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산업의 쌀’ 익어가는 세계 최초 ‘녹색 제철소’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13-01-23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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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제철, 갯벌 메워 여의도 2.5배 일관제철소 건설
    • CNN “친환경 제철소 새 패러다임 제시”
    • 당진은 천안 다음으로 현금 많은 동네
    • “농업과 철강업 공존하는 도시 만든다”
    ‘산업의 쌀’ 익어가는 세계 최초 ‘녹색 제철소’

    충남 당진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C열연공장. 열연강판은 자동차 외판재 등으로 쓰인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건너 충남 당진으로 진입하자 고철을 가득 실은 대형트럭들이 씽씽 지나간다. 번호판을 보니 서울, 경기에서 부산, 경남, 전북까지 ‘전국구’다. 이 고철들은 당진으로 모여들어 새 철강제품으로 거듭나고 다시 전국으로 실려 나간다.

    ‘당진에는 두 가지 쌀이 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 쌀 생산지 중 하나인 동시에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 생산지라는 뜻이다. 당진에는 서해 아산만을 끼고 현대제철을 비롯해 현대하이스코, 동부제철, 동국제강, 환영철강, 휴스틸 등 6개 철강회사가 들어서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철강은 연 2500만t 가량. 포스코가 있는 경북 포항이나 전남 광양에 뒤지지 않는 규모다.

    철강 클러스터 형성 후 급성장

    세계 10위권 철강업체인 현대제철의 역사는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정부가 설립한 대한중공업공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철을 녹여 생산한 철강재는 전후 복구사업에서 1960~70년대 아파트, 지하철 등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근간을 만드는 데 쓰였다. 대한중공업공사는 1962년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민영화했다가 1978년 현대에 편입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당진에 입성한 것은 부도 처리된 한보철강공업을 2004년 인수하면서부터. 이후 현대는 일관제철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당진 일관제철소는 1고로와 2고로가 연산 800만t, 전기로가 연산 350만t의 규모를 갖췄다. 건설 중인 3고로(400만t)까지 완공되면 현대제철은 인천 및 포항 공장의 전기로 생산능력까지 합산해 연산 2400만t 규모의 세계적 철강업체로 부상한다.



    “저기 도로 보이세요? 거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죠.” (김일권 제품출하팀 계장)

    ‘제철소 전경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현대제철 측은 난색을 표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현대제철 당진공장은 740만㎡로 여의도의 2.5배에 달한다. 원료를 들여오는 항구에서부터 원료저장시설, 고로, 열연공장, 후판공장 등 생산설비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현대제철은 이 부지의 대부분을 간척으로 조성했다. 한보 시절부터 이곳에서 근무한 김 계장은 “현대가 들어온 뒤 제철소가 무서운 속도로 커졌다”고 회상했다. 고향이 당진인 그가 종종 저녁 횟감을 사러가던 성구미 포구도 공장부지로 매립돼 없어졌다.

    당진은 예부터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던 항구도시다. 당진(唐津)이란 지명도 ‘당나라 배가 드나들던 포구’라는 뜻이다. 아산만을 끼고 있는 입지가 당진에 철강 클러스터가 형성된 첫 번째 배경이다. 제철소가 들어서려면 무엇보다 초대형 선박이 접안 가능한 항구를 지척에 끼고 있어야 한다.

    현대제철이 사용하는 원료는 연간 2300만t. 20만t급 초대형 선박이 사흘에 한 번씩 들어온다. 당진공장 내 현대제철 부두는 수심이 20m가 넘어 초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다. 또 경인산업단지, 현대차 아산공장 등 대규모 수요처가 가깝고 서해안·당진대전간·평택제천간 고속도로 등 육상 인프라도 풍부하다. 올 3월에는 제2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18년에는 서해안복선전철이 완공돼 철로까지 갖추게 된다.

    일관제철소 효과 46조 원

    당진 지역경제는 현대제철을 꼭지로 철강 생태계가 촘촘히 짜여 있다. 현대제철의 열연강판을 현대하이스코, 동부제철 등이 가져가 냉연강판으로 만들고, 이것이 스틸서비스업체로 옮겨져 자동차 외판재 등으로 가공돼 현대차, 기아차 등으로 최종 납품된다. 이밖에 400여 개의 각종 철강업 관련 부품, 소재, 정비 회사가 당진 내에 포진해 있다.

