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부자를 소망하는 한국 ‘사랑하며 즐겁게 살기’ 꿈꾸는 프랑스

이방인이 본 서울 새해 풍경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3-01-2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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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 원 이상, 예금 잔고 1억 원….
    • 중산층의 정의는 경제 수치일까. 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 하나 이상의 외국어 구사 능력,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악기 하나 이상, 자기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요리 하나 이상, 하나 이상의 시민단체나 자원봉사단체 참여….
    • 중산층은 경제적 개념이 아닌 문화적 개념이 되어야 한다.
    부자를 소망하는 한국 ‘사랑하며 즐겁게 살기’ 꿈꾸는 프랑스

    파리6구 카트린 라브레 공원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왼쪽)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놀이터.(오른쪽)

    세상이 작아졌다.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 정보통신과 운송수단의 발달은 정보와 물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했다. 이제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나 도시에서 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나 지역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삶의 근거지를 바꾸는 일이 점점 더 흔해진다. 공부를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국제결혼으로, 독재와 탄압을 벗어나려고, 전쟁과 기아를 피해, 은둔과 집필을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 모두는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발을 내디디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자기도 모르게 일상의 인류학자가 된다. 자기가 태어나 자란 그곳의 문화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의 문화 사이를 부단히 오가며 비교의 관점을 키운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의 관습과 풍습에 거리를 유지하고 새로운 공동체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스스로를 적응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결코 새로 선택한 나라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는 없다. 이방의 언어는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영원히 외국어로 남아 있다. 똑같은 어휘를 사용해도 언어에 담겨 있는 미세한 뉘앙스와 정서적 함축을 토박이들처럼 느끼지 못하고, 일상의 관습을 아무리 익힌다 해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방인은 옛 공동체와 새로 선택한 공동체 사이에서 늘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이방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경계선 부근의 회색지대를 맴도는 주변인이 된다. 그에게는 어떤 공동체의 규범과 관습도 꼭 따라야 할 절대적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다.

    두 개의 공동체 사이를 오가는 이방인은 두 공동체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8년 이후 암스테르담에 살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적인 관습의 자명함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네덜란드의 관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독일 출신의 혁명 사상가 마르크스는 1850년대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독일인의 관습과 영국인의 관행 모두를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사이드는 스스로를 ‘머무를 곳 없는 자(Out of place)’라고 불렀다. 프랑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알튀세르와 데리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파리로 이주한 이방인들이었다. 식민지 영토 출신이었던 그들은 메트로폴리탄 중심부 사회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어느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한 자들이 남긴 사고(思考)의 흔적들이다. 그들은 지연과 혈연이라는 족쇄, 관습과 편견의 벽을 ‘비교의 눈’을 통해 넘어서면서 조금 더 보편에 가까운 사고를 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다.



    1980년대 유학생활 7년, 그리고 2000년대 정신적 망명생활 10년을 파리에서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나도 그동안 떨어져 살았던 서울이라는 도시와 서울 사람들의 관습과 시각,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것을 파리에서의 체험과 비교하게 된다. 고향을 떠난 이방인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파리에서 서울을 떠올리던 나는 서울에 돌아와서는 파리를 떠올린다. 나는 완전한 서울 사람이 될 수 없고 온전한 파리 사람도 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파리에서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프랑스 라디오를 듣고 프랑스 책을 읽었지만, 파리지엥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서울에 돌아와 겉으로는 쉽게 서울 사람이 되었지만 마음속은 서울이란 거대한 연못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파리에서 프랑스 사람들을 관찰하던 나는 서울에 돌아와서는 한국 사람들을 관망한다. 두 개의 도시에 속하는 사람은 사실 어느 하나의 도시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당연히 거기 있는 ‘실재(reality)’로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현실은 복수의 실재(multiple realities) 가운데 오로지 하나의 실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든다. 때로는 지금 눈앞의 세상이 신기루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일상의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쇠로 만든 울타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방인은 결코 비교와 의심의 시선을 버리지 않는다. 당연한 풍경과 물론의 세계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한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아니라 작고 미세한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풍경 #84 행복의 사회학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떨어져 추운 날이 잦다보니 겨울의 정취가 깊게 느껴진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위에 흰 눈이 내려앉은 모습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발밑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올라온다. 눈길은 미끄럽지만 눈길을 걷는 마음은 상쾌하다. 동네 동물병원 유리창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올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세요?! 더욱 부자되세요?! 더욱 행복하세요?!’

