 뒷받침도 필요했다. 3년 내내 거의 전교 1등을 독차지한 박재완 군(기획재정부 장관)은 부산고에 갔다. 박군은 가난한 열등생에게도 친절한 휴머니스트였다.

    필자는 마산고에 진학했다. 부산고, 경남고 등 메이저리그로 공부 고수들이 몰려갔기에 마이너리그인 마산고에서는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었다. 절친한 중학교 동기생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마산상고에 들어갔다. 의리를 지키려 한동안 그 친구와 함께 주산학원에 다녔다. 주산학원에서 인문고 학생은 나 혼자였다.

    고등학생 때는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다. 홍콩 배우 이소룡이 주연한 영화 ‘용쟁호투’가 히트하면서 청소년들은 줄줄이 무술 배우기에 나섰다. 필자도 근질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합기도와 복싱을 수련했다. 복싱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듯했다.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끌어 결승전 중계 때는 너도나도 TV 앞에 앉았다. 김봉연은 홈런을 잘 때렸고 군산상고는 역전승에 능했다. 라디오에선 조영남의 ‘딜라일라’,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등 인기가요가 흘러나왔다.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여배우 3명은 ‘트로이카’를 형성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교련이 고교 이상 학교에서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됐다. 북한의 남침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란다. 장교 출신 교련교사가 군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도 얼룩덜룩한 개구리 무늬의 교련복 차림으로 목총을 들고 각개전투를 익혔다. 때때로 진짜 총을 받아 분해 결합하는 연습을 했다. 여고생들은 간호병 역할을 맡았다. 학생들은 외출할 때 사복 착용이 금지됐다. 영화관, 빵집에도 마음대로 못 다녔다. 남녀 학생이 빵집에서 만나다 합동 규율단속 교사에게 걸리면 정학을 당했다.

    카트린 드뇌브의 매력

    영화감상은 월말고사가 끝나는 날 학교가 지정한 극장에서 단체관람을 하는 것으로 때워야 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려면 단속 교사에게 걸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몰래 본 영화 가운데 루이스 브뉴엘 감독의 ‘세브린느’가 기억에 남는다. 학대를 당하며 성적 쾌감을 얻는 마조히즘 장면은 10대 소년에게는 충격이었다. 주연 배우는 최고 미녀로 손꼽히던 카트린 드뇌브. 세월이 흘러 필자가 파리특파원으로 일할 때 그녀와 조우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길거리 곳곳에서 확성기를 통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잘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왔다. 쓰레기 청소차가 새벽에 거리를 달릴 때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틀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돼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다녀온 사람들이 “버스 안내양이 비행기 스튜어디스 못잖게 예쁘더라”고 떠들며 자랑했다.

    ‘공부벌레’ 고교생들은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몇 번 뗐니 어쩌니 하며 명문대에 진학하려는 야망을 키웠다. 일본 도쿄대 입시문제를 번역 출판한 책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서울대 입시의 제2외국어에서 독일어보다 불어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교장이 서울대 불문과,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갓 졸업한 ‘서울내기’ 교사를 채용했다. 우리는 그 총각 선생님들로부터 불어뿐 아니라 ‘서울문화’를 전수받았다. 멋진 패션의 옷을 입은 그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부 ‘꼰대’ 선생님들은 시샘했다.

    이수훈 군(전 동북아시대위원장, 극동문제연구소장)과 이봉조 군(전 통일부 차관)은 둘 다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으로 교실 맨 뒤에 나란히 앉아 열심히 불어를 익혔다. 고입 때 수석 합격했던 이재영 군(남양인터내셔날 고문)은 여전히 성적이 좋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돋보인 이화섭 군(KBS 보도본부장)은 눈빛이 형형했다. 그림을 잘 그렸던 노화욱 군(전 충북 정무부지사)과 임창섭 군(하나대투증권 대표이사)은 나중에 각각 미술 이외의 분야로 진출했다.

    김지하 ‘오적’ 베껴 쓰며…

    필자는 현실문제에 조금씩 눈을 떠가면서 수험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러 신문과 ‘신동아’ ‘사상계’ 같은 잡지를 읽으며 우국지사(憂國之士)가 돼갔다. ‘사상계’가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입시 준비에 몰두하는 친구들은 시국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오적’ 시를 공책에 베껴 쓸 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울에는 반(反)정부 기류가 심상찮다는데 지방 중소도시 시민들은 시국 문제에 둔감했다. 3선 개헌으로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들끓을 때 교장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훈화를 되풀이했다.

    고3 때인 1972년 가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됐다. 그해 12월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했다. 민주주의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까까머리 고교생이 알았다. 그때 창간된 문학잡지 ‘문학사상’은 청량제였다.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으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1973년 1월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중점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나라 경제가 위기를 맞는 듯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를 치렀다. 머릿속에 질풍노도(疾風怒濤) 상황이 벌어졌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랴. 첫 대입에서 떨어졌다. 참담했다. 내 업보이니 누구를 탓하랴. 답답해서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 소유의 배를 타고 멀리 일본이나 베트남으로 밀항이라도 할까 하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 바로 유학 가는 길은 없나 하고 궁리하기도 했다.