    (주)엠텍이엔지도 이런 철강업체 중 하나다. 2002년 한보 출신의 강성진 대표가 설립한 이 회사는 전기로 엔지니어링 업체로 지난해 157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강 대표는 “현대제철 등 당진 소재 대기업에 납품하면서 기술력을 키워 고객을 전국으로, 해외로 확대하고 있다”며 “전체 매출의 20%가량이 수출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이 회사 직원 대부분도 외지에서 왔다.

    현대제철은 일관제철소 건설에 9조4850억 원을 투입했다. 현대제철이 집계한 경제적 파급효과는 생산유발효과 45조8810억 원, 고용창출효과 20만6100명. 3고로 건설현장에만 매일 1만10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자연히 당진은 인구가 늘었고 지역경제에도 활기찬 바람이 불고 있다. 당진 출신으로 천안에서 BMW 딜러를 하고 있는 최재혁 씨는 “충남에서 천안 다음으로 고객이 많은 곳이 당진”이라며 “현대가 투자를 시작한 뒤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된 고향 어르신도 많고, 철강업종에 종사하는 분들도 살림이 넉넉한 편”이라고 전했다.

    1990년대 12만 명 선이던 당진 인구는 한보 부도 등의 여파로 한때 12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현대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일관제철소를 짓기 시작한 2006년에만 1년 새 1만 명 이상 늘었다. 2013년 1월 현재 당진 인구는 15만4000여 명. 당진시청 관계자는 “매달 400여 명씩 증가하는 셈”이라며 “외국인 근로자도 5000여 명으로 주로 철강업종에 종사한다”고 설명했다. 고용률은 67%로 전국 76개 시 중 3위다.

    당진에는 ‘당총’이란 말이 있다. ‘당진에선 총각’이란 뜻으로 가족을 타지에 두고 혼자 당진에 와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현대제철 당진공장만 해도 직원 4500명 중 2100명이 ‘당총’이다. 송악읍 복운리에는 ‘이주단지’라고 불리는 원룸타운이 형성돼 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200여 채 원룸 건물에는 주로 ‘당총’들이 산다. 당진의 성비는 107.7로 충남에서 남성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쇳물이 포항보다 많다”

    ‘산업의 쌀’ 익어가는 세계 최초 ‘녹색 제철소’
    이런 지역 발전에 힘입어 당진은 2012년 1월 군에서 시로 승격했다. 현재 당진은 충남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김일권 계장은 “읍내에 버스터미널도 새로 생기고 고층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는 걸 보면서 고향이 도시로 변하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당진읍내인 수청동 일대는 언뜻 봐도 잘 구획된 신도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7년 전 LH가 조성한 아파트단지와 근린상가단지엔 활력이 넘친다. 아파트단지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롯데캐슬 등 ‘브랜드’ 아파트들도 최근 분양을 마쳤다. 수청동 주민 구본천 씨(64)는 “평당 1500만 원대에 달하는 부자동네”라며 “쇳물이 포항보다 많다니 잘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소를 건설한다고 했을 때 지역민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조상 대대로 벼농사를 짓던 땅에 제철소가 들어와 환경이 오염되는 것을 염려했다. 철광석과 석탄을 쌓아놓으면 바람에 날려 주변으로 흩어지고 비가 오면 빗물에 상당량이 씻겨 내려가는 게 사실이다. 이런 우려는 현대제철이 5500억 원을 투자해 ‘친환경 제철소’를 짓기로 하면서 해소됐다.

    Tips

    일관제철소란 철광석과 코크스 등 원료를 고로에 녹여 만든 쇳물에서 철강을 뽑아내고, 이 철강을 열연이나 후판 등 철강제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제철소를 뜻한다. 전기로 생산방식이란 철 스크랩(고철)을 전기로 녹여 쇳물을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다.


    일관제철소 안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돔형 저장고와 선형 저장고가 있다. 돔형 저장고에는 철광석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 있고, 선형 저장고에는 ‘출생지’가 표시된 석탄이 칸칸이 나눠져 적재돼 있다. 김갑곤 제선연료부 차장은 “석탄은 산지마다 화학적 성분이 달라 구분해 보관하는 것”이라며 “밀폐된 내부에 원료를 보관하기 때문에 비산먼지 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두에 도착한 원료가 이 밀폐형 저장고까지 옮겨지고, 다시 각 공정으로 투입되는 과정에서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부두에서 각 공정 설비까지 총 60km의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되어 있는데, 역시 밀폐형으로 시공됐다.