    ‘행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며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위쪽에 있는 몽마르트르 공원을 산책하는데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서초구 서울시 25개 구 중 행복지수 1위.’ 녹지 분포, 공기의 질, 문화시설, 교육시설, 상업시설, 체육시설 등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서초구가 서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구청의 홍보물이다. 동물병원의 플래카드가 내건 돈과 건강이라는 조건에 서초구청이 내건 좋은 환경이라는 조건이 더해진다면 행복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강남성모병원 앞 사거리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높이 걸려 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의 약속이다. 그 플래카드를 바라보다가 박 당선인이 텔레비전 토론에서 “중산층 70%의 사회를 만들겠다”라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이 두꺼운 사회가 안정된 사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한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70%에 육박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주관적 평가의 지수가 훨씬 낮아졌다. 그리고 중산층의 정의에는 그런 주관적 평가보다 객관적 지표가 사용돼야 한다. 항간에는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중형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보유가 한국 중산층의 기준이라는 풍문이 떠돈다. 누가 만든 기준인지는 몰라도 임기 5년 동안에 70%가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회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의 중산층 정의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중산층의 기준이 거의 모두 ‘경제적’인 수치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때 나는 프랑스의 중산층을 염두에 두고 중산층의 ‘문화적’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적이 있다. 하나 이상의 외국어 구사 능력,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악기 하나 이상, 자기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요리 하나 이상, 하나 이상의 시민단체나 자원봉사단체 참여. 경제적 소유를 바탕으로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이상적인 중산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가 오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을 주고받는데 프랑스에서는 서로 뺨을 마주치며 “본 아네(Bonne annee!·좋은 한 해!)”라고 말한다. 복을 많이 받아 좋은 한 해를 맞이하고 더욱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프랑스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행복’과 ‘좋은 한 해’가 무엇이냐를 물어보면 그에 대한 답변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건강하고 부자 되기’를 바란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거기서 한발 나아가서 ‘사랑하며 즐겁게 살기’를 꿈꿀 것이다.

    풍경 #85 서울의 몽마르트르 공원

    서초구 방배동에는 ‘에콜 프랑세즈’(프랑스 학교)가 있고 프랑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래마을이 있다. 그래서인지 서초구는 파리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서래마을 옆의 언덕에 새로 조성한 공원의 이름을,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이름을 따서 몽마르트르 공원이라고 붙여놓았다. 1970년대 불문학자 김붕구 교수가 쓴 ‘서울과 파리의 마로니에’라는 수필집이 있었는데 앞으로 누가 ‘서울과 파리의 몽마르트르’라는 책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어둠이 내린 몽마르트르 공원을 산책할 때의 일이다. 공원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공원 풀밭 위에 군데군데 토끼들이 보였다. 산토끼가 아니라 집에서 키우던 집토끼들이다. 아기 토끼를 애완용으로 키우다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워 내다 버린 토끼들이라고 한다. 가로등은 하얗게 졸고 있고, 눈이 쌓이는 차가운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토끼들이 애처로워 보였다.

    보통 때 주말이면 몽마르트르 공원에 서래마을 프랑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청소년들이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놀기도 한다. 그 가운데 프랑스어를 하는 한국 아이들이 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한국 아이들이 프랑스 아이들을 놀리거나 못살게 구는 경우가 많다. 친해지자는 의사의 표현이다. 그러면 프랑스 아이들은 저항하지 않고 그저 “세 파 드롤(C‘est pas drole!·재미없어!)”이라는 말만 하며 피한다. 괴롭게 굴어도 힘으로 대항하는 아이가 없다. 한국 아이들은 몸싸움을 즐기는 데 견주어 프랑스 아이들은 서로 거리를 둔다. 어려서부터 아무리 화가 나도 폭력을 사용하면 야만이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표현하라는 생각을 깊게 받아들인 결과인 듯하다.

