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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정수장학회 사건 이면의 또 다른 진실

  • 이정훈 기자│hoon@donga.com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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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1970년 11월 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김지태 씨(오른쪽).

김지태 씨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전 ‘혁명거사자금’ 500만 환을 요청했으나 김 씨가 거절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는 1976년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여기엔 박정희나 그 세력이 혁명거사자금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없다. 진실화해위와 국정원의 과거사위도 찾아내지 못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변 직후 부정축재자를 골라 재산 환수 통보를 했다. 김 씨는 5456만3000환의 환수금을 내야 했다. 1962년 3월 박 정권은 김 씨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그의 부인(후처)은 외환관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961년 해외에 나갔던 부인이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갖고 들어온 것이 밀수에 해당된다’고 해서 부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기업인이 언론을 한 것은 외도”

그해 5월 군 검찰이 김 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그는 언론 3사의 재산 환원을 결심했다. 그는 ‘나의 이력서’에 ‘나는 소내(교도소 내)에서 측근 모씨로부터 내 기업체 중 문화사업체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들었다.…신문사나 방송국은 공영사업이므로 누가 경영하든 이 나라 매스컴 발전에 이바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협상에 응할 심산이 섰다. … (나는)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고 적어놓았다.

언론 3사를 정부에 헌납한 후 그는 바로 석방됐다. ‘나의 이력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남고등군재는 피고인들은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이 농후하다는 이유를 들어 나를 비롯한 전원에 대하여 공소 취하를 선고했다. … 애지중지 가꾸어놓은 부산일보와…막대한 사재를 들여 궤도에 올려놓은 한국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은 1962년 5월 25일 5·16재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 장학회는 1962년 7월 14일에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 헌납이 ‘정수장학회=장물’이란 논리의 근거다. 그는 정수장학회 헌납에 대해 평생 원한을 품었을까. 그는 ‘나의 이력서’ 후반부에 ‘1962년 5월 그로부터 오늘까지 (근 15년간) 5·16장학회에서 부산일보를 비롯하여 서울·부산의 양대 문화방송을 확장하여 잘 운영함으로써 내가 소망한 대로 문화사업이 이룩되어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한 바 큰 것을 알고 나는 항상 장학회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신문을 하자니 바른 논설을 펴지 않을 수 없고, 정치를 하자니 정의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을 신문답게 하려 하고, 정치를 제대로 하려는 마당에서는 신문과 사업, 정치와 기업을 다 같이 굳굳하게 세워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기업인으로서 신문을 경영한 것도, 정치에 뛰어든 것도 모두들 외도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밝혀놓았다.

‘구제금융’ 받은 세 아들

언론 3사를 내놓았지만 그는 사업가로 실패하지 않았다. 삼두마차인 조선견직 등 세 회사를 내세워 고속질주했다. 그 시기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어떤 관계였을까. 1965년 그의 한 딸이 리틀 미스 유니버스로 선발됐다. 그의 자서전에는 박 대통령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이 딸을 안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1968년 5월 박 대통령이 ‘위김지태사장(爲金智泰社長-김지태 사장에게 드림)’이라는 글귀를 달아서 써준 휘호 ‘성업백세(盛業百世)’의 사진도 실려 있다.

박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다면 이 사진을 자서전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서슬이 시퍼런 유신 시절에 자서전을 냈으니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실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렵 박 정권이 그의 뒤를 봐줬다는 풍문도 있었다. 김 씨는 사업을 확장해야 하고, 박정희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으니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심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였을 확률이 높다.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다. 가공무역으로 경제를 키우려고 한 것이다. 한국 무역사에서 1971년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해 처음으로 10억 달러 수출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1970년엔 7억 달러를 수출했다. 1970년 11월 30일,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듬해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하자고 다짐하는 자리였다.

이날 박 대통령은 20여 명의 기업인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 씨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진그룹 전신인 한진상사의 조중훈 대표가 최고상, LG그룹 전신인 반도상사의 구자경 사장이 동탑, 대우그룹 창설자인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 씨 자서전에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는 그의 사진이 실려 있다. 6년 뒤인 1977년 박정희 정부는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 씨는 1억5000만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 씨는 1972년부터 아들을 각 회사 대표로 임명했다. 장남에겐 조선견직, 차남에겐 한국생사, 삼남에겐 삼화를 맡겼다. 그가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기업 사정이 나빠졌다. 삼화는 신발 수출이 활기를 띤 덕분에 잘나가 1977년 종합무역상사가 됐으나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해 1979년 은행관리를 받게 됐다. 다른 두 회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김 씨는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세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이 돈의 성격에 대해 유족들은 그들끼리의 소송에서 ‘구제금융’이라고 밝혔다.

3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한 1982년 4월 김 씨가 타계해 유족들은 상속을 받게 됐다. 상속은 재산뿐만 아니라 채무도 함께 물려받는다. 그들은 김 씨가 은행에 담보 설정한 부동산도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세 기업이 은행 돈을 갚지 못하면, 거액의 상속세를 내고 상속받은 그 부동산을 은행에 넘겨야 한다. 기업들이 은행 빚을 갚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속세만 날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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