    이듬해 대학입시에서 또 실패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불운 때문이었다. 당시엔 걸핏하면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터졌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변명처럼 들릴까봐 주위에 밝히지 않았다.

    긴급조치 시대…사라지는 학생들

    1975년 들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입에 또 도전했다. 이번엔 무난히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서울대는 캠퍼스를 관악산으로 옮겨 문을 열었다. 1학년 때는 소속 학과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반별 수업이 진행됐다. 같은 반원 가운데 강금실 양(전 법무장관), 박원순 군(서울시장), 정과리 군(문학평론가, 본명은 정명교), 안창호 군(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석기 군(연극인 윤석화 씨의 남편) 등이 있었다.

    그해 4월 인민혁명당 관련자 8명이 북한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선고 당일에 처형됐다. 서울대 농대 김상진 학생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할복자살했다. ‘김상진 열사’ 추모 시위로 서울대 정문 앞에는 최루탄 연기가 그득했다. 5월엔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이 조치는 유신체제를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수색할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박원순 군은 초기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했다. 골수 운동권도 아닌 신입생에겐 가혹한 조처였다. 개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는 문을 닫았다. 이렇듯 대학 졸업 때까지 거의 모든 학기마다 정상적인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필자도 몇몇 ‘서클’(당시엔 ‘동아리’ 대신에 ‘서클’이라 불렀다)에 들어가 현실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했다.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는 서클의 분위기가 자유인을 추구하는 필자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유신타도’에 앞장서다 구속된 고교 친구 주대환 군(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서익진 군(경남대 교수)이 재판을 받을 때 방청하러 가니 죄책감이 엄습했다. 하숙집에서도 하숙생들이 자주 사라졌다.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끌려간 것이다. 남은 하숙생들은 시국을 논하며 밤새도록 소주를 마셨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그해 12월 12일 하극상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보도 통제를 하는 바람에 대다수 국민은 이런 소식을 한동안 전혀 몰랐다.

    국가 지도자 뽑는 의미 절감

    전공이 경영학이라 대학 동기생들은 거의가 대학원, 은행, 공무원, 기업 등으로 진출했다. 삼성, 현대, 럭키금성(요즘의 LG), 대우 등 대기업에서는 똘똘한 신입사원들을 확보하려고 명문대 출신 사원들을 모교에 보내 후배들을 유치하도록 했다. 선배들은 술과 밥을 사며 입사를 권유했다.

    필자는 동아일보 시험에 합격해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1980년 늦가을에 신군부 정권이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됐다. 당시엔 문화방송(MBC)과 경향신문만이 신입사원을 뽑았다. 신경민 전 MBC 앵커(민주당 의원) 등 입사 동기와 함께 1981년 1월부터 기자로 일했다. 그해 2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신문, 방송에 주요 뉴스로 보도됐다. KBS, MBC의 오후 9시 뉴스에서 머릿기사는 으레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여서 ‘땡전 뉴스’라는 말이 나왔다.

    전 대통령이 집권한 7년간의 ‘5공 정권’은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비판을 막았다. 그러면서 야간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프로야구 개막 등 유화책도 동원했다. 1983년 5월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한 달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다.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더욱 가열됐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등 민주화 투사 대학생들이 숨졌고 이들을 추모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1987년 6월 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6월 10일에는 수십 만 명의 시민,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6·10 민주항쟁’에 30~40대 직장인인 ‘넥타이 부대’가 대거 참여해 민심이 전두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졌음을 보여줬다. 한국은행 출입기자이던 필자는 그때 플라자호텔 꼭대기 층에서 시위 광경을 지켜보았다. 서슬 시퍼렇던 독재정권이 시민들의 단결 앞에 무너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바뀌어 1987년 12월 국민은 오랜만에 제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후보가 출마해 군인 출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야당 후보의 낙선은 후보 단일화 실패 탓이었다. 오늘날 50대는 그때 처음으로 대통령선거를 해봄으로써 국가지도자를 뽑는 의미를 깨달았다.

    “아들아, 넌 의대나 법대 가라”

    전두환 정권의 경제 성적표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재정동결, 물가안정 등을 꾀하면서 역설적으로 시장자율화 기반이 마련됐다. 1980년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1981~1982년엔 6~8%의 성장률을 보였고, 1986~1988년엔 대호황을 누렸다. 1987년의 성장률은 12.3%에 달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됐고 LG와 삼성전자의 컬러 TV가 중저가 상품으로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19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한국인의 자긍심은 올라갔다.