    푸른색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버스 옆구리에는 ‘지방흡입 하나만 꽉 잡았다’는 문구와 함께 울퉁불퉁한 뱃살을 잡고 있는 손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말을 유행시켰고, 얼짱과 몸짱이 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해 얼굴 윤곽을 바꿔주고 작은 얼굴로 만들어주며 얼굴 비대칭을 바로잡아주고 가슴과 엉덩이를 풍만하게 해주고, 팔자주름, 눈가주름, 이마주름, 목주름 등 온갖 주름살을 제거해주는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가 성업 중이다.

    풍경 #86 한의원의 변모

    그런데 며칠 전 구반포 쪽으로 걸어가다가 건물 유리창에 쓰인 한의원 광고 문구를 보게 되었다. ‘탄력 있는 자신감, 몸매관리.’ 성형외과, 치과, 피부과 같은 병원이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성 고객들을 위해 이미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한의원까지 여성들의 몸매를 관리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무슨 약을 어떻게 써서 불필요한 살을 없애주는지 몰라도 그런 광고는 한의 본래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9호선 지하철을 탔더니 전동차 실내에 ‘독열로 인한 여드름 제거’라는 한의원 광고가 붙어 있었다. 비아그라 때문에 한의원의 수입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 이제 한의원들도 기초체력 강화가 아니라 여성들의 외모 관리를 해주고 수입을 늘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같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조선 여성의 외모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1888년 말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바라는 ‘조선기행’(1892)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의 여인들을 묘사했다. “조선의 여인네들은 대체로 지저분하고 아주 못생긴 인상이었다.”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서울에 온 프랑스 사람들은 한국 여성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한다. 파리 남자들도 프랑스에 유학 온 한국 여성들이 예쁘다고 말한다. “외모가 자본이다”라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다.

    그런데 너도나도 성형수술을 한 결과 많은 여성이 예뻐지긴 했지만 모두 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개성이 사라진 것이다. 얼굴의 형태와 피부도 중요하지만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개성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시인 조르주 뒤크로는 ‘가련하고 정다운 조선’(1905)에서 “조선의 여성들은 인생의 고달픔을 겪으며 살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행동거지를 보였다”라고 썼다. 그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위엄’이야말로 여성을 아름답고 개성 있게 만드는 기본 요소가 아닐까.

    여성들이 얼굴과 몸매를 관리하고 아름다운 옷과 구두와 핸드백, 액세서리로 온몸을 장식하듯이 서울의 새로 지은 고층 건물들도 외양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다. 특히 밤이 되면 건물 외벽에 화려한 빛의 쇼가 연출된다. 네온사인으로 만든 빛이 빗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모양도 보이고, 몇 초간의 간격을 두고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으로 바뀌는 네온 장식들도 있다. 상업용 건물만이 아니라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 옥상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바뀌는 조명장치가 마치 왕관처럼 얹혀 있다. 사람들이 외모를 통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고 튀어보려고 하듯이 건물도 바깥으로 보이는 외모를 통해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려고 한다.

    풍경 #87 건물들의 외모 관리

    한때 ‘남자와 생리대는 겪어봐야 안다’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성격, 가치관, 취향, 지적 능력과 감수성 등은 일정한 시간을 함께 지내봐야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친구든 애인이든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려면 그런 요소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외모와 조건만 보고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건물은 살고 일하고 휴식하기 위한 공간이지 보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건물 밖에서 보이는 산뜻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건물 안에 들어가서 느끼는 감응과 공간을 사용하면서 느끼는 편안함과 아늑함이 중요하다. “나 좀 쳐다봐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한 특별한 외모의 건물들이나 성형으로 아름다워진 엇비슷한 여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모도 중요하지만 내면도 풍요롭게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 가던 길을 급하게 달려간다.

    풍경 #88 평생학습의 나라

    평일 오후 4시경 지하철 잠원역 부근을 지나다보면 어린이들을 싣고 달리는 학원 버스의 행렬을 목격할 수 있다. 영어유아원 차량들이다. 소형 버스의 좌우측에는 영어 문구들이 적혀 있다. ‘Little School, Ivy Kids’에는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꿈, 자식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같은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다는 꿈이 담겨 있다. ‘LIA, Leader‘s International Academy’라는 문구는 자식을 반기문 정명훈 김연아 같은 세계적 인물로 만들고 싶다는 부모들의 꿈을 부추긴다.