    이런 밀폐형 원료처리시설은 세계 어느 제철소에서도 시도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미국 뉴스전문채널 CNN은 2011년 당진을 방문한 뒤 “현대제철이 친환경 제철소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김 차장은 “인근 당진화력발전소가 증설을 추진할 때 주민들이 ‘현대제철처럼 석탄저장고를 밀폐형으로 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을 발전소가 받아들였다”며 “우리가 제시한 친환경 모델이 확산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례간담회 등 相生 노력

    ‘산업의 쌀’ 익어가는 세계 최초 ‘녹색 제철소’

    철광석을 보관하는 돔형 저장고 내부. 현대제철은 원료를 밀폐식으로 보관해 비산먼지 발생 등 환경문제를 해결했다.

    당진이 지향하는 지역 모델은 미국 피츠버그나 경북 포항 같은 ‘철강도시’가 아니다. 이철환 당진시장은 “농업과 철강이 공존하는 도시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한다. 당진이 철강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당진의 ‘본업’인 농업 역시 놓아서는 안 될 지역경쟁력이란 것이다.

    이에 당진은 ‘해나루쌀’이라는 지역 브랜드를 만들고 농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나루쌀의 품질을 높이려고 도정한 지 20일 지난 쌀은 자진해서 회수하는 제도를 시행하며(도정 20일 이후에는 밥맛이 떨어진다), 단백질 함량이 7% 이하인지 완전미(쌀눈이 붙어 있고 금이 가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쌀) 비율이 90% 이상인지 등을 수시로 검사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당진 해나루쌀은 지난해 사단법인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가 주관한 ‘고품질 쌀 우수 전업농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미국, 캐나다, 두바이 등지로 수출선을 확대한 데 이어 올해는 20개국에 1000만 달러 이상 수출하는 것이 목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을 도모하는 것도 당진의 주요 관심사다. 당진시는 2011년 1월부터 격월제로 정례간담회를 열고 있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당진 소재 11개 대기업 대표들과 시장, 경찰서장, 소방서장 등이 한자리에 모여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한다.

    이런 간담회를 통해 당진시는 지난해 35개의 지역 건설업체가 334억 원의 공사를 수주하도록 도왔다. 이들 대기업이 지역 제조업체의 물품을 구입한 것도 49개 업체 1580억 원 규모다. 현대제철이 연간 구매하는 당진 해나루쌀만 해도 연간 1200만t, 22억 원어치다. 이승희 총무홍보팀 과장은 “이 쌀을 당진 직원들만 먹는 게 아니라, 현대차 울산공장에도 내려보낸다”고 했다. 당진시청 기업지원과 관계자는 “기업들도 필요한 행정적 지원을 요청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장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차그룹과 현대제철

    “쇳물에서 자동차까지…세계 최초 자원순환형 그룹”


    전 세계 자동차회사 중 자동차의 뼈대와 피부라 할 철강까지 내부적으로 생산하는 회사는 현대차그룹이 유일무이하다. 현대제철이 철 스크랩을 녹여 만든 철근과 H형강을 현대건설과 현대엠코가 토목 및 건설에 사용하고, 낡은 건축물을 철거하면서 철 스크랩을 수거해 다시 현대제철 전기로에서 원료로 활용하는 전기로 중심의 자원순환경 고리가 형성됐다. 다만 이는 건설 분야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건립, 열연강판을 생산하게 되면서 자원순환형 그룹을 완성했다. 현대제철의 열연강판을 소재로 현대하이스코가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만들고, 이를 현대기아차 자동차 생산에 적용하고, 수명이 다한 자동차는 경기 남양종합연구소 내 ‘자동차 리사이클링 센터’에서 폐차 처리돼 다시 현대제철 철 스크랩 원료로 재활용하는 고로 중심의 자원 순환고리가 추가된 것이다.

    2006년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소 건설에 도전장을 냈을 때 일각에서는 “제철소 건설에서 자동차 강판 생산까지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현대제철은 2010년 일관제철소를 준공한 뒤 바로 가동을 시작해 2011년 8월 말 자동차 외판재 개발을 완료했다. 2012년 한 해에만 300만t의 열연강판을 자동차용으로 공급했다. 현대제철은 현대·기아차가 사용하는 강판 중 40%가량을 책임지고 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최고 수준의 철강제품으로 꼽히는 자동차 외판재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 강판에 특화된 제철소’라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1950년대부터 쌓아온 철강 생산 노하우, 그리고 그룹 내 협업 덕분이다. 현대제철은 2007년 당진공장 내에 현대제철연구소를 완공, 400여 명의 연구 인력이 고로 가동 전에 선행연구에 착수했다. 박응렬 기술연구팀 차장은 “현대기아차 연구원들이 현대제철연구소에 내려와 현대제철 연구원들과 함께 근무하는 등 자동차와 제철 간 정보교류와 협업이 긴밀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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