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마을 입구 남한강(왼쪽) 목계나루터 신경림 시비(오른쪽)
신경림의 시 ‘갈대’의 한 대목이다. 지금처럼 정치판에 아예 주연으로 나서기 이전, 신경림의 시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갈대’도 그렇고, ‘목계장터’는 또 얼마나 민초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던가. 남한강의 상류는 신경림의 왕국이다. 목계대교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입석엔 ‘신경림 시비 목계장터’라 새겨져 있다. “이 일대는 나의 영토”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목계장터가 대중에게 알려진 데에는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가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
야위어가는 고향
충주 땅을 휘감아 흐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은 ‘목계강’이다. 당연히 ‘목계리’가 있고 ‘목계나루’가 있다. 예전 목계나루는 중부지방 산물의 집산지였다. 남한강안(南漢江岸) 수많은 나루 중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시 ‘목계장터’에서 신경림은 자신의 고향 마을인 목계나루를 배경 삼아 떠돌이들의 삶과 생명력을 노래했다. ‘목계장터’란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래의 시구는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신경림의 시는 민중의 삶과 민요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한국인에게는 익숙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분석이다. 목계장터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點)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있었다. 가까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젓갈류, 생활필수품 등을 싣고 내륙으로 온 황포 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고 하니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 과거의 영화는 간데없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다.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소태면소재지
화로에 볶는 땅콩
소태면은 면소재지라는 이름을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수십여 채 건물이 전부인 초라한 마을이다. 평일임에도 인적을 찾기 힘들다. 마을 입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칼바람에 나부끼는 플래카드다. 누구누구의 손자가 OO대학에 합격했다고 쓰여 있다. 젊은이들을 만나기 어려운 늙어가는 고향, 대학에 합격한 10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뉴스가 된다. 이만큼 두고 온 고향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간다.
면사무소를 뒤로하고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오량리’라는 작은 산촌이 등장한다. 순간 눈앞을 턱하니 가로막는, 대문에 붙어 있는 커다란 입춘첩(立春帖)이 눈길을 잡아끈다.
소태마을 방물장수 할머니
방물장수 할머니(맨 왼쪽)가 경로당에서 물건을 팔고 있다.
휘갈긴 대련(對聯)이 떡하니 겨울바람에 꿋꿋하다.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는 의미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입춘 대련이다. 아득한 시절, 할아버지가 먹을 갈아 한지에 휘갈기는 입춘첩을 기억하는 세대인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주저 없이 대문을 쾅쾅 두드려본다. 평생을 소태면에서 살아온 변종성 할아버지(76)가 놀란 눈으로 겨울 손님을 반긴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방에서 땅콩 볶기에 여념이 없고 최종례 할머니(72)가 불청객을 반기며 갓 볶아낸 땅콩을 내놓는다.
귀가 먼 할아버지는 오가는 대화를 눈짐작할 뿐 땅콩 까기에 열심이다.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늙으신 할아버지의 거칠고도 투박한 손놀림 속에 땅콩들이 속속 붉은빛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화롯불에는 익어가는 땅콩들이 토닥거린다. 질화로다. 숯불이 발갛게 타들어가는 화로는 제천 장날에 구입했다고 한다. 난방 수단인 ‘낭구 보일러(화목 보일러)’에서 타고 남은 숯으로 데운 화로는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조그만 시골 방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그래,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질화로인가.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정지용의 ‘향수’에 등장하는 바로 그 질화로다. 그러고 보니 정지용도 바로 이웃 옥천 출신이 아니던가. 심심 두메산골의 강원도 골짜기가 아닌 충청도 깊숙한 내륙에서 보는 질화로는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최 할머니의 삶은 젊어서는 신산했다고 한다. 속리산 깊은 골짜기 보은에서 소태로 팔려오다시피 시집와서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몇 번인가 도망가다 붙잡혀 이렇게 허망하게 늙어버렸다는 할머니다. 그래도 만년의 할머니는 행복하고 또 유복해 보였다. 벽에 걸린 칠순잔치 사진이 빈곤의 시대를 온몸으로 거쳐온 개발연대 한국인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가을 땅콩 농사로 몇 백 이상 건졌다는 할머니의 수다와 함께 등장하는 자식 자랑은 그래도 듣기에 그만이다.
할머니에 이끌려 찾은 경로당(문패엔 ‘다기능회관’이라고 써놓았다)에는 온통 할머니들뿐이다. 개장수라며 넉살좋게 들어선 불청객들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사람들의 내왕이 없던 오지마을 덕을 단단히 보는 셈이다. 장작불로 따뜻하게 데워진 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커다란 보따리다. 방물장수 할머니가 보따리를 풀고 영업에 한창이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방물장수가 다니는 동네, 소태마을이 얼마나 궁벽한 산골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방바닥에는 형형색색의 점퍼와 솜바지, ‘메리야스’로 불리는 빨간색 내의들이 펼쳐져 있다. 방물장수 할머니는 건넛마을에서 태어난 김복례 할머니(75)다. 옷값은 대개 1만~2만 원이고 외상도 된다. 김복례 할머니가 내미는 외상 장부에 ‘시골틱’한 이름들이 빼꼭하다. 그나마 외상으로 들고 간 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옷값은 부조한 셈 친다는 할머니의 넋두리에 방안은 잠시 숙연해진다.
명절 때는 질금과 꼬까옷을, 김장철에는 새우젓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동리를 찾는다는 할머니는 그러나 학교는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일자무식, 그래서 상품 거래를 혼자만의 암호로 기록했다가 사나흘 만에 집에 돌아가면 아들에게 부탁해 외상 장부를 정리한다. 말로만 듣던 방물장수의 외상장부 기록 비법인 셈이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지금의 시대에 실제로 눈에 접한 방물장수 할머니의 외상 장부가 선사시대의 유적을 보는 느낌이다.
다음 길을 재촉하며 나서는 경로당 입구에는 유모차가 빼꼭하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보조기구로 사용하는 유모차다. 손자들의 젖내가 밴 유모차에 이번에는 할머니들의 손때가 반들반들하게 묻었다. 젖내와 손때가 섞여 묻은 유모차를 통해 할머니와 손자들이 서로 교감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유모차에 갑자기 남다른 감정이 이입되는 느낌이다.
산다는 것은 조용히 우는 것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소태마을을 뒤에 두고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은 신경림이 노래한 떠돌이 빈자(貧者)들의 삶과 맞물려 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처럼 한반도 구석구석을 흐르는 강의 울음은 외면화한 외침이 아니라 깊숙이 내면화한 억제된 울음이다. 가난하고 억눌려 살아온 자들의 삶이 토해내는 정적인 울음이다. 깊어가는 겨울, 외로움과 슬픔을 담은 남한강의 물줄기가 새벽 햇살에 보석같이 반짝이고 있다.
입춘첩을 써 붙인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