    한글 문장들도 보인다. ‘영어의 날개를 달고 세계로 비상한다. 망가지기 쉬운 겨울방학. 당신께 기적의 8주를 선물해드립니다’. 자식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세계적 리더로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꿈을 자극하는 문구다. ‘얘야 너는 특별한 아이란다!’라는 어느 영어 유아원 광고 문구에는 “우리 아이는 달라요”라는 어머니들의 자부심에다가 아이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키워줘야 한다는 시대의 요청이 결합해 있다. ‘선행학습 사교육: 초6에 중1수학. 중3에 고1수학 끝냈어요’라는 문구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 영어와 더불어 수학에서 뛰어나야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부모들의 강박관념을 자극한다.

    지나가는 학원버스들을 바라보다가 시내버스를 타니까 이런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실력으로, 언어 지문과 소통하라 / 전력으로, 개념의 본질에 접근하라 / 총력으로, 평가원의 Code를 파헤쳐라.’ 대학입시를 위한 참고서 광고다. 그게 다인가. 대학에 들어가면 학점관리와 스펙 쌓기, 취직시험 준비가 기다린다. 그러고 나서도 학습은 끝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속도, 경쟁, 효율성, 승리, 성공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고단한 ‘피로사회’의 징후가 점점 짙어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프랑스 파리 부유층이 사는 16구에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사설학원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과거엔 못 보던 풍경이다. 프랑스에는 폴리테크닉, 고등사범학교, 고등경영학교 등 ‘그랑제콜’이라는 엘리트 양성을 위한 ‘대학 위의 대학’이 존재한다. 그런 학교에 들어가려면 조기 입시 준비 체제로 들어가야 한다. 어린 시절을 한가롭게 즐기던 프랑스 아이들도 이제 한국 아이들의 뒤를 따라 고단한 입시 경쟁에 시달릴 때를 맞고 있다. 세계화가 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풍경 #89 늘어난 애완견

    프랑스는 애완동물의 나라다.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전체 인구보다 많다. 1980년대 초 파리 유학 시절 슈퍼마켓에 가면 고양이나 개의 그림이 그려진 통조림이 쌓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애완동물을 위한 식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파리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불쾌한 장면을 만나게 된다. 애완견들이 일을 본 결과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녁 무렵 귀가하다가 방심하면 밟을 때도 있다. 그러면 정말 기분이 더러워진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왼쪽 발로 밟았으면 재수가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궁여지책으로 10여 년 전 파리시청과 구청은 ‘나는 우리 동네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치웁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구호가 ‘나는 나의 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치웁니다”로 바뀌었다. 개의 주인들이 동네(타인)를 배려하지 않으니 ‘당신이 당신 개를 사랑한다면 그 개의 변도 치워야 할 것 아니냐’라는 항의를 개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한 문구다.

    10년 만에 서울에 돌아오니까 애완견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저녁이면 동네 공원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서래마을 몽마르트르 공원에도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때로 목줄을 풀어놓은 개들이 풀밭 위의 토끼를 쫓아다니면 토끼들이 깡충깡충 뛰면서 도망 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개를 싫어하는(사실은 무서워하는) 나는 금방 토끼의 마음이 된다. 나의 공포를 알아챈 개의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안 물어요!”(그럴 경우 프랑스 사람들은 “사납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얼굴이 벌개진다. 그런데 다행히 요즈음에는 공원 나뭇가지에 이렇게 쓴 플래카드가 붙었다.



    “애완동물 동반 에티켓”

    - 통제할 수 있는 목줄을 착용한 후에 데리고 나온다.

    - 애완견 배변용 위생봉투를 꼭 지니고 다닌다.

    - 맹견은 입가리개를 씌웁니다.