    오늘날 50대는 1980년대엔 대개 대학생, 새내기 직장인이었다. 1960~1963년생은 ‘386세대’(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로 전두환 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1980년대에 한국 경제가 중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직장인들은 자가용을 갖기 시작했고 아파트를 장만하려 열을 올렸다. 필자도 승용차를 굴리게 됐고 해외출장도 자주 갔다. 1990년 7월엔 파리특파원으로 부임해 상상도 못했던 해외생활을 하게 됐다.

    1990년대에 직장인들은 1997년 12월 외환위기를 맞을 때까지 저마다 부지런히 일하며 살림을 늘려갔다. 외환위기 때 여러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면서 일터를 잃은 직장인이 수두룩했다. 이들은 자녀들이 앞으로 직장에서 ‘잘리는’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의대, 법대로 가서 전문직에 종사하도록 종용했다.

    21세기인 2000년대에 접어들자 은퇴 이후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그런 와중에 암으로 사망하는 친구가 늘어났다. 마산상고를 나와 야간대학을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김성찬 군(변호사), ‘마방여자’ 등 경마소설로 이름을 날린 윤용호 군(소설가), 군인 시인 이기윤 군(전 육사 교수), 육사를 나온 독도연구가 진석근 군 등이 암 때문에 유명을 달리했다. 문자 메시지로 날아오는 부음 가운데 친구 부모상(喪)과 친구 본인상이 함께 몰린다.

    은퇴한 친구와 후배들은 산에 가서 야생화 사진을 찍어 배포한다. 폭탄주를 몇잔씩 마셔대던 호기도 사라졌다. 필자도 기업인으로 성공한 친구 홍진수 군(남양인터내셔날 대표)의 장남이 결혼할 때 주례로 데뷔했으니 이제 ‘원로’ 대열에 진입한 기분이 든다. 세대별 여가생활 조사자료를 보니 50대가 가장 만족해하는 여가활동은 동창회, 계모임 등 친목모임(80.5%)과 종교모임(69.1%)이라고 한다.

    1990년대 이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때만 해도 세대 간의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킨 배경엔 변화를 바라는 젊은 유권자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386세대와 1950년대 출생자들은 정치의식에서 약간 차이를 보였다. 386세대 상당수는 노무현 후보의 불타는 투지에 열광한 반면, 직장에서 책임자급인 1950년대생들은 안정추구형이어서 이회창 후보를 선호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겨 박빙 승부의 묘미가 없었다.

    방송3사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50대의 89.9%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자의 62.5%가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 박 후보는 20대, 30대, 40대에서는 졌는데 50대의 적극적인 지지 덕분에 당선됐다. 50대는 왜 박 후보를 선택했을까. 몇몇 50대 유권자의 ‘표심’을 정리해본다.

    “종편 본다고 ‘꼴보수’라니…”

    “청년시절에 박통(박정희) 타도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냉철하게 살펴보니 박통은 김일성 체제의 북한에 맞서 국방력 강화와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본다. 박근혜 후보는 박통의 딸이어서 일단 관심을 끌었다. 10대 시절의 배고픔을 박통이 해결했듯이 박 후보가 나의 노후 불안을 덜어줄 것 같아 표를 던졌다. 우리 연배는 직장에서 고속 승진의 맛을 보지 못한 억울한 세대다. 불안감과 억울함이 박 후보를 선택한 이유가 아닐까.”(1955년생 남자 A씨·대기업 퇴직자)

    “젊은이들이 SNS로 소통하며 야당 후보에게 몰표를 준다기에 거부감을 느꼈다. 나도 친구들과 카톡, 페이스북 등으로 대화하며 50대의 응집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종편 TV를 보니 정치 해설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종편 채널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꼴보수’라 손가락질하는 젊은이들이 괘씸해 그들이 싫어하는 박 후보를 더욱 지지하게 됐다.”(1959년생 여자 B씨·유통업)

    “나와 안철수 후보가 동갑이어서 처음엔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그의 발언을 들어보니 ‘과대포장’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안철수 현상’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재인 후보에게 호감이 갔으나 그를 둘러싼 종북세력 때문에 표를 던지기 망설여졌다. 어쩔 수 없이 박 후보를 지지했지만 그녀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었다.”(1962년생 남자 C씨·대학교수)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고승철

    1954년 부산 출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동아일보 경제부장 및 출판국장

    現 나남출판 주필 겸 부사장

    저서 : 장편소설 ‘은빛 까마귀’ ‘서재필 광야에 서다’ 등


    “아들딸들이 ‘88만원 세대’니 어쩌니 하며 자신들만 불행하다고 여기며 대한민국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자신들이 해외연수, 배낭여행을 즐기는 여유는 등이 휘도록 일한 부모 세대의 노력 덕분 아니었나.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외국에 나가서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를 무시하면서도 우리의 노후자금을 탐내는 젊은이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박 후보를 찍지 않을 수 없었다.”(1963년생 여자 D씨·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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