    서초구 공원녹지과 전화: 2158-6660

    풍경 #90 야외 체육 시설

    1970년대에 유행한 표어가 있다. ‘체력은 국력이다’. 그동안 축구 야구 농구 등 프로팀들의 경기가 관객들의 열기를 북돋울 때마다 바라보는 스포츠가 아니라 실제로 하는 스포츠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운동을 하기 위한 체육 시설이 부족하다는 말도 많이 해왔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쌈지공원, 근린공원, 주변 녹지 등 곳곳에 야외 체육 시설이 설치되어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침저녁으로 동네 근린 체육 시설을 활용해 체력을 단련할 수 있게 되었다.

    카페, 식당, 노래방, 찜질방, PC방 등 실내에 머무르면 피곤한 몸이 더욱 피곤해진다. 값비싼 호텔 피트니스클럽 회원권이 없더라도 야외 체육 시설에서 다리를 앞뒤로 젓기, 팔을 아래위로 들어올리기, 허리를 빙빙 돌리기, 철봉에 매달리기 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사회체육 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아들이 거제도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어서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친구 이본은 아들이 사는 아파트 주변의 사회체육 시설을 활용한 체험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그 점에서는 한국이 프랑스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이다. 서래마을 몽마르트르 언덕에도 체육 시설이 있는데 각 시설물마다 구청 담당자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다. 고장이 나거나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한다. 그런 걸 보면 정말 행정 서비스가 엄청나게 좋아졌다.

    그런데 연말이면 아직 멀쩡한 어린이 놀이터의 시설들을 획일적인 새 모양의 것으로 교체하는 공사를 볼 때도 있다. 그건 예산 낭비일 뿐 아니라 전통의 파괴다. 파리 16구 한늘라그 공원의 놀이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던 오래된 그네와 목마를 손자 손녀들이 자랑스럽게 타고 있다. 파리 사람들은 똑같은 색깔, 똑같은 형태의 새 시설물들을 보는 것보다는 오래된 옛날 시설물들을 보존하려고 애쓴다. 지형과 상황에 따라 놀이터 시설들을 다르게 설계하고 디자인한다. 그래서 동네마다 시설물들의 모양이 다 다르다. 아직도 우리는 획일성을 띤 사회라면 프랑스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다.

    풍경 #91 두 개의 육교

    나는 매일 두 개의 육교를 건넌다.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몽마르트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누에다리’를 건넌다. 반포대교를 지나 예술의전당에 도달하는 8차선 대로 양안을 이어주는 육교다. 다리 밑에는 강물 대신 자동차의 물결이 흐른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리면 노란색 전조등과 붉은색 후미등을 켠 긴 자동차의 흐름이 중앙선 양쪽으로 쉴 사이 없이 이어진다. 다리 입구에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누에의 상’이 서 있다. 서초구의 상징으로 누에를 설정한 모양이다. 지하철 잠원역에도 누에 치는 모습과 거기에서 나온 명주실로 비단을 짜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자치단체마다 자기 지역을 특화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 시절에는 13구의 국립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시몬 드 보부아르 인도교를 건너곤 했다. 베르시 공원 쪽의 센 강 우안 강변로에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다리 끝부분에 서서 그 자동차들이 무엇이 급해서 저렇게 씽씽거리며 달려가고 있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서리풀 근린공원과 메리어트호텔을 이어주는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현옥 시장이 시내 교통체증 완화를 위해 급조한 종로와 광화문, 신문로의 육교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다. 잘리콩이라는, 서울에서 일하는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 다리는 완만한 아치형이고 중앙이 푸른색 아크릴로 장식되어 있다. 오르고 내리는 쪽에는 나선형 평면 통로와 계단으로 된 통로가 구분되어 있다.

    부자를 소망하는 한국 ‘사랑하며 즐겁게 살기’ 꿈꾸는 프랑스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現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논현동에서 이수교를 향하는 이 길에는 저녁이면 엄청난 자동차의 물결이 흐른다. 육교 밑에는 지하차도가 있어서 차량의 흐름을 편리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심코 육교를 지나가지만 나는 때로 육교 중간에 서서 주변 경관을 감상한다. 어떤 젊은 여성이 풍경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중국 관광객이었다. ‘센트럴시티 브리지’라는 이름을 가진 이 육교는 단지 길 양쪽을 이어주는 기능성만이 아니라 지역의 상징도 되고 또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전망대의 역할도 한다. 이방인은 두 개의 육교 위에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방인임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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